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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계명 제6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출 20:13, 창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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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충격적인 시 한편을 소개하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할까 합니다.
김성한이란 분이 낙태를 주제로 쓴 시입니다. 낙태 아이 심정으로 기록한 시입니다.
제목은 <저도 사람이에요>라는 시입니다. 들어보세요.

<어렴풋이 아침잠에서 깨어났을 때였어요. 알 수 있었죠. 기분이 아주 나빴거든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불안감이라고 할까요? 날 둘러싸고 있는 평안함은 이미 없었어요.
공포 영화 본적 있죠? 죽은 줄 알았던 괴물이 마지막에는 꼭 나타나 주인공을 괴롭히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어요
난 피 할 수도 도망할 수도 없었어요. 이건 아니에요. 살려 주세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그저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발버둥칠 뿐 비명도 지를 수 없었어요
입으론 양수가 쏟아져 들어 왔어요. 숨은 가빠지고 터질 것 같은 고통이 가득차 올라왔지만 아무도 내 곁엔 없었어요.
사랑해!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도, 날 지켜줄 줄 알았던 그녀도, 어디 계셨죠?
집게의 날카로운 이빨이 내 다리를 아, 내 작은 발을 잡아 찢고 있을 때, 조각난 내 몸이 양수 속을 둥둥 떠다니며 펌프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어디 계신 거죠?...좋아요, 내가 죽어야 당신들의 세상 당신이 안전할 수 있다면 날 죽이 세요. 세상은 늘 죽어 줘야 할 누군가를 원했으니까요. 예루살렘 베이징, 캄보디아, 아우슈비츠 그리고 자궁, 그래요 이젠 어머니 뱃속에서 사라져 가요. 당신들의 천국, 당신들만의 세상을 뒤로하고...난 베비라 유아복 입어 볼 수 없는 거죠?>

오늘날 생명이 가장 위협받고 있는 곳은 아이로니칼 하게도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어머니의 자궁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일년에 약 5천5백만 내지 7천만의 아기가 낙태되고 있는 것으로 통계가 나오고 있습니다.
인구 2억 4천만을 가진 미국의 경우에는 일년에 약 150만에서-160만 건의 낙태가 보고되고 있는데,
불과 인구 4천 백만의 한국의 경우 일년 낙태 인구가 미국과 맘먹는 150만 명으로 낙태의 숫자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구 비율로 미국과 비교해 볼 때 미국보다도 5배나 더 많은 숫자가 낙태가 이 땅에서 시행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수치는 한국의 낙태 상황이 세계와 비교할 때에 전 세계의 1-2위에 해당될 것이라는 보고가 나와 있습니다.

설문 조사에 의하면 이 땅 기혼 여성들의 경우 53%가 낙태의 경험을 갖고 있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미혼 여성 약 30%가 낙태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생명을 존중의 사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낙태는 넓게 보면 살인의 한 유형에 속할 따름입니다. 자살도 살인입니다. 안락사도 성경적으로 보면 살인입니다. 
심지어 성경을 보면 미움도, 폭력도 살인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살인의 범죄가 무서운 줄 모르고 증가하는 오늘의 시대를 향해 십계명 중의 제 6계명은 여전히 <살인하지 말지니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이 계명이 순종되어지고, 그리고 생명이 존중되어지는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사회가 되어지기 위해 우리는 매우 근본적인 세 가지 질문을 오늘 이 시간에 던지고자 합니다.

1. 첫째 질문! 왜 살인이 심각한 죄인가 라는 것입니다.

왜 살인이 심각한 죄일까요? 성경이 살인을 심각한 죄로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창세기 9:6절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자기도 피를 흘려야 마땅하다. 그리고 이 살인이 이렇게 심각한 죄로 다루어지는 이유를 성경의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모든 다른 종류의 피조물, 다른 모든 동물이나 생물과 차별화 되는 가장 유익한 독특한 특성이 있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성,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히 인간을 존귀히 여기시고 아주 특별한 존재로 취급하시며 아끼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 속에는 종종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단순히 인간을 기능적인 이유로 파악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존재하는 의미를 기능에 의해서 귀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능을 많이 할 수 있으면, 기능이 원활하면 나는 필요한 존재이지만, 그 기능이 불가능할 때에 더 이상 나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가치관입니다. 솔직하게 반기독교적이고 그리고 반생명적인 가치관입니다.
만약 이런 가치관을 따르자면 더 이상 기능하기 어려운 장애인이나, 더 이상 거동이 어려운 병자들은 존재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또 기능이 점차 떨어지는 노인들, 또 어린이나 여성들은 덜 중요한 인간으로 취급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적 기독교는 이런 생각을 철저하게 반 성경적이고 반기독교적이고 반 숙명적인 가치관으로 규정하고 대적해 왔습니다.
사람이 사람된 가치! 인간의 인간 된 가치는 기능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얼마나 탁월한 일을 할 수가 있는가, 성경은 기능 여부를 떠나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면 모든 인간은 존중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인은 바로 이런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인간을 파괴하는 심각한 범죄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신약에서 야고보서 3:8-9절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혀)으로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이 대목은 인간의 혀를 사용하는 언어 생활을 조심할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혀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혀는 축복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동일한 혀로 사람을 저주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혀로 저주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야고보는 강조합니다.

종종 살인은 인간의 혀, 즉 언어를 통해 시도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혀로 우리의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말로 우리의 이웃들을 상처 낼 수가 있습니다. 상처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말로 우리의 이웃을 죽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쏟아내는 우리의 냉소적인 언어를 통해서 서서히 우리의 이웃들은 죽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언어로 사람들을 죽일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때 우리의 혀는 살인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인간 됨의 가치를 규정하면서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들은 누구이든지, 좋아하는 사람이든 실어하는 사람이든, 나에게 이익을 가져오는 사람이든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든 그러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살인이나 언어 폭력을 포함한 일체의 살인적인 폭력은 바로 하나님의 고귀한 숨결이 들어있는 인간이라는 작품을 손상시키는 파괴적인 범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살인은 경고되어져야 하고, 피해져야 하며, 만약 살인의 죄를 범했을 경우 이것은 심각하게 다루어져할 범죄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중요한 질문! <왜 살인이 심각한 죄인가>를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작품을 손상시키는 파괴적인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왜 살인이 심각한 죄인가? 이제 두 번째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2. 둘째 질문! 어떻게 살인의 죄를 짓게 되는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향해 폭력이나 신체적인 살인을 행할 경우에 반드시 보편적으로 거치는 정서적인 과정이 있습니다. 감정적인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분노의 과정입니다. 사람들은 그냥 살인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의 길을 거쳐 살인에 막다른 지점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인의 역동성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역학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인 창세기 4장에는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본문에도 거듭적으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하나있습니다. 무슨 단어일까요? <분노>라는 단어입니다.

창세기 4:5절을 보십시오 <가인과 그의 재물은 받지 아니하신 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우리가 분노를 갖게되면 안색이 변하지요.
가인이 분했고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누군가가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됨이냐>
하나님은 우리가 인상쓰는 것까지 다 보고 계십니다. 가인이 분노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쩐 일이냐?>

성경은 명백하게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죽인 과정적인 원인이 바로 분노였음을 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음 절 7절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낮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목해 보세요 <죄가 너를 뭐예요? 원하고 있다. 죄가 너를 원한다>. 우리의 책임이 있어요. 그 죄를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여러분! 여기 성경은 결코 분노 그 자체를 죄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분노가 죄가 되지 않도록 죄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을 우리가 다스려야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누누이 계속해서 여러분을 통해서 분노하는 그 자체를 정죄 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분노를 낼 수 없다면 사람이랄 수 있습니까? 성경은 분노와 범죄를 민감하게 구별합니다.

에베소서 5:26절  말씀을 보십시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분을 내어도 뭐요? 죄를 짓지 마라. 그러니까 분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분노가 죄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분노가 죄가 되지 않도록 분노를 빨리 풀어야 합니다. 언제까지요? <해가 질 때까지 분노을 품지 말라>. 빨리 분노를 해결할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분노! 그 자체는 결코 죄가 아니지만 적절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면 분노는 반드시 죄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분노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또 분노를 억제만 하는 것이 저는 유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또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분노는 억제할 때 그것이 더 커다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옛날 우리 한국의 조상들은 <화병>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왔습니다. 저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지혜로운 진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분노를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그것을 억제하게 되면 우리 속에서 그것이 병이 됩니다. 화병이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시면 분노 그 자체를 정죄 하지도 않고, 또 분노를 분노로서 인지할 필요가 있다라고 오히려 가르칩니다. 
<내가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속일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그 감정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적절하게 건설적으로 창조적으로 이런 분노하는 감정을 형제 자매들에게 표현하는 것을 우리가 배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나는 지금 화가 나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잘못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셔야 합니다.
<내가 지금 너무 힘든 상태에 있어요>라고 말하십시오
이런 표현 그 자체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직한 감정의 교류를 통해서 문제는 해결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정을 표현할 때에 그것이 파괴적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것이 공격적인 반응이 되지 않도록 감정을 창조적으로 건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아이 메시지(1-message)라고 합니다. 아이 메시지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충고합니다. 아이 메시지라는 것은 내가 혹은 나는 이런 주어를 사용해서 나의 느낌을 표현하는 방식을 가르쳐서 아이 메시지라고 말합니다.
<제가 힘들어하고 있어요. 저는 굉장히 상처를 받았어요. 제가 정말 마음 속에 힘든 과정을 겪고 있어요> 이런 표현을 아이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아이 메시지의 반대는 유(you) 메시지입니다.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되면 벌써 파괴적으로 싸움이 될 수가 있습니다. 공격적인 반응입니다.
그것은 공격이나 복수의 의도적으로 잘못된 모습으로 발전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 메시지를 사용해서 자기 감정을 진솔하게 토로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단은 내 감정의 솔직한 전달에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다음 단계의 인도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십니까?
하나님은 내 감정을 아시는 분, 내 상한 감정을 아시는 분, 나를 치료할 수 있는 분, 그리고 내 억울함을 이해하시는 분, 공의로우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의 하나님이라면 내 상한 감정을 끌어안고 그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 상한 감정을 주님 앞에 펼쳐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너무 속상했어요. 제가 너무 속상했어요>

여러분 시편 기자는 <네 마음을 내게 토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정직하게 자기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 마음을 우리 이웃들에게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내 마음을 전달할 기회를 가지셨다면 이제는 숨 한번 크게 쉬고 잠잠히 상대의 반응을 기다려 보십시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런 내 상한 감정들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주님 앞에 쏟아 놓으세요.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잠시 큰 호흡을 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려 보십시오. 주님이 내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여유가 있다면 이런 기도의 시간이 있다면 우리는 살인의 영성에 미혹된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가인이 아우 아벨을 살해하기 이전에 이런 감정 표현의 여유나 혹은 기도의 기회를 있었다는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합니다.
가인은 분노함으로 살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인은 분노를 다스리는 일에, 그리고 분노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일에 실패함으로 살인의 범죄에 도달한 것입니다.
제가 다시 강조하겠습니다. 어떻게 살인죄를 범하게 되는가 중요한 것입니다. 가인은 <분노함으로 살인한 것이 아니라, 분노를 다스리는 일, 혹은 분노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일이 실패함으로서 살인의 범죄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세 번째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자합니다.

3. 셋째 질문! 무엇으로 우리는 살인을 예방할 수 있는가?

성경은 살인이나 살인의 원인을 만드는 미움이나 분노를 다룰 때마다 중요한 두 가지의 열쇠를 가르칩니다.
여러분 두 개의 열쇠! 그 열시만 가지고 있으면 평생 살인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주 중요한 두 개의 열쇠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살인이 만연하는 사회, 우리가 그 살인의 유혹을 극복하고 살인을 예방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일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일생을 붙잡고 살아야할 두 개의 열쇠가 있습니다. 이 열쇠만 가지면 수지 맞습니다.

첫 번째 열쇠가 뭐요? 첫 번째 열쇠는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으로 내 이웃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열쇠는 하나님의 지배입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살인의 유혹을 극복하고 살인을 예방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일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일생을 붙잡고 살아야할 열쇠가 있습니다

1) 첫째 열쇠는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웃들을 사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인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 안에 있는 태아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 생명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까요? 하나님이 그 태아를 소중히 여기신다면 우리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합당한 관점이 아니겠습니까? 

태아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에 때로 어떤 사람에 내게 힘든 대상으로 등장할 때, 그 대상은 때로는 우리의 가족일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마누라가 원수같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남편이 원수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자식이 원수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안 그러신가요 여러분은! 예
그때 그냥 저 원수하고 보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은 저 사람을 어떻게 보실까? 나는 원수처럼 보여지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 하나님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제 안의 분노를 다루는 비책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저도 목사, 목회자이지만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이따금씩 성질이 날 때가 있습니다.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화가 날 때에 마누라가 원수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마누라만 원수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교인여러분도 제 눈에는 원수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아이구, 저 원수>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문제 때문에 마음에 부담이 있었어요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다가 야고보서 3장에서 중요한 힌트를 얻었습니다. 그 이후로 제 삶 속에서 이것을 적용해서 얼마나 많은 유익을 얻었는지 몰라요. 저의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비책을 전수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원수처럼 느껴질 때에 <저 원수>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오늘 야고보가 어떻게 가르쳤어요? 아무리 저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입히고, 나에게 손해를 입히는 그런 상대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날부터 이렇게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를 힘들게 만들면 저는 입으로 예기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저, 인간도 하나님이 지으셨다>. 저 인간도 하나님이 지으셨다. 그리고 지극히 처다 보면 생각이 달라져요.
<하나님이 지으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나에게 힘든 대상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셨다.
이것은 연습을 하셔야 되가든요. 옆에 사람 처다 보시고 절대로 말할 필요는 없어요 속으로만 하는 거입니다. <저 인간도 하나님이 지으셨다>. 그리고 한번 처다 보시기 바랍니다. 옆에 사람 지극히 처다 보시기 바랍니다.
시작 한번 처다 봐요! 그리고 <저분도 하나님이 지으셨다>. 잠깐 처다 보세요. 하나님이 지으셨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다르게 보이더라구요,

때로는 그 작품이 하나님의 오리지널 작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마귀가 와서 많이 흔들어 놓았어요. 사탄이! 그래도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상처난 인간이지만 사람을 아끼십니다. 그리고 그가 회복되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가 나와 이해 관계를 떠나서 상처받음에 상처를 주고받음을 떠나서 여전히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그 열쇠를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 이웃들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2) 두 번째 인간 존중을 실현하는 열쇠는 하나님의 지배입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창세기 4장을 통해서 인류 최초에 한 사건 가인의 살인 사건을 함께 보았습니다.
왜 가인은 살인의 범죄를 저질렀을까? 분노이기 때문에, 분노라는 것은 과정적 원인에 불과합니다.
정말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창세기 4장을 가지고서는 근본적인 원인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도대체 왜 분노했을까? 여기에 아직도 물음표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뜻밖에 우리는 그 비밀을 가인이 자기 동생을 살인한 근본적 원인을 신약 성경에서 발견합니다. 그 해답이 요한일서 3:12절에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누구에게 속하여 그랬습니까? <악한 자에 속하여> 가인은 아우를 죽였다
그 악한 자가 누구입니까? 사단 마귀가 아닙니까?
여러분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에 제 정신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조종을 당한 것입니다. 가인이 살인할 때 그는 마귀의 지배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요한 8:44절에서 마귀라는 존재를 정리하면서 <저는 처음부터 살인 한자요>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자요, 그리고 거짓말쟁이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이 이 사탄에 대해서 별명을 붙입니다. <그는 도적이다>. 사탄은 도둑입니다. 마귀는 생명을 빼앗는 훔칩니다. 도적질하는 자, 빼앗는 자요, 생명의 파괴하는 파괴자란 것입니다. 모든 미움과 분노와 살인의 영성개념에는 산탄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백성들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못하면 순간적으로 사단의 지배와 조정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도 살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26절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빨리 이 분노를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그 다음절을 주목해 보셔야 합니다. 그 다음절이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4:27절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짖지 말라. 그 다음절에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마귀의 지배를 거절하고 살인의 영성에서 벗어나 인간을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일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매 순간 순간 하나님의 지배를 받을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성령의 지배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4:30절에서 이 분노의 문제를 다루면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기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그 다음절에서 무슨 글이 적혀 있어요.
31-32절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가 분노하고 미워하기 시작할 때에 그리고 서서히 사단의 그 공작 아래 내가 조종당하는 모습을 보기 시작하면서 성령이 내 안에서 탄식하기 시작합니다. 성령의 근심!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어디가지 가지고 가느냐하면 에베소서 5:18절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가르칩니다.

술에 치하면 술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에 층만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나타나는 놀라운 현상들이 있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사람이 사랑스러워집니다. 성령충만하면 사람을 용서하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성령충만하면 사람이 소중하게 보입니다. 고귀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충만하지 못하면 사탄이 충만하면, 마귀의 지배를 받으면 마누라도 어떻게 보인다고 그랬어요? 원수처럼 보인다고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성령에 충만하지 못하면 마누라도 원수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마누라만 원수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교우여러분도 원수처럼 보일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기도하고 다시 성령충만을 구했을 때에 성령이 내게 임하시고 성령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변합니다. 감사하게 됩니다. 마누라가 갑자기 천사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교우 여러분들이 원수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교우여러분들이 성도처럼 보입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마누라가 문제가 아닙니다. 교우 여러분들이 문제가 아니라, 제 자신이 문제인 것입니다. 내가 문제입니다.
내가 성령이 충만하면, 내가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면 내가 주의 성령으로 충만하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열쇠! 살인의 미혹을 극복하는 두 가지 열쇠! 첫째 열쇠가 뭐라고 했어요?

①첫째 열쇠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내 이웃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생으로 이웃들을 가족들을 바라보십시오.
②둘째 열쇠는 하나님의 지배, 성령의 지배,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셔야 합니다. 
내가 성령에 충만하고 성령이 나를 지배하시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은 내가 두 팔을 펼치고 내가 껴 앉고 사랑해야할 사람들로 가득차 있는 모습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매 순간 순간 하나님의 지배, 성령의 지배를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이 세상은 당신이 두 팔을 벌려 사랑으로 껴안을 사람들로 꽉 차 있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저는 어떤 책에서 은영이 엄마라는 분의 간증을 읽다가 저에게 잔잔한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 자매가 예수 모르고 안 믿었을 때, 주님 모르고 살 때 자기 자식을 키우면서 자식들이 속 썩일 때는 늘 이런 말을 되풀이했다고 합니다. 자식이 속을 썩일 때마다 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너를 <꼭 너 닮은 자식 하나 낳아서 속 좀 썩어 보라>고 했답니다.
여러분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우리에게도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시침 탁 띠지 마시고 한번, 그렇다면 한번 고개를 끄떡해 보세요 좀. 그런 일이 있었으면 솔직해야지요, 솔직해야지요. 

그런데 이 자매가 예수 믿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성령충만했습니다. 성령충만하고 나서는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 딸 은영이를 바라볼 때마다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고 그럽니다. <은영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너도 꼭 너 닮은 자식 하나 낳아 기도로 자식 키우는 행복을 마음껏 맛보고 살려무나>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어떤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유 흥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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