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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계명 제7계명 간음하지 말라 (출 20:14, 말 2: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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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저작가요, 사업가 중에 혼다 켄 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이 쓴 책 가운데 <부자가 되려면 부자에게 점심을 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일본에서 연간 세금 1000만엔 이상의 세금 납부자 1만 2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보내고, 그중 약 1천명을 자신이 직접 인터뷰하면서 부자의 가치세계 혹은 부자의 의식 세계를 연구하여 발표하였습니다.
그는 이 연구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들과 비교가 되는 부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 2천명을 다시 인터뷰하면서 부자와 평범한 사람들의 의식적인 차이가 무엇인가를 비교 분석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 책에서 저에게 관심을 끈 것은 그 부자들의 가정생활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에서의 일반적인 부자, 특별히 재벌 2세들 가운데는 좀 도덕이지 못한 삶을 많이 연상하게 되는데, 이분이 조사한 것에 의하면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의 부자들의 대부분은 오히려 가정생활이 건강했다는 사실입니다.
인터뷰 한 사람들 가운데 약 37%-40%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가정생활이다라고 대답할 정도로 가정의 가치관을 중시하고 있었고, 그들 가운데 이혼자는 불과 2%미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가정생활을 중시한 것은 가정이 그들의 삶에 활력을 더하고 인생의 성공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던 것이 그가 통계적으로 수치를 들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통계가 일본뿐만 아니라 다른 선진국에서도 매우 같은 통계로 나타나 있다고 서술하면서 건강한 부부관계는 바로 인생성공의 기초이며, 행복의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본문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결혼이란 한 남자와 한 여인이 하나님을 사이에 두고 하나님 앞에서 서약(언약, 맹약)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말 2:14). 맹약은 맹세하고 언약하는 것이다 고 말했습니다. 
잠언 기자는 간음이라는 범죄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언약을 망각하고 깨트리는 범죄라고 가르칩니다.
잠언 2:17절에 보시면 <그는 소시의 짝을 버리며 그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며 가정을 깨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결과다>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또한 간음으로 초래되는 이혼이나 학대를 하나님이 심지어 미워하신다(말 2:16)고 가르칩니다.
간음이라는 것은 일체의 성적인 범죄에 광범하게 사용될 수 있는 단어이지만 특히 기혼자의 성적 일탈을 의미하는 단어로 대부분 사용됩니다.

구약 성경에는 다른 어떤 범죄보다도 이 간음의 범죄에 대하여 엄중한 형벌이 시행되었습니다. 많은 경우 아니 대부분의 경우 사형으로 다스려 졌습니다.
신명기 22:2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너무 끔찍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가 구약시대가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천만다행한 일입니까? 이 계명이 만일 오늘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된다면 바로 이 간음의 죄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형수들이 줄지어 날마다 사형대로 끌려가는 사형수들이 줄을 있지 않겠습니까?
옆에 사람 처다 보시면서 <혹시 사형수가 아니십니까?> 이렇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절대 옆을 처다 보지 못한 사람들이 수상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렇게 이 간음을 이렇게 심각한 범죄로 다루셨을까요? 그 이유는 이 범죄는 자신을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사회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간음으로 깨어지는 가정들이 문자그대로 속출하는 급증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십계명 중 이 7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잘 지켜서 우리의 가정을 보호할 수 있을까요?

1. 첫째 부부는 하나님 앞에서의 언약을 기억해고 지켜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언약을 기억하고 지킬 때에 가정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결혼은 언약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인 결혼, 혹은 기독교적 결혼의 독특성은 결혼이 단순히 한 남자와 한 여인 사이의 언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결혼을 정의할 때에 결혼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이에 두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한 남자와 한 여인의 약속이라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약속이란 하나님 앞에서 약속이란 말입니다.

말라기 2:14절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 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부터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여기 <여호와께서 증인되신다>는 표현을 주목해 보십시오.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의 언약(서약)인데, 성경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의 결혼은 하나님이 증인이 되셨다고 이렇게 말씀입니다.
기독교적 철학으로 볼 때 결혼식에 증인으로 참여한 모든 하객들은 그냥 하객이 아닙니다. 부부의 결혼 서약에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참석한 하객들은 아마 참석하고 나서 조금만 시간이 지나가면 아마도 방금 참석했던 결혼식에서 이부부들이 주례 앞에 어떤 언약을 했는지 그 약속은 다 잊어버릴 것입니다. 아마 결혼 당사자들도 세월이 흘러가면 내가 그대 주례 앞에서 도대체 무슨 서약을 했지 그 의식조차 심히해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인들이 잊어도 하객들이 잊어도 그러나 이 부부가 하나님 앞에서 서약했던 그 약속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고 있는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결혼의 제도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시고 그들을 결혼의 자리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은 이 언약을 잊지 않고 약속을 지키는가를 주목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이 약속을 잊지 말고 꼭 지켜야 합니다.

그 날, 여러분의 결혼식에서 여러분은 어떤 약속을 하셨습니까? 전통적으로 가장 오랜 기독교적 결혼 예식에서의 결혼 서약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주례하는 분들이 서약문을 사용하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많은 분들이 이 서약을 했을 것입니다. 들어보십시요.
<당신은 당신 곁에서 있는 여인(남자)을 혹은 당신 곁에 서있는 여자를 그대의 아내로 삼아, 그리고 남편으로 삼아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건강하든지 병들든지, 순경에 처하든 역경에 처하든지 변함 없이 사랑하며 부부로서의 일정한 대의와 정절을 굳게 지킬 것을 확실히 서약하십니까?>
그때 우리는 분명히 <예>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은 과연 그 약속을 지켜 오셨습니까? 그렇지 못하셨다구요?
그렇다면 당신은 간음하신 것입니다. 간음은 오늘날 더 이상 구약시대처럼 사형으로 다스려지는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간음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배우자와의 약속! 한 걸음 다 나아가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트린 매우 심각한 범죄입니다.
1:1의 부부관계를 통한 경건한 가정이 되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경륜이요,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기대이셨습니다.

말라기 2:15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다시 한번 읽으시겠습니다.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여러분 반복되는 단어가 뭐예요? <하나>라는 단어입니다. 주께서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우리가 결혼의 언약의 대상으로서 여러 아내대리고, 여러 남편대리고 살도록 하지 않고 하나를 결혼의 언약의 대상으로 지으시고 섭리하신 이유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간음의 범죄는 부부의 하나 됨의 관계를 깨트린 것입니다. 간음은 물론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를 원하신다면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며 들려 주셨던 주님의 당부가 지금 내 삶 속에서 실천되고 그리고 달라진 삶의 회복되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어떻게 간음한 여인에 대해서 용서를 선언하셨습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우리가 죄를 회개한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그 죄를 은밀히 계속되고 있다면 당신은 결코 용서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기를 원하신다면 주님과 그리고 배우자에게 죄를 자백하고 죄를 끊고 이제 이후로는 나를 넘어뜨린 그 죄로부터 온전히 떠나셔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가정을 지킬 수 있는 성경적 원칙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가정을 지켜나갈 수가 있습니까? 첫째로 하나님 앞에서의 그 날의 언약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2. 둘째로 부부는 시험받을 수 있는 기회들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7계명을 지키고 가정을 지키는 두 번째 원칙은 시험받을 수 있는 기회들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적 유혹에서의 경계를 가르치는 상황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단어하나를 사용합니다. <피하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일관성 있게 사용합니다. <피하라>
<음행을 피하라>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 피하라고 성경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아마도 이런 말씀을 가장 잘 지킨 가장 모범적인 성경의 케이스, 사례가 있다면 요셉일 것입니다. 성경 창세기를 보면 요셉을 고용했던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줄기차게 유혹하는 그런 상황에서 요셉의 태도를 창세기 39:10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도 아니할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여기 보면 날마다 청하였으니, 이 여자가 정상이 아니지요? 환장한 여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대처하는 요셉의 모습을 성경이 기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중요한 단어가 뭐냐하면 <함께 있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함께 있지도 아니했다>. 피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회를 만들지 안 했다는 것입니다.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중요한 행동! 사실 무엇입니까? 함께 있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기회를 만들지 마셔야 합니다.

그러나 이 보디발 아내는 포기하지 아니하고 집요한 유혹을 계속하자 마침내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성경에 보면 요셉이 옷을 버려 두고 <도망했다>고 기록합니다. 36개 줄행랑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도망이 최선의 비법인 것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도망을 배우셔야 합니다.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잘 도망 다니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매우 불건강하게 우리의 성적 욕망을 자극할 수 있는 기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저는 우리 시대보다 우리 자녀들이 살아갈 때가 훨씬더 걱정입니다. 얼마나 유혹이 많은 시대인지, 인터넷 포르노(우리 시대는 기껏해야 극장가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인터넷 클릭 한번만 하면 포로노가 쏟아져 나옵니다. 인터넷 포로노,
불건강한 채팅(얼마나 가정들이 무너지고 있어요),
케이블 TV의 부도덕한 영화들,
그리고 심지어는 이-메일의 쏟아져 들어오는 이런 선정적인 광고들,
핸드폰의 유혹성 광고들(어저께도 보니까 내 핸드폰에 문자로 오빠 불타고 있어요),
비정상적인 남자들의 술자리, 사교춤의 기회들! 이런 기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기회를 피해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합니다. 모든 것들을 조심하고 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합니다.

잠언기자의 경고를 들어보십시오. 잠언 6:27-28절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얼마나 성경이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경고를 해주고 있습니까? 불을 품고 어떻게 대지 않겠느냐? 피하란 말입니다.

제가 어떤 우리 교회 성도의 가정에 가보니까 방을 들어다 보니까 방에는 컴퓨터가 하나도 없어요 다 컴퓨터가 세대인데 응접실에 다 컴퓨터가 나와 있어요. <왜 그렇게 했느냐?>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되도록 유혹의 기회를 주지 아니하려고 가족식구들이 합의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칭찬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지혜를 그렇게 신경 써서 자식들을 기르고 또 가족들이 나가는 모습이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재미 동포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부부를 목사님께 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부부가 자식문제였습니다. 상담 내용의 뭐냐면 자기 아들과 딸이 남매가 성교를 합니다. 성적으로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도와주세요
그래서 아이들 남매를 만났습니다. 중학생입니다. 잘 달래가면서 이야기를 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유혹을 처음에 받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러니까 아빠 엄마가 보던 성에 대한 비디오가 있는데 그 비디오를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청 하다가 우발적으로 남매가 성을 실험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누구 책임입니까?
부모책임 아닙니까? 피해야 합니다. 기회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기회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할 수 있는 한 피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저와 여러분에게 어떻게 가르칩니까?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않지도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의 유혹에 관한 한 저는 한 순간도 틈새를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방심하지 마십시오. 기회를 제공해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우리가 가정을 지켜 나갈 수가 있습니까? 시험의 기회를 스스로 피해야 합니다. 가정을 거룩하게 지켜 나가는 비밀!

3. 셋째로 부부의 사랑을 성실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부부의 사랑을 부부의 로멘스를 잘 관리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유혹의 기회를 피해야 한다든지, 간음의 죄를 경계하라는 말을 들으면서 어떤 분은! 그러면 부부도 성적으로 접근을 피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는 오해를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부부가 성적인 만족을 깊이 경험할수록 외도의 유혹에서 그 가정을 지켜낼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고린도전서 7:2-3절을 읽어보시오.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결혼의 실패중의 이유중의 하나가 음행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편과 아내가 의무를 다하라.
여기서 의무란 단어가 강조되었습니다. 어떤 의무일까요? 말할 것도 없이 성적인 의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 부부들에게 서로에 대한 성적인 의무를 다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계시는 아내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당신의 남편은 이 세상에서 당신을 통해서 그런 성적인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하게 합법적인 대상이십니다. 만약 당신의 남편이 당신에게서 성적인 만족을 누리지 못할 경우에 그가 시선을 밖으로 돌리기 시작해서 남편의 외도가 시작된다면 아내는 책임이 없다고 말한 수 있겠습니까?

입장을 바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여기 계신 남편 여러분은 당신의 아내의 여러분들의 성적인 필요를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하게 합법적인 대상이십니다. 만일 당신의 아내가 당신을 통해서 그런 사랑과 성의 욕구를 공급받지 못했을 때에, 당신의 아내가 시선을 밖으로 돌리기 시작한다면 남편은 과연 아내의 외도에 대해서 남편의 책임이 없다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래서 부부의 적극적인 사랑의 즐거움 혹은 그 사랑의 누림을 놀라울 정도로 대담하게 성경은 강조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잠언 5:15-16절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면서 읽으시겠습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옆에 분들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다른데서 물 마시려고 그러지 말고,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라 그랬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 처다 보시면서 <우물관리 잘하십시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도랑물이 집밖으로 흘러 나가는 것을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유모스럽게 진리에 대한 정곡을 묘사하고 있습니까? 

계속되는 잠언 5:17절의 경고를 읽어보세요. <그 물이 네게만 있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아주 분명한 선언입니다.
여러분! 부부의 성은 부부 외에는 아무와 그 누구와도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천지 개벽이 되어도, 시대가 얼마든지 바뀌어도, 그 풍조와 조류가 바뀌어도 부부의 성의 교환이나 스화핑 같은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같은 부부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이런 소극적인 경고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잠언 5:18-19절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부부의 로멘스의 관리가 필요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었을 때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연모하라> 아멘.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그랬습니다. 그리고 <내를 즐거워하라>엔조이하라 성경은 부부의 삶의 테두리 안에서 성을 즐거워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적극적인 부부의 로맨스의 관리를 요청하는 말해학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수년 전 타임지에서 미국에서 가장 성적인 만족도가 높은 집단이 무엇인가를 조사해서 발표했습니다. 조사한 사람들이 깜작 놀랐답니다. 어떤 결과가 나왔냐면? 복음주의적 교회에 나가는 그런 부부집단이 성적인 만족도가 제일 높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걸 보고 미국사회가 의외라는 반응으로 놀랐다는 것입니다. 저는 <놀랬다는 것을 보고 놀랬습니다>. 왜 놀라나 그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당연한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부부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통계적인 실증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부부의 로맨스를 결코 성으로만 국한시키지 마십시오. 부부는 따뜻한 사랑의 대화 그 말 몇 마디로도 얼마든지 충분히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어느 경상도 사나이가 첫날밤에 자기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자기야 나는 <I LOVE YOU> 이런 것은 간지러워서 잘 말못하겠다 그런데 내가 첫날밤이니까 오늘밤 한마디하면 평생 유효한 거다, 니 알겠나!>,
그러면서 자기 신부를 째려보면서 <1 love you 이제 됐다> 했답니다.
그때 지혜로운 신부가 이렇게 말을 받아서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보, 내가 사실은 자기에게 고백하지 않은 병이 좀 있는데요>, <뭐 무슨 병이야!>
<저는 무슨 말을 들으면 곧 잊어버려요 중요한 말일수록 잘 잊어버려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매일매일 반복해서 말해 주셔야 저는 그것을 기억한답니다>.
그렇습니다. 부부의 로맨스는 날마다 성실하게 관리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식사가 필요한 것처럼 사랑의 연료도 날마다 공급되어야 합니다.

여러 해전 어떤 책을 읽다가 이런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크리스천 남편인데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자기 아내에게 전화해서 <1 love you> 이렇게 고백을 하는데 뭐 출장가도 하고 해외에 나가도 끈임 없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남편이 해외 출장을 갔습니다. 그 때는 핸드폰이 없는 시절이어서 국제 공중전화를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중간에 동전이 떨어지더랍니다. 그래서 황급하게 <여보, 1(아-)하는데 전화가 끊어지더랍니다. 너무 안타까워서 <주님 안타깝습니다. 아내에게 1 love you 못했어요, 주님이 전해 주셔요>했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답니다.
전화는 끊어졌는데 바로 잠시 후 집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벨이 울리더랍니다. 그래서 부인은 생각하기를 남편이 동전을 바로 구하여 다시 전화했나 보다 해서 전화를 받았더니 그런데 자기 남편이 아닙니다. 여자목소리입니다. 국제 전화 교환수였다고 합니다.
조금 전에 댁의 남편께서 전화하다가 동전이 떨어져 갔고 마지막 할말을 못하신 것 같습니다. 1 love you를 못하시고 1 love you 이거 해야되는데 <주님 전해주세요> 그러시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크리스천이거든요 그래서 전해드릴려고 제가 전화했어요>.

이 이야기는 짤막한 에피소드고 우연이지만 이것이 이 부부를 얼마나 행복하게 했는지 이렇게 적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너무 감동을 받고 주님은 내 사랑의 언어까지 전달하신다> 내 사랑하는 아내에게 내가 그냥 지나간 말처럼 어쩌니 주님 전해주세요 그 말까지도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잔해주신 그 주님! 그 주님을 의뢰할 때 우리부부가 행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그런 간증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신뢰하는 주님이 바로 그런 주님이라면 그 주님이 우리 부부사이에 중보 하지 못할 어떤 문제가 있겠습니까? 치료하지 못할 어떤 상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그리고 부부가 함께 우리가정의 주인 되시는 그분을 다시 한번 바라볼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분 앞에 서서 그의 말씀을 붙들고 살기로 결심한다면, 그리고 좀 우리 가정의 그동안 어떤 상처가 있어서도 그 말씀 붙들고 다시 주 앞에 서기로 결단하고 주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주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듣지 못할 어떤 기도가 있겠습니까? 주님이 도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참으로 건강한 가정, 그리고 웰빙 가정의 행복을 사모하십니까? 그러면 무엇보다 결혼의 언약을 지키는 가정이 되십시오. (유 흥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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