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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 (행 2: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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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나는 십자가와 예수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이 말은 “나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내 생애의 자랑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자랑이라는 것은 타인이 못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갖고 있을 때 자랑거리가 됩니다. 또 다 갖고 있지만 내가 특별히 그 가치를 인식할 때 그것이 자랑거리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가 진정 자랑거리가 되는 신앙인으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지옥 가는 것이 두려워서 예수를 믿는 것과, 천국이 좋아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은 뜻이 다릅니다. ‘지옥이 무서워 예수를 믿는다’는 차원이라면 그는 예수를 잘못 아는 사람입니다. ‘천국이 좋아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 말도 뜻은 맞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그런 논리로만 다가오는 진리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찬송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했고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설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가 나의 자랑이다’라는 이것은 단순한 진리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이 나의 자랑이 되려면 건너가야 할 진리의 깊은 강이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십자가를 말하고 십자가를 노래합니다. 십자가라는 가사를 가지고 노래를 부르면서 웃기도 하고 박수도 치고 하지만 십자가는 그렇게 단순히 다가오는 진리가 아닙니다. 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그것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처참하고 무거운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죄가 해결되려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져야만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죄 문제를 예사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안고 있는 이 죄는 예수가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37-38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각각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찌 할 바를 모르는 무리들을 향하여 베드로가 외친 진리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첫번째 음성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왜 회개하라 하는가?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그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 예수님이 우리의 자랑으로 다가오려면 회개라는 강을 건너야 합니다. 죄 사함이라는 이 문제를 이해해야 합니다. 죄의 비참함을 깨달아야 됩니다. 죄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라 하면 계명을 어기든지 사람에게 폐를 끼치든지 법을 어기면 죄가 되는 줄로 인식을 합니다. 그것은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죄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죄는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화려하게 다가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비참하지만 죄는 처음부터 비참하지 않습니다. 죄는 처음부터 악마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천사처럼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죄는 우리가 좋아할 수 있는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죄는 우리에게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베드로의 메시지 속에 오늘 설교의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랑스러우려면 죄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됩니다. 내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를 인식해야 됩니다. 내가 고아라는 것을 인식해야 됩니다. ‘나는 인생의 고아구나,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야 하는구나’ 이것이 회개입니다. ‘내가 지금 진흙탕에 빠져 있구나, 더러운 오물 투성이가 되어 있구나’ 라고 인식해야만 씻을 마음이 생겨집니다. 회개는 바로 그와 같은 내 자신의 처참함을 깨닫는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일반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얻으리라” 여기 선물이라는 용어가 강조됩니다. 우리는 오늘 믿음을 선물로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 믿고 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구원은 선물이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네가 믿고 있는 그 믿음이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받은 구원이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 너는 안 믿어서 구원받지 못했다 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조건이 됩니다. 내가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고 당신은 안 믿었기 때문에 구원 못 얻었다는 말은 진리의 측면에서 보면 틀린 말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내가 믿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좀 더 본질적으로 말하면 믿을 자격이 되기 때문에 믿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믿을 자격이 돼서 믿었다, 예수 믿을 조건이 나는 갖추어진 존재다, 당신은 예수 믿을 조건도 없는 인간이다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믿을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를 자격도 없는 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은 것은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구원받을 자격도 안 되는 우리에게 거저 선물로 주신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입니다. 나는 믿어서 구원받았고 너는 못 믿어서 구원받지 못했다 라고 믿음을 접근하면 안 됩니다. 내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사실 예배드릴 자격을 심사한다면 오늘 누가 예배당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예배드릴 자격이나 됩니까? 우리가 한 주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온 내 자신이 찬송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 이름이 욕된 것이 아닙니까? 예배드릴 자격이 있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을 행위로 생각합니다. 행위는 인과율을 말합니다.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나온 것을 행위라고 합니다. 파종을 했기 때문에 추수가 있는 것을 행위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행위가 아닙니다. 구원받을 어떤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결과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원인이 없는데도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부관계로 태어난 아들이 아닙니다. 생리적인 행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마리아에게 잉태되고 나셨습니다. 원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은혜라고 합니다. 곧 선물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것은 원인이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구원을 위해서 어떠한 행위도 못했습니다. 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값을 지불할 수 있습니까?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을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구원받을 짓을 했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맹인은 약도가 필요 없습니다. 광화문에서 고속터미널로 가는 맹인에게 약도를 그려 줍니다. “조금 가면 시청이 나오고 또 지나가면 3호터널이 나와. 조금 가면 반포대교가 나와. 거기서 좌회전하면 돼” 여러분, 맹인에게 약도가 소용이 있나요? 아무리 자세하게 그려 주어도 맹인에게는 약도가 필요 없습니다. 맹인은 눈을 떠야 됩니다. 무엇보다 먼저 눈을 떠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맹인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맹인입니다. 그런데 약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습니까? 율법이라는 약도, 행위라는 약도, 도덕이라는 약도, 지식이라는 약도, 어떠한 행위를 가지고도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맹인된 우리가 눈을 떠야 됩니다. 우리의 영의 눈이 열려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셔야 됩니다. “회개하여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말은 “믿음을 선물로 받으리니” 라는 말과 같습니다. 성령은 선물로 임하십니다. 우리의 행위로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늘 우리 예배 가운데 선물로 임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

  믿음은 두 가지로 이해를 하셔야 예수님이 우리의 자랑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믿음A와 믿음B, 이 두 가지로 호칭을 합시다. 그런데 믿음A는 가장 근본적입니다. 믿음A가 없으면 믿음B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믿음B는 믿음A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구주로 믿어지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믿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이것은 이 세상의 말로 표현할 때는 인식의 표현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내 안에 회개와 죄 사함은 동시에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의 영은 거듭납니다. 회개의 역사와 믿어지는 역사와 그리스도가 내게 구주로 영접되는 그 역사는 영적인 세계에서는 동시적인 사건입니다. 이것을 따로 따로 구분하시면 혼동이 일어납니다.

  쉽게 비유를 들겠습니다. 결혼을 하면 잉태해서 아기를 낳습니다. 어느 여성이 잉태를 했습니다. 미리 기저귀도 사고 아기 침대도 사고 장난감도 다 샀습니다. 그러나 아기가 나지 아니하면 그 유아용품은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일차적으로 아기를 낳아야 합니다. 아기를 낳고 유아용품이 필요한 것입니다. 유아용품이 먼저가 아닙니다. 미리 준비할 수는 있지만 낳고 해도 얼마든지 됩니다. 아기가 나지도 않았는데 보행기를 사다놓는 것은 너무 이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의 믿음은 아기가 태어나는 믿음A의 신앙이 중요한데 이것은 제쳐놓고 아기용품을 구입해 놓고 용품자랑을 하는 이런 신앙생활을 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믿습니다. 교회는 다닙니다. 그러나 아기용품 자랑 밖에 안 됩니다. 오늘은 어느 백화점에 가서 이것을 사 가지고 왔다, 오늘은 이것을 사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아기 자랑을 해야 하는데 용품자랑을 하면 안 됩니다. 아기가 태어나는 것이 중요하듯 우리의 믿음은 거듭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를 믿고 우리가 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나야 됩니다. 나야 되는 믿음, 난 믿음이 믿음A 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오늘 우리는 예배를 드립니다. 그 믿음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아기가 태어나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믿음이 우리에게 신앙고백을 가능하게 하고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태어난 아기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거듭난 믿음으로 고백되어지는 믿음A의 삶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이 주님을 자랑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예수가 나의 구주 됨을 믿고 거듭난 그 믿음은 그 이름을 부를 때도 감동이 있고 그 예수님 때문에 눈물을 뿌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기 때문에 울고 웃고 하지 아기용품 때문에 울고 웃고 하는 엄마는 없습니다. 아기가 우리를 울립니다. 아기가 귀여울 때 눈물이 날 정도로 귀엽고 아기가 아파서 애처로울 때 그 부모는 눈물을 뿌리지 용품이 고장났다고 해서 눈물을 뿌리는 부모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도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해주신 우리에게 선물로 오신 이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눈물을 뿌려야지 아기용품 때문에 우는 그런 사이비 그리스도인이 되면 안 됩니다.

  믿은 이후의 믿음

  그 다음 중요한 믿음B가 있습니다. 믿음A를 가진 사람은 믿음B로 나타나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믿어야 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의 믿음이 필요한데 그 믿음이 곧 믿음B입니다. 이 믿음은 신뢰한다. 하나님의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선물로 받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격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선물로 받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제는 기도하고 모이고 예배하고 훈련받고 말씀 받고 전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면서 살아가는 믿음의 훈련이 따라야 됩니다. 아기가 낳으면 그 때부터는 자라기 위해서는 인생의 싸움을 해 나가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었으면 그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 피 눈물나는 영적 전투를 해 가야 됩니다. 그 믿음이 믿음B라는 것입니다.

  믿음A와 믿음B는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조화를 이루어야 됩니다. 이것은 명백합니다. 하나님을 상대하는 믿음은 믿음A입니다. 예배드리는 이 시간은 믿음A로 드리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그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내게 구원을 선물로 주신 그분이 임재하는 시간이 예배시간입니다. 그러나 믿음B는 이웃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관계되는 믿음입니다. 교회생활과 관계됩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날마다 떡을 떼며 기도하며 서로 물건을 나누었으며 그들이 모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것이 바로 선물로 받은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아기는 아주 예민한 정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기가 말도 못하고 좋고 나쁜 것을 분별도 못하지만 태어난 지 몇 개월 안 된 아기가 부모를 인지하는 데는 정확합니다. 자기 어머니 품에 안길 때 그 아기가 반응하는 것은 전혀 착오가 없습니다. 정상적인 아기는 자기 부모를 인지합니다. 자기를 낳아준 혈육과 통하는 것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형상 안에 주어진 정서입니다. 자기 부모를 인지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범사에 우리 하나님을 인지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압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정서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랑스러울 때 우리 믿음은 믿음A와 믿음B 라는 두 가지 균형을 가지고 예수님이 자랑스러운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읽어보면 오늘 우리들의 현실과 거리가 멉니다. 그들은 열심으로 모였습니다. 기쁨으로 섬겼습니다. 서로 은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의 수가 점점 많아 가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믿음A와 믿음B의 조화

  요즘 우리가 믿음A와 믿음B를 점검해야 됩니다. 이해가 쉽기 위해서 믿음A와 믿음B로 설명을 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원화가 아닙니다.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함께 믿은 자들과 화합하고 안 믿는 자들을 향하여 섬길 줄 아는 아름다운 믿음B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꾸만 인간관계가 복잡해지고 갈등이 일어나고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믿음A의 기쁨과 감격을 다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믿음A의 감격이 있어야 믿음B의 열매를 우리가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삭막해져 갑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잘 지내야 됩니다. 믿는 사람들끼리는 만나면 하나도 부자유스럽지 않습니다. 그 부자유하지 않는 거기에 머물지 말고 함께 주님의 나라를 위해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적극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해 나가야 합니다.

  한 직장인이 지방에서 서울로 이동을 해 왔습니다. 어느 동네 아파트에 입주를 했는데 이 집사님은 삭막한 이 아파트의 분위기를 바꿔봐야 되겠다고 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친절히 인사를 하며 다가가려고 노력을 해 봤답니다. 현관입구도 청소를 하고 잔디밭도 다듬어 보고 열심히 해 봤는데 아무리 해도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기는 열정을 가지고 친절히 인사를 하는데 상대방의 반응은 그 반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인사를 겨우 받아주는 정도이고 도무지 사람들이 다가오지 않더랍니다. 그렇게 한 달쯤 되어 자기 모습을 재발견한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자기 보기를 무슨 더러운 벌레 보듯이 한다는 것입니다. 인사 자체를 귀찮아하는 눈치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단했답니다. 그런데 같은 동의 두 집을 사귀었는데 그 사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도 이 집사님이 친절히 인사를 하니까 ‘아, 저 사람 학습지 배달하는 사람이 아닌가? 며칠 후에 학습지가 우리 집에 배달되겠지? 아마 그것 때문에 친절하게 인사했을 것이다’ 그렇게 봤다는 것입니다.

  제가 두 주간 전에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3층이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잘 타지 않는데 그 날은 가방 때문에 탔는데 한 사나이가 먼저 타 있었습니다. 내가 3층 버튼을 누르려니까 이미 3층 버튼을 눌러놨습니다. 분명히 3층에 사는 남자였습니다. “302호에 사십니까? 반갑습니다.” “301호에 사십니까?” 비로소 두 사람이 정식으로 2년 6개월만에 인사를 했습니다. 이것이 요즘 도시의 생활입니다.

  맺는 말

  마실이라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마실 문화는 참 좋은 것입니다. 예고 없이 가도 반갑게 맞이해 주는 이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전화하지 않고 가면 싫어합니다. 여러분의 집에 교인이나 친척이 오면 말을 이렇게 바꿔보십시오. “예고도 없이 오는 손님은 더 반갑다” 그 말 한마디에 전화하지 않고 온 미안한 마음이 사라집니다. 예수 믿는 우리끼리라도 마실을 만듭시다. 구역예배를 통해서 마실을 만듭시다. 부담없이 예고없이 찾아오는 교인을 반갑게 맞이합니다. 이것이 예수 믿고 난 이후의 믿음B입니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사람을 섬길 줄 아는 이것이 믿음B입니다. 믿음A만 가지고 고집만 부릴 것이 아니라 믿음B가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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