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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음성 분별하기(2) (요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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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태풍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키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우리의 좁은 생각에는 태풍 같은 것은 달갑지 않은 손님 같지만 환경이나 생태를 위해서 기여하는 측면도 크다고 합니다.

화요일 날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우산 가지고는 답이 안나올 것 같아서 차를 가져오도록 부탁을 했는데 교회를 나가면서 양쪽의 식물들을 보니까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나는 비 때문에 불편해 진건데 또 한편에서는 그렇게 행복해 하는 초목을 보면서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 하나님께서는 창조주 아버지로서 모든 만물을 돌보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듣기”라는 연속주제설교의 결론으로 “하나님의 음성 분별하기”라는 제목으로 그 첫 부분을 말씀드렸습니다. 일곱 가지 시금석 가운데 세 가지를 살폈습니다.

그 첫째는 우리에게 떠오른 생각이나 느낌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일치하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금석은 이 새로운 느낌이나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닮아가게 하는가를 질문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 생각을 내가 속한 신앙공동체가 확인해 주는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오늘 네 번째에서부터 나머지 네 개를 살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으십시오. 항상 주님을 닮아가는 목표를 잃지 마십시오. 그리고 신앙이 좋은 친구들에게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방편으로 주중에 모이는 구역 모임에 꼭 소속 되어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기 위해서 나머지 네 가지 시금석을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4. 그 생각이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모습과 부합하는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계획하시고 여러분이 세상에서 어떤 기여를 하다가 올 것인지를 정하시고 거기에 합당하게 여러분을 지으셨습니다.

거기에 합당한 능력을 주시고 마음을 주시고 열정을 주셔서 지음 받은 일을 잘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특정한 목적에 부합하는 존재로 하나님은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아이들 동화책에 그런 이야기 있지요? 토끼와 오리가 수영대회하고 달리기 대회를 하는데 물갈퀴가 있는 오리를 토끼가 이길 수 없습니다. 아니 물갈퀴가 찢어지도록 달려도 육상에서 토끼를 이겨 낼 재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이 미리 창조하신 작품들입니다. 그 일을 하도록 생각을 주시고 그 일에 합당한 모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하기에 적합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가구 하나도 아무 생각 없이 장인이 만들지 않습니다. 의자를 한번 보십시오. 의자 모양은 그 의자 용도에 합당하게 만든것입니다. 여러분이 앉아있는 장의자를 여러분의 거실에 들여놓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거실에 있는 의자도 용도에 따라서 손님을 맞이하는 의자로 쓸 것인지 아니면 혼자서 편안하게 텔레비나, 신문을 읽으면서 쓰는 의자인지에 따라서 생긴 모양이 다릅니다. 소파도 있고 보조의자도 있고 흔들의자도 있습니다.

용도가 다르면 모양을 달리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독특한 모습은 여러분의 독특한 임무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모습의 사람인지를 보면 여러분이 어떤 일에 적합한 것인지 드러납니다. 아이들마다 공부 잘하라고 해서는 안돼요. 다 공부 잘하도록 만들지는 않았다니까요. 선생님들이 착각을 잘하지만요. 선생님들은 가르치는게 자기 일이다 보니까 아이들을 볼 때 공부 잘하는 놈, 못하는 놈 그렇게 구분해요. 그래서 공부 못하는 아이는 2등 시민인 것처럼 취급하지마는 하나님은 그렇게 짓지를 아니하셨습니다. 공부는 못해도 축구는 끝내주도록 잘 차도록 만듭니다. 공은 못 차도 손재주는 있도록 짓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드시고 빚으신 그 모습은 여러분의 생애가 어떻게 펼쳐질 지를, 여러분의 인생에 대한 엄청난 양의 하나님의 뜻을 미리 말해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마다 어떤 일이든 한 가지씩은 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롬12:6 상반절, 현대어성경)

뭔가 세상의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한가지 쯤은 잘 할 수 있도록, 사실은 한 가지 이상 능력들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음악을 잘 하도록 만드셨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그것을 하고자 하는 욕망과 재능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 분은 성가대에 앉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노래하는 것이 부담이 되지 않고 즐거움으로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 앉아야 듣는 우리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고 즐거움이 됩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서 몇몇 교역자들은 거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자기 은사가 아닌데 성가대에 자리를 차지하면 얼마나 서로 힘든지 몰라요. 말해주기도 어렵지만 어렵사리 충고 해주면 나를 성가대에서 떠나라 한다고 ‘나 이교회 떠나겠다’이렇게 나오니까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노래 못하는 사람은 자기 음정이 틀리는지 안 틀리는지 몰라요. 옆에 사람 다 아는데 그러니까 앉아서 버텨 내는 거예요. 물론 제가 절대 음감이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마는 보면 입모습이 보이잖아요? 자신 있게 소리를 내는 건지 아니면 따라서 움직이는지는 구별할 수 있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일을 잘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올 하반기에는 여러분 각자에게 적합한 사역개발을 위해서 신경을 좀 쓸려고 합니다.

사역개발에 대해서 상반기부터 생각하고 준비해 온 것을 구체적으로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지음 받은 모습에 따라서 봉사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요 공동체에도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는데 그게 하나님이 여러분이 지으신 모습과 일치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을 보면 그냥 자기 부서에 데리고 가려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그 부서에 적합한지 않은지 상관없이 우리 부서에 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서로 힘들거든요.

오라고 해도 여러분 스스로는 잘 알지 않습니까? 저는 성가대에 오라는 요청을 받은 적도 없지만 제가 거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최소한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자신 있게 소리도 내지 못하면서 앉아 있는 것을 보면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성가대 뿐이겠습니까? 다른 부서들도 마찬가지거든요.

각자의 모습에 따라서 주님의 교회를 섬깁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여러분의 모습과 일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최종 확인하는 것은 여러분의 모습에 따른 부름이라야 합니다. 지음 받은 모습에 따라 봉사할 때 우리 각자는 세상에 놀라운 충격을 주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5. 떠오른 생각이 나의 책임과 부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책임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부활 후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정확히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요한과 눈이 마주치자 요한에 대해서 묻습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답하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주님은 워낙 성숙하셔서 말을 부드럽게 하셨네요. 그렇죠? “내가 올 때까지 그를 세상에 머물게 할지라도 네하고 도대체 상관이 무어냐?” 이랬더니 또 옆에 그 말 듣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아가지고 막 나가서 “요한은 죽지 아니할 것이다” 이렇게 말했대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베드로 너는 왜 그런 일에 신경을 쓰냐? 나를 따를 것에 마음을 써야지 다른 사람의 삶에는 아무 관여할 바가 아니다”라고 권면하십니다. “네 일이나 해라”고 충고하십니다.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 다른 사람의 일을 가지고 염려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여러분 자신에게 하시는 음성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관련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해야지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들으려고 신경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서도 여러분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듣도록 하십시오. “우리 남편이 오늘 들었어야 되는데” 그러지 말고 “우리 아내가 들었어야 되는데” 그러지 말고, 성가대원을 예로 들었다고 해서 성가대 찬양하면 누가 은사가 없는 사람인지 보겠다고 살피지 말고 그건 여러분이 해서 될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책임을 져야하는 일에 대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살피겠다고 드는 것은 상당히 주제넘은 일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여러분은 알 수도 없고 알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조차도 구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무슨 여유가 있어서 다른 사람의 삶을 판단하려고 듭니까?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당신이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비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지 넘어지든지, 그것은 그 주인이 상관할 일입니다.”(롬14:4, 표준새번역) 여러분은 자신이 책임질 일에만 초점을 맞추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실지 여러분이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에게 가서 이렇게 말씀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는사람들이 가끔은 있습니다. 대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말 만큼 잘못 사용되고 다른 사람의 삶에 문제를 일으키고 손해를 끼친 말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체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신앙이 좋을 수도 있고 여러분이 영적으로 깊어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여러분한테 맡겼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는 자신의 일도 잘 모릅니다. 왜 남의 일까지 간섭하려 듭니까?

다시 말합니다. 자신의 일이나 살핍시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일을 자기 입으로 하나님께 말할 날이 올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까지 여러분이 아는 듯이 설쳐서는 안 됩니다.

물론 우리가 하는 말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 의미심장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대개는 말하는 나 자신도 그런 영향을 끼치게 되리라고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냥 한 말인데 듣는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하게 그의 삶에 스파크를 일으킬 수 있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로 본인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분이라니까요.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직거래를 하기 원하시지 여러분을 중간에 넣어서 말씀하시려고 하지를 않는다니까요.

만약 여러분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신다면 여러분 자신은 우쭐될 것이고 자신을 부각시키며 그 사람을 수중에 넣으려고 들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여러분을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상적인 방법은 직접 각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경우 대개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 당사자에게 하신 말씀을 확인하는 경우입니다. “그래, 맞아 하나님께서 이미 나에게 말씀하셨는데 순종하기를 지금껏 미루고 있었어!”라고 말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어야 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하신 말씀을 확인하시기도 하시면 여러분을 통해서 그에게 이미 하신 말씀을 확인해 주기도 하실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기피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특별한 경우 여러분이 소중히 여기는 그 사람을 위해서 말해주어야 할 때도 드물게는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기다리고 서둘지 마십시오. 먼저 많은 기도를 드리십시오. “하나님 꼭 내가 해야 됩니까? 하나님 직접 하십시오. 천지간에 그 영혼에 대해서 책임 있게 사랑 가운데서 말해줄 사람이 저밖에 없으면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나 원치 않습니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너무나 큰 위험부담이 있습니다.”

그런 심정으로 직접 대면해야 될 경우가 있지요. “너 아무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해, 널 사랑하기에 말해주지 않을 수 없어! 제발 잘못된 길로 더 이상 치닫지 말았으면 해!”

사업상 비리일 수도 있습니다. 남녀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중독일 수도 있습니다. 그 잘못을 알고 있는 여러분이 말해야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그런 일이 여러분의 소임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해줘야 되든 입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먼저 물어보십시오. “이것이 내 책임소관인가?”그러면 이제 여섯 번째 시금석을 살펴봅시다.

6. 죄를 깨닫게 합니까 아니면 죄책감에 빠지게 합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정죄 아래 살아가면서 자기를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마귀의 음성입니다. 그 차이를 설명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반면에 마귀는 우리를 정죄합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목적은 여러분의 삶에 잘못된 무언가를 바로 잡아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죄의 목적은 여러분으로 침체하도록 하며 비참한 느낌을 갖게 하며 죄책감과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배후에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있습니다. 더 나은 삶을 도와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관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죄의 배후에는 여러분의 용기를 꺾으며 여러분을 비참하게 하고 스스로를 혐오하게 만드는 사탄의 악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죄를 깨닫게 도우실 때는 구체적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마귀가 우리를 정죄할 때는 일반적입니다. 모호합니다.

죄에 대한 깨달음은 구체적이고 정죄는 일반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보여주실 때는 잘못된 부분을 꼭 집어 주십니다. 해결책을 주십니다. 고백하고 인정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변화하도록, 새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고 그리고 나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기쁨이 회복됩니다.

하지만 정죄는 우리를 계속 짓누릅니다. 수일이 지나도 수년이 지나도 죄책감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느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분명하지는 않으면서 모호한 죄책감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내 삶은 뭔가 잘못되었어. 난 모자라, 난 쓸모없는 존재야”그런 느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어쩌aus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자신의 소리이거나 마귀가 하는 소리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하나님을 믿고 그 아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십자가에서 그가 하신 일을 믿으면 여러분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넌 희망이 없어, 너는 쓸모없어, 넌 더러운 존재야, 사랑받을만하지 못해, 쓰레기 같은 존재야, 네까짓 것은 죽어야 해”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말이 귀에 들리면 마음에 떠오르면 그것은 사탄이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것은 정죄고 마귀의 전유물입니다. 마귀가 여러분을 비참하게 만들기 원해서 그렇게 속삭입니다.

그러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어떠할까요?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

어떤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일러주고 깨닫게 하며 고쳐준다. 그러므로 진지해져라, 그리고 마음과 태도를 바꾸라”(계3:19,AMP)

죄를 깨닫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해 주십니다. 그리고 해결책을 제시하십니다. 수긍하자마자, 그 죄를 고백하자마자 죄책감을 사라집니다. 용서의 기쁨과 죄 사함의 평안이 자리합니다.

그러나 마귀가 주는 정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 여러분이 지은 죄에 대해서 용서받기 위해서 얼마나 자주 여러분은 고백해야 합니까?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고백했는데도 계속해서 죄책감이 떠나지 않고 다시 고백하고 다시 고백하고 다시 고백한다면 그건 어떤 이야기입니까?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석달 전에도 고백했는데 오늘 또 고백하고 또 언젠가 또 고백하고 그러면 “하나님, 전 하나님께서 첫 번째 고백을 받아주셨다고는 믿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의 부족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고백하자마자 용서하십니다.

죄를 고백했는데도 죄책감이 남아있다면 그 죄책감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고백한 문제를 두고 죄책감을 주시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여러분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그 값을 이미 지불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청산했다고 주님이 소리치셨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 받으셨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또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면 그건 이중으로 요구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실 리가 만무합니다. 고백하면 우리 죄는 용서받고 우리는 방면됩니다. 자유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는 죄로 인해 죄책감을 가져야 할까요? 고백하는 순간 바로 용서받습니다. 천만분의 일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죄책감을 언제나 갖고 살아야 영적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마치 죄책감이 있어야 경건해 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엄숙한 표정을 아무 이유도 없이 그렇게 지어야 더 경건한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더 많이 죄로 인해 고민하는 것이 더 영적으로 변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죄의 흑암 속을 헤매길 원치 않습니다. 밝은 감사의 빛 가운데 거닐기를 바라십니다.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을 바라보는 대신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관심을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 잘못을 용서해주신 주님을 바라보면 죄책감에 사로잡힐리 없습니다. 감사와 찬송이 터져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 모두는 수 없는 잘못을 지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잘못을 바라보면 우리는 죄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대책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보내셨습니다. 우리 죄를 위한 용서의 길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마귀가 찾아와서 우리에게 속삭이면 잘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응수해주십시오. 맞아, 그래 맞아 네가 이야기하는 모든 이야기는 맞아 내가 잘못 한 것 틀림없어. 내가 지은 죄가 틀림이 없어.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죄를 용서해 주신 분이 계셔. 내가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용서하시는, 받아주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분이 계셔. 그러면 마귀는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가 없습니다. 맞아 맞아 그 모든 것이 내가지은  잘못이 틀림없어.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용서하신 예수님이 계셔. 하나님은 여러분이 죄책감으로 살기보다 감사함으로 살기를 바라십니다.

사단을 언제나 우리를 괴롭히는 일에 선수입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죄를 짓는다는 것은 조그만 일에 불과하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나면 다시는 가망이 없는 엄청난 죄를 벗어날 길이 없다고 소리칩니다. 다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고 위협합니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실수를 합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라고 쓰레기에 불과하고 세상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렇게 평가절하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단 한사람 여러분이 있어도 여러분을 구하기 위해서 그 아들을 보내셨을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그런 자기 모습은 스스로 조작해내었던지 사단이 우리에게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하긴 자랄 때에 힘든 부모님 아래에서 자란 분들도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신앙생활 하는데도 그게 어려워요. 어떤 분은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하면 아버지가 떠올라서 그 말하기가 너무 힘들대요. 그래서 어떤 여성 신학자들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 가부장적이라고 바꾸자고 그렇게 들고 나오기도 합니다. 아주 심한 아빠 엄마의 욕설과 저주가 여러분의 생각 속에 각인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여차하면 “이 빌어먹을 놈아”하고 소리치고 혼자말로 “내가 저런 놈을 낳고도 미역국을 먹었나!”하기도 한 부모 말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면 신앙이 자라기 어렵습니다. 기도의 자리에 나가고 싶질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하나님은 “넌 아직 멀었어. 언제 쯤 네가 밥값 할 거야?” 이렇게 말 하는 것처럼 느껴지면 어떻게 신앙이 자랄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옛 기억을 다 지워버리십시오. 여러분에게 좋잖은 느낌과 생각을 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여러분을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받으셔서 오늘도 이 예배의 자리에 늦게나마 나오게 해주셨습니다. 비가 오니까 2부예배가 줄어들고 3부예배가 많아지는 거네요. 게다가 3부예배도 지각하는 사람이 있네요. 참 신기해요. 11시에 예배를 드릴 때도 지각하는데 1시간씩 뒤로 늦추어도 또 지각이 있어요. 생각을 좀 고쳐야 될 것 같아요. 그렇죠? 마음을 다잡아먹어야 됩니다. 절대 물리적으로 지각하도록 구조가 되어 있는게 아니라 여러분 정성이 문제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대적 사단을 가리켜서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계12:10)라고 합니다. 우리 형제들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헐뜯고 비방하는 자로서 그렇게 말 합니다. 사단이 그 일을 하지 하나님이 우리를 험담하고 비하시키고 그렇지를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불유쾌한 기분을 갖도록 하는 것은 사단의 전문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전문사역은 우리에게 평안과 기쁨,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7. 하나님의 평강을 느끼게 합니까?

어떤 느낌이나 생각을 갖게 될 때 그것이 여러분을 괴롭히고 스트레스를 받게 합니까? 감당이 안 되고 혼란에 빠지게 합니까? 그렇다면 그 생각은 하나님이 주신 것일 리 만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평강을 누리기 원하시지 혼란에 빠지길 원치 않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3) 우리의 삶에 의미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부모 되신 여러분, 여러분의 모습을 통해 자녀들이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닮는 게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믿는다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스트레스를 줘서 되겠습니까?

물론 밤새워가며 오락을 하든 말든 간섭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소리치고 신경질 내기 보다는 낮은 목소리로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일러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어느 나이 때 까지만 가능하지 나이가 들면 아무리 차분하게 말해도 그놈이 더 차분하게 자기 논리를 펴면 속만 터집니다. 그러나 해야 할 것을 하도록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도록 권면하는 것은 마땅한 부모의 일입니다.

여기도 차이가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강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원하는 마음을 주사 이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의 90%는 격려입니다. 최근에 어떻게 하나님이 여러분을 격려하셨습니까? 오늘 설교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는 말씀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염려와 평강 가운데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이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염려는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스트레스를 가져다주는 염려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여기는 또한 믿기 어려운 엄청난 약속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고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감사함으로 아뢰면 시각을 초월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분명한 표시는 우리 마음에 환한 빛이고 우리의 마음에 갑자기 찾아오는 평안입니다. 삶의 폭풍우 가운데서도 찾아오는 놀라운 평강은 하나님만이 주십니다. 그래서 “이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라고 노래하는 것은 결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모두 다 언제나 봄날과 같은 좋은 일기여서가 아닙니다. 우리도 때로 태풍 속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작은 삶이 버틸 수 없을 만큼 힘을 합치는 태풍 가운데서 우리가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이 주신 평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 맺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분별하기”라는 제목으로 모두 일곱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성경과 일치하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주님을 닮아가게 하는가, 셋째는 신앙공동체가 확인해 주는가, 넷째는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모습과 부합하는가? 다섯 번째로 나의 책임과 부합하는가?  여섯 번째로 죄를 깨닫게 하는지 죄에 얽매이게 하는지 일곱 번째로 하나님의 평강을 느끼게 하는지 어떤 생각이나 어떤 느낌이라도 결과적으로 이 일곱 가지를 가지고 검증해보면 어느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우리가 판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정 근 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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