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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 전파의 기쁨 (시 126:5~6, 눅 10: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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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은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출석자(church attendant)이며, 둘째는 믿는 자(believer)이며, 셋째는 제자(disciple)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된다면 단계적으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믿는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제자 되어야 합니다. 모두 제자가 되십시오.

  제자와 사도가 어떻게 다른지 아십니까? 마태복음 10:1에는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0:2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라고 합니다. 제자를 사도라고 합니다. 제자란 ‘마세테스’라는 말로서 배우는 자란 뜻입니다. 사도는 ’아포스톨로스‘란 말로서 보냄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배울 뿐만 아니라 보냄을 받아야 합니다.

  제자는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배우는 것에 그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교회 밖에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성령강림 이후에 사도라는 이름으로 일했습니다. 성령강림 이후에는 제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무신론자인 니체가 언젠가 왜 그리스도인들을 그토록 부정적으로 보느냐는 질문 받았습니다.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이 눈꼽만치라도 구원받은 사람들처럼 보인다면 나는 그들의 구원을 믿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잘못된 삶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무신론자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니체도 오류가 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보다 더 나으냐 하며 그렇지 못합니다. 눈꼽이 아니라 미세한 먼지만큼이라도 자신에게 선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받지 않았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제자 훈련을 합니다. 배우는 자로서 훈련을 받습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것은 사도훈련입니다. 나가서 섬기는 자로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배우는 것은 잘 하는데 나가서 사는 데는 미흡합니다. 부족 투성이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70인의 사도를 따로 세우시고 파송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나가서 전도하고 돌아와서 기뻐하며 보고하였습니다. 전도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도 복음전파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자만이 아는 기쁨을 만끽하기를 바랍니다. 기쁨으로 복음전파에 앞장서기를 바랍니다.

첫째,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은 참 기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고 비판하시며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70인이 기뻐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기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합니다. 귀신들이 항복하고 이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이런 현상을 가지고 만족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고 합니다. 사실은 70인 사도들이 대단히 잘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이런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들의 권세를 보세요. 마태복음 10:1에는 제자들을 처음 선택하실 때에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하여 이 권세를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3:15에는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하여 같은 권세를 주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권세를 가지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전도자들이 일의 업적에 따라 만족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을 행함으로 자만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룟유다도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고, 이적을 행하였고, 병을 고쳤습니다. 모든 제자들에게 주신 권능을 다 가지고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가지고 자랑하거나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의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적 중심의 평가는 위험하고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방법은 아닙니다. 선교사들이 사역보고를 합니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실적 중심의 보고가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낙담하고 낙망하고 낙심합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수년 동안 영국 의회에 노예제도 폐지를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가 보이지 않아 낙심하였습니다. 그 일을 그만두려고 하였을 때에 자신의 나이든 친구 존 웨슬리가 이 소식을 듣고 임종 전에 침대에 누워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이 일에 사용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다면 너는 벌써 사람들과 악마들에 의해 지쳤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므로 누가 너를 해칠 수 있겠는가? 그 중 하나님보다 더 센 자가 누가 있는가? 오, 선한 일을 하면서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서 그분의 힘의 능력으로 계속 싸워라. 미국의 노예제도조차 없어질 때까지.” 웨슬리는 6일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윌버포스는 45년 동안 더 싸운 후 1833년에 죽기 3일 전 영국의 노예제도가 폐지된 것을 보았습니다. 성과가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때에 성과는 나타납니다.

  요즘은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성과에 따라 평가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도 성과만 따집니다. 배런 힐턴은 “인생은 그 사람이 거둔 물질적 성과가 아니라 정신적 성과에 의하여 평가된다”고 하였습니다. 사실은 정신적 성과보다 영적 성과가 더 중요합니다.

  물질적, 현상적 성과를 과시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말씀이 현상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나사로는 부잣집 문 앞에서 빌어먹던 거지였습니다. 두 사람이 다 죽었는데 나사로는 낙원에 가고 부자는 음부에 갔습니다. 부자는 괴로워 아브라함에게 거지 나사로를 보내 혀에 물 한 방울만 떨어트려 달라고 하였지만 거절당합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형제에게 나사로를 보내 음부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가 있지 않느냐고 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란 성경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성경을 봐도 믿지 못할 것이라고 하자 아브라함은 성경을 믿지 못하면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아도 권함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지만 말씀을 믿지 않으면 이런 현상을 봐도 믿지 못합니다.

  전도자가 귀신을 이깁니까? 전도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기십니다. 귀신이 항복하고 귀신을 쫓아내신 성경의 기적은 여러 번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기적은 네 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베드로와 바울도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기뻐할 것이 없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귀신은 절대 항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 잠시 떠난 사탄은 십자가까지 따라와서 다시 시험합니다.
  귀신이 항복한다고 하지만 진짜 항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은 절대 항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귀신은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항복하는 것도 지혜인데 귀신은 어리석어서 항복하지 않습니다. 미리 항복하면 좋을 걸 끝까지 항복 안하고 있다가 호되게 얻어맞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에 보시면 귀신 들린 아이가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자빠지게 합니다. 산 아래에 남아 있던 아홉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왜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귀신이 항복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항복하였습니다. 왜 못 고쳤습니까? 예수님은 그 답을 간단히 말씀하십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은 기도 때문입니다. 항복하는 것은 기쁘지만 참 기쁨은 아닙니다.
  야고보서 2:9에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합니다. 귀신들은 믿고 떨어도 구원도 못 받습니다. 이런 귀신들이 항복한다고 좋아할 것도 없습니다. 참 기쁨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둘째, 전도자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이 참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의 뜻은 전도자의 이름은 반드시 하늘에 기록된다는 뜻입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내 이름으로 귀신 쫓아낸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한 것을 기뻐하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참 재미있는 해석입니다.

  승리한 전도자의 이름은 반드시 기록됩니다. 더구나 성경은 “새 이름”을 기록한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17에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승리자는 헌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생명책에 기록할 것입니다.

  생명책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풍부합니다. 빌립보서 4:3에는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3:5에는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합니다. 승리자의 이름은 시인하고 기록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부르시는 것은 축복하고 명령하고 경고하시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32장에는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에게 천사가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실존적 계획은 야곱의 옛 이름을 폐하시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새롭게 기록하기 위해 물으십니다. 천사와 씨름하여 승리한 자의 이름으로 기록하시려고 물으십니다. 그 기록된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그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출애굽기 33:12에는 하나님께서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라고 하십니다. 출애굽기 33:17에는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름으로 아시고 기억하시고 기록하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을 때에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32:32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모세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우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비행기 예약자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빠져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저는 딱 한번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미국 국내선을 타고 LA에서 샌프란시스코에 학교에 갈 때에 비행장에 갔을 때에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예약은 했지만 확인을 하지 않아서 이름을 뺐다는 것입니다. 학교는 가야하는데 비행기를 태워주지 않고 좌석도 없다고 하여 그 다음 비행기를 더 비싼 돈을 주고 탄 적이 있습니다. 정말 당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땅에서야 또 무슨 수가 생기지만 하늘에서 이런 일이 없어야 합니다. 반드시 이름이 기록되고 불려져야 합니다.

  찬송가 168장을 참 좋아합니다. 후렴을 보세요.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부를 때에 잔치 참여하겠네”. 찬송처럼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고, 나팔소리 날 때 불려지기를 바랍니다.

결론

  쉘돈 바나우켄은 “기독교를 위한 최상의 도구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의 기뻐하는 모습과 확신 그리고 온전함을 보라. 하지만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논증의 도구 역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이 우울하고 전혀 즐거워하지 않을 때 또 편협하고 공격적일 때 기독교는 수천 번도 더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전도자의 기쁨은 교회의 얼굴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시편 126:5-6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합니다. 복음을 위한 눈물은 반드시 기쁨이 되어 돌아옵니다. 눈물로 뿌리는 자만이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전파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이 기쁨을 모두 누리기를 바랍니다.
(이 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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