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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누구의 이웃인가?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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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법에 기록된 것과 내가 아는 것이 일치되는 독법이 요구된다.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며, 귀로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들이 자신이 아는 것과 항상 일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자신이 아는 것으로 간주하며 살아가다가 자주 어려움을 만나곤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신앙적인 부분에서도 매우 빈번합니다. 성경의 신구약은 모두 이 문제를 지적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문제를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사 42:18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사 42:20에서는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라고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유의하여 보지 않고, 듣는 마음으로 듣지 않기 때문에 실패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 42:23에서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장래사를 삼가듣겠느냐”라고 책망하시며, 보는 눈과 듣는 귀를 회복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눅 10:23에서,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눅 10:24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라고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보는 것을 보는 눈과 듣는 것을 듣는 귀는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보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을 듣는 복을 누립니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듣는 것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눅 10:25-37은 그 중에서 대표적인 한 사람의 예를 제시합니다.

눅 10:25에서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질문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사는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사는 모든 유대인 사회에서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 탁월한 지식이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선생님” 정도로 아는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알며, 유대인 사회의 가장 중요한 질문이며, 가장 보편적인 질문인 영생, 즉 구원에 이르는 방법에 관하여 질문하였습니다.

그의 질문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질문”이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신이 율법을 준수하여 영생을 확보하고 있는 자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질문입니다. 자신이 예수님보다 구원에 이르는 길을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율법사에게 눅 10:26에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그랍호)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아나기노스코)”라고 반문하십니다. 율법사가 모세오경에서 본 “기록”과 그것을 어떻게 “인식(아나기노스코)”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의 독법(讀法)에 문제가 있다고 제시하십니다. 독법이 잘못되면 기록된 것과 그 기록을 아는 것이 틀립니다. 율법사는 기록된 것은 정확히 보지만 그것을 읽는 독법이 틀렸기 때문에 그 기록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보는 것을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 듣는 것을 들어도 듣지 못하는 자, 읽는 것을 읽어도 읽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육적인 눈으로 보고 읽는 것을 자신이 아는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독법의 문제를 제기하십니다.

2.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율법적인 지식이 아닌 자비를 베푼 자이다.

하지만 율법사는 여전히 당당하게 자신의 지식을 드러냅니다. 그는 신 6:5와 레 19:18의 말씀을 인용하며 눅 10:27에서 답변합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율법사는 예수님께서 인정하실 정도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핵심을 “기록된 글자”로 정확히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록의 의미는 정확히 읽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그러한 눈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의 독법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눅 10:28에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하시면서 두 번째 요구를 하십니다. 자신의 독법이 옳은지의 여부는 그 독법대로 살아보면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사는 여전히 자신이 자신의 독법대로 율법을 준수하며 살아왔다는 자신감 속에서, 자기를 옳게 보이며 나타내기 위해서, 눅 10:29에서 예수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반문하며 자기 의를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자신의 독법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율법사를 깨우치기 위해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모세오경의 “기록”으로 알고 있는 율법의 말씀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읽지 못하는 율법사에게 율법을 영생에 이르는 말씀으로 정확히 읽는 눈을 형성시켜 주기 위한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제시하신 대상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도 빼앗기고, 맞아서 거반 죽은 상태로 버려진 어떤 사람”입니다.

이 사건은 당대에 흔하게 발생한 사건이며, 오늘날에도 성지순례 다니는 사람들에게 빈번하게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은 사해로부터 서쪽으로 해발 760m 높이에 위치하며,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반면에 여리고는 사해 북쪽으로 해발 -250m 높이에 있습니다. 즉 해수면보다 더 아래에 위치하고 있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살아가는 큰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험한 바위산을 따라 북동쪽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강도만난 그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비유 상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예루살렘에서의 예배와 관련이 있었던 유대인이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이 있었습니다. 이들도 모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도중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집행하는 직분자였고, 레위인은 그러한 제사장을 돕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정황 상 제사장, 레위인, 강도 만난 자 모두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 모두 같은 동족이 강도 만나 죽게 되었는데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 사건은 의도된 사건이 아니라 “마침” 나타난 사건이었습니다. 마음속에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의도가 없는 상태에서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이 늘 자신들의 이웃으로 여겼던 같은 동족이었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의도하지 않고 있던 사건과 상황이었기에 그 모습을 보고도 의도적으로 “피하여” 지나간 것입니다. 즉 율법의 요구대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마음의 의도대로 결정한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도 율법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에 대한 그들의 독법의 결국은 그들이 마음으로 의도한 대상과 의도한 계획에 의해서만 적용되고 실행되는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이웃은 유대인조차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의도에 해당되는 존재만 이웃이 되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기록은 읽었지만, 그 이웃 사랑은 자신과 자신의 삶의 영역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로 등장한 어떤 사마리아인은 율법사와 같은 유대인들이 가장 미워하는 원수로 여기는 민족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교류조차 하지 않는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에 그 현장을 목격하였습니다. 예배와도 율법과도 무관한 상황에서 그 현장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취한 일련의 움직임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의 의미대로 강도만난 자의 이웃으로서 그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었습니다.

그는 첫째,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둘째, 그를 위해서 가던 길을 멈추었습니다. 셋째,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넷째, 기름과 포도주로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다섯째, 그를 자기의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갔습니다. 여섯째, 주막에서 그를 돌보며 함께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일곱째,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며 그 사람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고, 부비가 더 들면 자신이 갚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러한 행위가 아무 조건 없이 이웃에게 행한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3. 이웃을 찾는 자가 아닌 이웃이 되는 자로 율법을 읽어야 한다.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눅 10:36에서 율법사에게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세 번째 질문을 하십니다. 비유 앞에서 율법사는 더 이상 유대인의 교만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원수지간인 “사마리아인”을 이웃이라고 말할 수도 없어서 눅 10:37에서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우회적인 답변으로 대신하였습니다. 율법적으로 깨끗하다고 주장하는 제사장도, 레위인도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아니었고,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이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종적으로 그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이와 같이”란 “항상 어떤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원수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웃 사랑의 행위”를 말합니다. 마음에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상관없이 강도 만난 자를 보는 그 순간, 그의 신분, 조건, 상황, 대가에 관계없이 무조건적으로 그를 불쌍히 여기며 자기 몸처럼 그를 사랑하는 자비의 행위를 말합니다. 하지만 모세오경의 율법을 자기중심의 독법으로 읽는 한 그러한 사랑을 행할 수 없습니다.

영생을 바라는 율법사의 사랑과 예수님이 원하는 사랑이 다릅니다. 기록된 문자로서 율법을 대하는 율법사는 문자적인 사랑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행함이 있는 사랑을 원하십니다. 또한 율법사의 이웃관과 예수님의 이웃관이 다릅니다. 율법사는 자신을 중심으로 결정된 이웃을 사랑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의 이웃이 되어가서 그들에게 사랑을 줍니다. 즉 예수님에게서 이웃은 내가 찾을 대상이 아닙니다. 내가 이웃이 되어져야 할 존재입니다.

이 차이는 율법사와 예수님의 질문 사이에 뚜렷하게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눅 10:29에서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나 눅 10:36에서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것입니다. 율법사의 질문은 자신을 중심으로 이웃을 찾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강도 만난 자를 중심으로 누가 이웃이 되어 주는가의 질문입니다. 율법사의 이웃은 강도 만나 유대인이지만,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사마리아인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사가 영생에 이르는 율법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율법의 기록은 율법사와 예수님이나 모든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네 이웃”은 문자적으로도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입니다. 그 속에는 유대인, 이방인, 동족, 원수,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모든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 중심으로 이 말씀을 읽는 독법은 “자기를 중심으로 자신의 욕심의 한계 까지만 자신의 이웃으로 결정”하며 사랑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사와 같은 독법은 이미 율법을 어기는 것이며, 자신의 행위로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것처럼 자신이 모든 자들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은 이미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웃이라는 전제를 포함합니다. 즉 사마리아인처럼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주는 자만이 모든 사람을 이웃으로 삼으며 율법에서 요구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준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웃 사랑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율법사는 자신의 행위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인간의 행위로 자신의 이웃을 결정할 수는 있지만, 자기 스스로 모든 자들이 이웃이 되어 줄 능력은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은 이러한 우리의 죄악을 드러내는 몽학선생입니다. 이제는 나의 행위를 포기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이 되어가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능력과 행위 중심으로 이웃을 찾고 결정하고 사랑하였습니다. 이웃의 조건에 따라 이웃의 경계를 결정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유대인 공동체만을 이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나에게 유익을 주는 존재만, 나에게 대가를 지불할 존재만, 나의 명성과 성취감을 채워줄 존재만 이웃으로 정하며 상대해 왔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율법사와 같은 독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것입니다. 아직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단한 수고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성도들은, 그 사랑에 힘입어 모든 자들의 이웃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이웃은 내가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풀 때 선한 이웃이 되어질 때 이웃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영생을 누리는 자라면 예수님의 사랑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웃이 되어져 가야 합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은 틀린 질문입니다. “나는 누구의 이웃인가?”가 바른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의 조건에 관계없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에 찾아 가서, 말과 행동과 물질 등으로 자비를 베풀며 이웃이 되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독법입니다.
(김 종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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