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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의 마음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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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추석입니다. 우리들에게 명절이라는 것은 가족을 돌아보게 하는 아주 소중한 시간들입니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더 부모님이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것 같습니다. 다른 때는 제 살기에 바빠서 고향의 부모님들을 생각하지 못하다가 명절 때면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명절 때만 그러는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입니다. 어쨌든 명절은 참 좋습니다.
부모님을 생각하고 형제들을 돌아볼 수 있으니까요. 이 번 추석 명절에도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가정마다 웃음과 행복이 풍성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또한 안타깝게 생각되는 것은 명절이 되면 더 쓸쓸해지고, 서글퍼지고, 외로워지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아픔을 가진 분들도 많이 계시지요. 혹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그분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와 풍성한 사랑의 손길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힘내세요. 주님이 계시잖아요.
눈동자처럼 지켜봐 주시는 하나님이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이산가족들을 찾아주는 방송에서 한 젊은 신사분이 기력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한 노인을 포옹하고 ‘아빠 아빠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세요.’ ‘얼마나 불러보고 싶었는지 아세요.’ 하면서 펑펑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님, 아버님 그러면 좀 어울릴 것 같은데 아빠, 아빠라고 부르더군요.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면서 우시는 우리 어머님처럼 저도 텔레비전 앞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웠던 아버지, 불러보고 싶은 이름, 안겨보고 싶었던 아버지의 품에서 그 신사는 복받쳐 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저희가 원주에 간다고 전화를 드리면 가는 동안 여러번 전화가 옵니다. 어디쯤 오고 있느냐, 조심해서 천천히 와라, 여러번 휴게소에 들려 쉬었다가 오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리고는 도착할 시간 보다 30분은 더 일찍 차가 들어오는 길목으로 나와서 계시면서 지나가는 차가 혹시 아들차인가 살펴보시면서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요즘은 도착 예정시간을 한 30분 뒤로 일러 드립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아셨는지 나와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어머니 생신에 들렀는데 나와서 한참을 기다리셨나 봅니다. 계단을 오르면서 뒤를 돌라보았습니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오시는 것도 이제는 많이 힘겨워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76세가 되신 노인이신데 기력이 많이 쇠하셔서 힘들어 하시는 모습이셨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제게는 든든한 아버지이십니다.

어떤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에 대한 좋은 생각들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항상 제게 힘든 존재였습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따뜻하게 불러보고 싶습니다. 저희들을 힘들게 하셨던 아버지를 용서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제 눈에 눈물이 흐릅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때로 큰 아픔과 실망을 가족들에게 안겨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며 아픔과 상처를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신뢰를 주시며 위로와 평강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부족한 아버지가 아니라 능력 있는 아버지이십니다.
상처를 주시는 아버지가 아니라 상처를 싸매어 낫게 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 아버지 나를 구하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늘 찬송하게 하소서.>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워지는 오늘 본문은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아버지이십니다.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째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제게 돌아올 분깃을 제게 주십시오. 재산을 요구했습니다.
여기 둘째 아들의 당돌한 요구는 아버지 편에서 보면 모욕적인 것이고 패륜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이제는 인정할 수 없다는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보호를 받는 것이 마땅한 자녀의 도리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버지의 보호가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 밑에서는 더 이상 내 생활의 성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편에서 보면 섭섭한 것을 넘어 불효막심한 자식입니다.

둘째는, 아버지의 재산 상속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산을 달라는 것은 아버지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는 표현으로 받아 드릴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자식이 세상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요구를 묵묵히 받아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몫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둘째 아들은 훌쩍 집을 따나가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래도 아들이 집을 떠나지 않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살피기보다는 제 손에 들어온 아버지의 재산이 더욱 귀했던 것입니다.

훌쩍 떠나가 버린 둘째 아들의 빈자리를 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가지고 나간 재산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이 먼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가 더 마음 쓰이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먼나라에 가서 아버지의 재산으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집에서 걱정하고 계실 아버지를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에 도취되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한 번도 그 아들을 잊어 본적이 없습니다. 언제라도 찾아와 주지 않을까 먼 나라로 떠난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셨습니다.

어리석고 철부지 같은 아들은 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을 알 리가 없습니다. 당장 혀끝의 달콤함과 말초신경의 짜릿함에만 빠져있을 뿐입니다.

집을 나간 아들은 그 많던 아버지의 재산을 다 허비하고 비로서 궁핍해졌습니다.
더욱이 그 나라에 흉년이 들어 경제가 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변변한 일자리 하나 얻을 길이 없었습니다.
겨우 연명할 일자리를 찾았지만 비참하고 참담한 생활이었습니다. 주린 배를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채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얻기가 힘들었습니다.

비로서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아니 아버지를 생각한다기보다는 아버지 집의 풍성함을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집에는 머슴들도 풍족하게 사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혼자 생각합니다. 내가 아버지를 찾아 가지만 아들이라 여기시지도 않겠지? 아니 내가 무슨 면목으로 아들이라고 하랴? 품꾼의 하나로만 여겨주셔도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품꾼으로라도 살아야 한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남루한 옷과 생기를 잃은 누런 얼굴로 아버지의 집을 향해 떠났습니다.

저 언덕을 넘어서면 아버지의 집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언덕 끝에 서 계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언덕 위에 올라 매일같이 아들이 언제 돌아올까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발견했습니다. 아직 아득한 거리였지만 아버지는 아들임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컸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달려가십니다. 그 노인이 숨을 턱에 차오르는 것도 모른 채 달려가십니다. 그리고는 두 손을 넓게 벌려 남루하고 파리한 아들을 포옹했습니다.

아들의 몸은 차디차게 식어져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따뜻한 가슴으로 차디찬 아들의 몸을 감싸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잘 돌아왔다.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느냐?
아들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엽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 생각지 마시고 품꾼의 하나로 여겨주십시오. 아버지와 하늘에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잔치를 벌이라고 말합니다. 좋은 옷을 입히고 금가락지를 끼우고 새신을 신게 하라고 하십니다. 아버지는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즐거워하십니다.

아버지는 한번도 아들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돌아올 줄 믿었습니다.
아버지는 한번도 아들을 탕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아들로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탕자가 없습니다. 잃어버린 아들만 있을 뿐입니다.

눅15장은 복음 중에 복음이라고 불리워집니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 등 3가지의 비유가 계속해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유들은 모두 같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 주제는 ‘기쁨’입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기쁨,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기쁨을 통해 하나님아버지의 기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잃은 양은 찾아 주지 않으면 이리와 늑대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 생명을 살렸기에 그 기쁨은 더욱 큰 것입니다.

잃은 드라크마는 돈의 가치로서가 아니라 관계와 사랑과 약속의 가치를 가진 소중한 것입니다. 포기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찾는 기쁨은 대단한 것입니다.

잃은 아들은 탕자가 아닙니다. 아버지에게는 다만 잃은 아들일 뿐입니다. 탕자는 멸망 받아야 할 죄인이 아닙니다. 포기할 수 없는 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너그러우십니다. 모든 것을 받아주실 수 있는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다 주고도 아깝지 않은 풍성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너그러우십니다. 모든 것을 받아주시는 넉넉함이 있으십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속에 바로 여러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런 마음으로 맞아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기다리시는 마음입니다.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언덕 위에 매일같이 나가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에게 모든 사람들은 돌아와야 할 잃어버린 아들들인 것입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도 멸망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라 여기지 않으십니다. 모두가 돌아와야 할 잃어버린 아들이기에 오늘도 하나님은 언덕 위에 올라가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안아주시는 마음입니다. 허그는 깊은 포옹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깊은 포옹이 준비된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용납하고 용서하시는 넉넉한 마음입니다. 정죄하시고 거부하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깊은 포옹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품은 따뜻합니다. 모든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에 충분한 가슴이십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 얼었던 몸을 녹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가슴은 한 없이 넓은 가슴입니다. 모든 잃어버린 영혼을 다 품으시도록 준비하신 가슴입니다. 그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에서 방황하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회복을 주시는 마음입니다. 아들을 품에 안고 그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병들었던 아들의 몸과 마음이 아버지의 품에서 회복되었습니다.
회복을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회복시키십니다.
상처받은 심령을 치료하시고 회복해주십니다. 무너진 삶의 절망을 소망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품에서 우리들은 진정한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회복의 기쁨과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를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기쁨은 바로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한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잃은 아들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가을에 전도 축제를 통해서 한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면 하나님 아버지는 잃은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으로 즐거워하시며 천국잔치를 벌이시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꼭 전도하여 하나님아버지의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는 저와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사람만 전도하자. 딱 한 사람만 전도하자
(이 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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