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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이 당신들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렘 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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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의 성전 설교(7:1-15)를 중심으로-

[본 글은 류호준의 저서『옛적 말씀에 닻을 내리고』257-269쪽에서 발췌한 글이다]

하루는 예레미야가 야웨의 집 문 앞에 섰습니다(7:2). 성전 뜰이었던 것 같습니다(26:2). 성전 문을 통과하면 먼저 성전 바깥뜰이 나오고 다시 계단을 올라 좀더 들어가면 성전 안뜰이 나오게 됩니다. 안뜰은 바깥들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윗 뜰이라고도 불렸습니다(렘 36:10). 바로 이곳에 서게 되면 아래로 있는 바깥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성전에서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설교하기에 매우 좋은 위치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뜰들에 관해 다른 선지자들도 여러 차례 언급한 일이 있었습니다(사 1:12; 겔 11:1).

예루살렘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온 유다의 거주민들을 부르는 것으로 봐서 (2절) 예레미야는 아마 특별한 종교절기를 택하여 설교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드는 특별한 날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특별한 절기가 어느 때인지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렘 26:1에서 여호야김의 등극 원년(609 B.C.)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학자는 여호야김의 왕위 즉위식 때가 아닌가 생각하며, 다른 학자들은 가장 중요한 가을 축제일로 전국적인 순례행렬이 이어지는 초막절로 추정하기도 하고(슥 14:16), 또 다른 학자들은 이 두 가지가 겹친 절기가 아닌가 추측하기도 합니다.

불안한 정국

그 당시 백성들은 두려움과 초조의 눈으로 다가오는 앞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민심은 동요하였고 사회를 흐르고 있던 기류는 미래에 대한 근심과 불안감이었습니다. 미래는 매우 어두워 보였습니다. 당시 근동의 국제 정세는 새로운 세력들의 발흥과 열강들의 패권 다툼으로 불안하였으며 특별히 팔레스타인 지역은 남과 북의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어 버린 골목길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신흥세력인 신 바벨론 제국은 위대한 지도자 느브갓네살의 영도아래 늙은 사자 앗시리아를 쉴 사이 없이 공략하였으며 이미 앗시리아의 수도는 함락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신흥 세력의 발흥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남방의 또 다른 강대국 이집트는 앗시리아를 돕기로 결정함으로써 갈대아인의 팽창을 막아보려 하였습니다. 강대국들이 패권 다툼을 하고 있던 이런 기회를 국가 갱신의 기회로 삼고 민족 독립의 기반을 확고히 할뿐만 아니라 영토 확장의 계획을 추진하였던 인물이 개혁의 왕 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이 그렇게도 믿고 의지하였던 그들의 왕, 종교개혁의 영웅 요시아는 불행하게도 이집트의 바로 느고와의 므깃도에서 전투에서 전사하게 됩니다(왕하 23:28-30). 이것은 예기치 않은 국가적 비운이었습니다. 어두운 먹구름이 유다 온 국토에 드리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요시아 왕의 갑작스러운 전사(戰死)후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으로 옹립되나 그도 즉위 삼개월 후에 결국 이집트의 바로 느고에 의해 폐위되고 또 다른 요시아의 아들인 엘리야김 (후에 여호야김으로 개명)이 왕으로 세움을 입게 됩니다. 어둡고 불안한 시대였습니다. 왕위로의 즉위는 즐거움대신 걱정을 더할 뿐이었습니다. 이집트는 이제 유다를 행하여 어떤 정책을 세우고 있을까? 갈대아인 (신 바벨론 제국)들이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처럼 불안하고 초조한 시기에 수많은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무엇이라고 설교하였을까? 그들에게 안위와 확신과 위로가 필요하였을 것이 아닌가? 아니면 다른 메시지가 있는가?

걱정들 하지 마시오!

그들의 일관된 목소리는, 그러한 불행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는가!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었던가! 그들 가운데 서 있는 이 성전이 그 보이는 증거물이 아니던가! 하나님은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가 그곳(성전)에 영원히 계시겠다고 말이다!(시 132:13). 성전이 우뚝 서있는 산, 그 시온 산은 결코 함락될 수 없는 난공 불락의 요새라고 그 분이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사 10:24, 14:32, 30:19, 31:5). 지난 세기의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는 시온의 영원함과 예루살렘의 영속성에 관해 설파하지 않았던가?

백성들은 그들 가운데 서 있는 성전을 보면서 안전함과 안위함과 미래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뿔싸! 불행하게도 그들은 어리석게 조작 당하고 있었던 민중들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라 불렸던 당시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의도적으로, 혹은 무지로 인하여 백성들에게 잘못된 안전의식과 호도된 구원관을 심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야웨의 성전, 이것이 야웨의 성전, 이것이 야웨의 성전." 대다수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소위 "야웨 성전 삼창"을 강요하였고, 이렇게 세뇌된 백성들은 강력한 안위감과 깊은 안전감을 얻고 만족하였습니다. 그들 모두는 일명 '성전 컴플랙스'(temple-complex)에 걸려 있던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의도적으로 그러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마 그렇게 하는 길만이 자기들의 대중적 인기를 지속하는 길이며, 왕궁과 관계를 맺고 있는 그들로서는 그들의 권리와 특권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국가의 불행과 멸망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왕궁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 될 것이며, 그것은 곧 자기들의 생명과 생존, 안녕과 생계유지와도 직결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호국종교의 이론가들로 자처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나오는 반사이익들은 마치 불한당들의 수입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가 호국종교화(護國 宗敎化) 되면 필연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 수많은 예들을 갖고 있습니다.

한편 백성들이 가졌던 잘못된 안전의식과 호도(糊塗)된 구원관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무지 때문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잘못된, 오해된 소위 '성전신학'(Theology of Temple)을 소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입니다. 성전이 곧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가리킨다는 잘못된 신학과, 시온의 불가침성을 선포한 이사야의 설교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해석에서 기인될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정신차리시오!

신학적 오해 혹은 무지로부터 출발했든지, 아니면 개인적 이익에 눈이 가려 진리를 왜곡하여 백성들에게 전하였든 지간에, 치명적인 결과는 백성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잘못된 안전을 성전(聖殿)에 대한 잘못된 신뢰 속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성전이 그들의 눈앞에 서 있는 한 그들은 안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이 있는 한 예루살렘 도시에는 불행이 엄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전에 대한 그들의 애착은 가히 맹목적이었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군중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이게 된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예레미야! 그는 청중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성전이 당신들을 구원한다고? 성전이 당신들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천만의 말씀이오!" 그들의 신뢰는 철저하게 잘못 기초를 둔 신뢰이라고 말입니다. 외형적인 예배행위나 제사의식, 혹은 성전에 대한 맹목적 신뢰, 광적 믿음이 백성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어떠한 상황아래서도 성전이나 예루살렘 도시 그 자체가 그 백성들을 위한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행위가 뒷받침되지 않는 종교, 윤리와 도덕이 따르지 않는 제의(祭儀), 정의와 공의가 기초가 되지 않는 예배는 자기기만이며 인권침해이며 궁극적으로는 신성모독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설교는 한마디로 삶에 대한 철저한 회개를 촉구하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문제의 대상은 단순히 종교적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종교적 영역에 머물러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유다 백성들은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종교적 영역에 제한시키어 가두어 놓고, 온갖 뇌물성 예물들을 그 분에게 바쳤습니다. 하나님의 환심을 뇌물로 살수 있다는 이 어리석은 백성들의 행태를 우리는 감히 옛날 이야기로 돌릴 수 있을 것인가요? 하나님이 그렇게도 기름진 것에 걸식이라도 들렸던 적이 있었는가요? 그들은 앞 시대의 그들의 위대한 선지자들의 비아냥대는 조롱 섞인 말씀들, 칼날 같은 외침들을 그렇게도 쉽게 잊어버렸단 말인가요?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 하라
너희는 길갈에 가서 죄를 더 행하라
매일 아침마다 너희의 희생제사를 드리라
매 삼일마다 너희의 십일조를 바치라
감사예물로 누룩 넣은 떡을 구우라
너희의 자원예물에 대해 선전하여라
너 이스라엘들아, 그것들에 관해 자랑하여라
왜냐하면 이것이 너희가 즐겨하는 일들이 아닌가!(아모스 4:4-5)

무수한 제물이라고 -
그것이 도대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너무도 많은 제물들에 배불렀다 -
수양의 번제물들과 살찐 짐승의 기름들로 말이다!
나는 즐거워하지 않는다 -
송아지, 어린양, 그리고 수염소들의 피를. (이사야 1:11)

그들은 적어도 제사의식, 종교예식의 본질과 그 의미를 잊어 버렸던 것입니다. 제사의식과 각종 종교집회의 목적은 의로우신 하나님, 거룩하신 그들의 주님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요? 그러나 그들 손에는 피가 흔근하였고, 그들 주머니에는 떳떳하지 못한 돈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그들은 정의로우신 하나님께 나올 수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양심에 화인을 맞아 영적 예민성과 도덕적 불감증에 걸린 중환자들이었던가, 아니면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사람이 마음이라던 예레미야의 탄식을 증명하기라도 하던 살아있는 증거물들이었던가? 아니 그들 눈에 비친 하나님은 뇌물과 예물과의 차이도 구별 못하는 신이었단 말인가?

문제는 그들의 터널비전(tunnel vision)에 기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과 다스림을 바라볼 수 없었던 그들의 좁은 시야 때문이었습니다.

너희가 기도 시에 손을 높이 펼 때에
내가 나의 눈을 가리울 것이며
심지어 너희가 많은 기도들을 드릴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이다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사야 1:15)

이미 지난 세기의 위대한 설교자들은 목청을 높여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 가를 알리지 않았던가요?
나는 인애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으며,
번제보다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바란다. (호세아 6:6)

사람아, 착한 것이 무엇인지 그분이 너에게 이미 보이셨도다
야웨께서 네가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었던가?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과 자비를 사랑하는 것이며
그리고 겸손히 너의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다. (미가 6:8)

그러나 언약공동체로서 유대백성들과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은 어찌 보면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들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자들처럼 행동하였습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화산과도 같았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더냐?" 살인, 강도, 착취 등과 같은 불의한 일들을 백주에 자행하고서도,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와서는 "우리가 안전하다"라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요, 조롱이며, 경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난처를 찾았다" "우리가 숨김을 받았다"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문구인 "우리가 안전하다"는 말은 매우 역설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세상에서 당하고 사는 자들, 연약한 자들이, 아무런 법적 보호의 대상이 되지 못한 자들이 그들의 억울한 속사정을 아뢰고 신원 받는 장소가 성전이었는데, 이제는 바로 피해자들이 아닌 가해자들이 성전에 들어와 "우리가 숨김을 받았다"라고 희희낙락하니 이 어찌 크나큰 모순과 역설이 아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밝아야' 할 성전, 신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모습 전체를 드러내야만 하는 공명정대한 예배행위는 이제 이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곳들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어두움과 거짓, 뻔뻔스러움과 탐욕으로 가득찬 그들의 얼굴들은 이 어두운 강도들의 굴혈(掘穴)속에서 모두 "숨김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시편의 악인처럼, "하나님이 어찌 보시랴? 어찌 그가 들으시랴?"하던 자들이었습니다. 토라를 범한 자들은 종교/제의의 신성성(神聖性)안에 그들의 범죄들을 숨기었으며, 성전은 실제적 삶에서 행해진 수많은 파괴적 삶의 방식을 은폐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치고-숨는"(hit and hide) 치졸한 도피자적 사고구조는 종교제의를 조작하기에 충분하였던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의 표적 대상(target)은 세력을 가진 기득권층(power establishment)인 종교 지도층인 것을 감안할 때, 맹렬한 비난의 대상인 범죄들을 단순히 개인들의 착취 행위들을 가리킨 다기보다는 사회 체계 전체적 행위들로서,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인간의 복리와 안녕을 처참하게 짓밟는 행동들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온 사회 전체가 철저하게 부패하고 오염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제의와 윤리사이의 심한 괴리와 거리감에 대해 일말의 수치감도 상실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회보다 더 불행한 사회가 또 어디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다스림은?

하나님이 언약 공동체의 주님이라면 그분의 다스림과 통치의 영역은 그의 백성들 삶 전체이어야 합니다. 백성들의 삶 ― 그것이 종교적 측면이든, 사회적 측면이든, 정치-경제적 측면이든 상관없이 ― 전체가 하나님의 뜻의 실현장이요 그분의 의지의 실습장이 아닌가요!

철저한 삶의 변혁과 회개를 촉구하는 예레미야 설교의 관심은 놀랍게도 종교적 영역보다는 소위 '비종교적' 영역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십계명의 후반부, 즉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 십계명의 전반부, 즉 하나님에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소위 '종교적' 문제들보다 앞서서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삶 속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죄된 행실들이 구체적인 옷을 입고 등장합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는가?
·아니면 차별하여 대우하는가?
·타국인들, 과부들, 고아들을 압제하거나 착취하는가?

그들은 고대사회에서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던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억울한 일의 피해자가 없도록 하였는가?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아서 결백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일은 없는가? 한마디로 공의와 정의의 문제가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는 사회에, 가정에, 한 개인에게 있어서 허울 좋은 종교행위란 위선이요, 자기 속임수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특히 그 후반부를 파괴한 행위는 결국 하나님의 가슴과 심장을 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율법'(십계명)은 하나님의 심장을 보여주는 거울과도 같고 유리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어찌 당신들은 그렇게도 쉽게 역사의 교훈을 잊어버렸는가?

예언자는 성전제의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가장 충격적이며 놀라운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것은 실로와 예루살렘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대목에서입니다(12-15절).

·당신들은 실로에 한번 가보라.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폐허가 된 성읍, 잡초로 뒤덮여 흔적을 찾기 힘든 마을,
·들짐승과 올빼미의 소리만 들리는 황폐한 고장이 아니던가!
·당신들은 역사의 교훈을 잊었는가?

물론 그들은 역사를 몰랐던 것도 아니고, 역사의 교훈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습니다. 예언자의 질타를 듣고 있던 청중들은 '실로'가 무엇인지, 어디 있는지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 역사의 지평에서 사라져 버린 이스라엘의 성소가 위치한 지명이었습니다. 일찍이 사사시대에는 언약궤와 함께 야웨의 성소가 있었던 곳이 실로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큰 축제일들이 되면 ― 가을철 추수 축제일, 장막절, 신년 축제일등 ― 수많은 인파의 순례의 행렬이 그 끝이 보이지 않았던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두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그의 백성들은 그들의 감사예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언약에 대한 철저한 불순종으로 인하여 실로의 성소는 파괴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 그러한 파멸이 발생하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종종 주전 11세기 중반의 사사시대 마지막에 발생한 사건이 아닌가 추측하지만, 최근의 한 연구는 실로 성소의 멸망을 주전 8세기 말엽의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인한 북왕국 이스라엘의 유배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좌우지간 한 시편의 시인도 이 역사적 불행한 사건을 되 뇌이고 있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의미 있는 큰 사건중의 하나였음에 틀림없습니다(시 78:60). 특별히 예레미야 시대에 실로의 폐허물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 것 같으며, 예레미야의 고향인 아나돗으로 부터 실로가 그리 멀지 않은 지역임을 감안해 볼 때 예레미야의 청중들에게도 매우 익숙한 장소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눈앞에 분명하게 놓여 있는 실로라는 장소, 그리고 그것이 지니고 있는 수많은 역사적 잔해물들,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실로 몰락의 역사적 사건의 의미에 대해 잘못된 해석과 결론을 유출하였던 것 같습니다. 예언자는 바로 그러한 그들의 잘못된 역사의 교훈의 해석을 심각하게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남북 분열이후 남쪽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인들은 북쪽 이스라엘과 그들의 성소에 대해 우월감과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월감과 적대감은 북 이스라엘의 멸망, 그리고 그들의 실로 성소의 파괴를 통해 보상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실로는 야웨에 의해 배척 당하고 멸망하였으나 예루살렘은 하나님에 의해 높이 평가되고 선택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으므로 안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실로와 예루살렘사이의 날카로운 대조를 통한 이러한 잘못된 우월감과 오만한 비교의식은 "유대 왕정의 이데올로기의 진실성을 형성하고 주장하는데 사용되고 있던 강력한 세력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기득권 층들인 종교지도자들과 그들의 아류들중 그 누구도 예루살렘이 실로와 같은 운명을 맞이 하게될 것이라는 예언자의 주장은 결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실로의 파괴는 열방들 앞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공개적인 언약 저주행위였고 그와 동일한 운명을 예루살렘이 자초하고 있다는 것이 예언자의 시각이었습니다. 아니 예루살렘 성전은 세계 열방의 저주거리가 될 것이라는 예언적 메시지였습니다(참고, 행전 6:13; 마 26:61; 요 2:19).

내가 이 집 (예루살렘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 (예루살렘 성)으로 세계 열방의 저주거리가 되게 하리라 (렘 26:6)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의 특별한 총애와 호의를 받는 특권 부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토라(Torah)의 요구와 언약의 의무조항들에 대해 응답하고 대답하여야만 합니다. 만일 이러한 요구들에 대한 응답에 실패한다면 남은 것이라고는 죽음과 파멸일 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언약적 저주로서의 사형선고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그들의 정책안 마련과 그 집행들, 신앙과 종교적 제의 사항들, 수많은 결정들 안에서 더 이상 '안전한 행위들'을 즐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앗시리아 군대에 의한 사마리아 함락으로 그 종말을 본 북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B.C. 721)이 있은 지 백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남방 유대인들은 잘못된 '선택이념'(ideology of divine election)과 호국 종교화된 제의적 종교아래 하나님의 언약의 심판과 저주의 표현이었던 북 이스라엘의 몰락을 신학적으로 몰이해하였던 것입니다.

예언자는 외칩니다: "실로에 가본 일이 있는가?"(12-14절), "북방 이스라엘의 몰락과 패망의 교훈을 아는가?" (15절). 역사를 되짚는 이유는 그 역사의 오류를 되밟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행동의 역사들, 조상들을 비극적 실패의 역사들 ― 기회 있을 때마다 다시금 낭송하고 기억하고 추억하여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신앙을 간직하는 길이요 그들의 신앙을 후손들에게 전수하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였습니다.

언약적 삶으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부르짖음에 대해 삶을 개혁하고, 행위들을 바꾸고, 악한 길들에서 떠나 "옛길"(렘 6:16-26), 즉 시내산 언약과 율법에서 제시되었던 삶의 길로 걷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히 임할 것입니다. 아니 그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옛 언약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 선언은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렘 7:13-15). 하나님의 간절한 권고와 약속들에 대해(3-7절) 유다의 청중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13절). 그러한 자들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재난과 멸망밖에 그 무엇이 있겠습니까!(14-15절). 그리고 그 말씀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이 선포가 있은 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이국 땅에 살았던 유다 백성들 중 얼마는 아마 깊은 아쉬움과 부끄러움으로 이 말씀을 다시금 상기하였을 것입니다. "왜 우리는 여기 와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심각한 실존적, 신앙적 그리고 신학적 질문과 함께 그들은 그리 먼 옛날이 아닌 예레미야의 설교를 다시금 회상하였을 것입니다.

마치면서

예언자들의 종교/제의 비판은 단지 옛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지상 교회의 실상은 어떠한가요? 신자들의 삶을 종교/제의 (교회/예배)적 측면으로 환원시키며 집중시키는 오늘날의 종교 지도자들의 신학관은 옛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좋은 평행선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정의와 공의가 시행되지 않는 곳에 각종 종교행사와 예식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위선과 아집, 불의와 차별 등이 있는 곳에 '주여 삼창'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예레미야의 선포가 있은 후의 유대의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유배는 당연한 귀결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교훈들을 배우는데 이스라엘은 너무도 비싼 값을 치러야만 했으며, 너무도 긴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아니 아직도 이스라엘은 그것을 배우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누가 '이스라엘'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성전'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단순히 종교적 영역에만 국한시킬 수 없습니다. 그 분의 통치와 다스림은 언약 백성들의 삶의 전 영역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삶 전체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삶이 종교요 인생은 예배 행위입니다.
(류 호 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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