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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로운 피조물 (고후 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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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장사 하는 차가 불법정차를 하고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쪽에서는 경찰단속 차가 오고 있습니다. 이 채소 차는 도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찰 차가 따라 오면서 "채소차 오른편 서라" 스피커로 부르며 세웠습니다. "벌금 5천원을 내라" 그런데 마침 잔돈이 없어서 1만원 짜리를 줬는데 그것을 받고는 경찰차가 그대로 가버립니다. 이제는 채소차가 따라가면서 스피커로 "경찰차 오른편 서라" 경찰차가 섰습니다. "벌금 5천원, 거스름돈 5천원, 합해서 1만원 내라"

  여러분, 사람의 값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다른 말로 사람의 가치가 얼마쯤 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사람을 신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사람이 신인가? 아니면 동물인가? 아니면 동물 이하인가? 인간의 위상과 존재와 가치가 도대체 무엇인가? 한계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이 무엇이고 결과가 무엇인지 애매한 것이 많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다니는 것을 보면 특히 젊은 계층들은 전부 가방을 매고 있습니다. 가방을 안 맨 사람보다 맨 사람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또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핸드폰을 귀에 대고 건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인간을 논하려면 컴퓨터, 핸드폰, 패션 이런 개념을 도입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사람을 노예로 사고 팔았습니다. 인신매매범들은 사람을 돈으로 사고 팔고 합니다. 그런 행위들은 동물적이고 도구화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창세기 6장에서는 그 당시 사람을 가리켜 "사람이 육체가 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타락한 인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의도대로 살지 못하는 인간을 말합니다. 실감있게 표현하면 육체, 고기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본문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 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사람이라는 여기에서 인간의 가치와 존재를 논하고 위상을 논해야 합니다. 칼 막스는 인간론에 있어서 물질과 사회의 변화로 사람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유물론을 제창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심령이 새롭게 변화함으로 변하는 것이지 물질로 변화될 수 없고 사회 구조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핸드폰을 들고 유행하는 가방을 매고 첨단 패션 옷을 입고 산다고 해서 옛 사람과 지금의 사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물질이나 환경이나 사회구조가 아니고 먼저 인간 자신 안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인간의 근본 문제가 있지 바깥의 환경이나 구조나 물질 때문에 인간이 잘 되고 잘못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씀이 모든 이론을 다 능가하는 절대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지 않고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지 않고는 내가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밖에서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가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1장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영접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내 안에 영접된 그리스도가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가 나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주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12절에 "아들이 있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을 때만이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 인격과 심령의 한 가운데 들어와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 확신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야

  또 한 가지 중요한 개념은 17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것입니다. 이전 것이 지나가야만 새것이 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이전 것이 지나가지 않으면 새것이 되지 않습니다. 주관적으로 새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전 것이 지나가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왔으면 이제는 이전 것을 내 보내야 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의 나쁜 습관과 이념과 사상과 모든 가치관을 다 지나가게 해야 합니다. 이전 것이 지나가야만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자기 확신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해도 확신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가 새로운 존재가 되었는데도 그의 생활에 이전 것이 자리잡고 있으면 "보라 새것이 되었다" 이렇게 확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취직을 했으면 그 회사와 직장에만 충성을 해야 합니다. 이전에 있던 직장에 자꾸 마음을 두고 이전의 직장 상관을 마음에 두고 관계를 가지면 그 사람은 현재 취직한 회사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남녀가 결혼 전에는 교제할 수 있고 친구로 사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했으면 이전 것은 지나가게 합니다. 결혼을 했는데도 남녀의 인간관계가 지나가지 못할 때 그 결혼의 오해와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술, 도박, 사행심 이런 것이 예수 믿고는 지나가야 합니다. 한 도박 중독자가 있습니다. 두 달만에 2억을 잃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2억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는 가정과 모든 인간관계를 외면하게 되고 노숙자가 되어서 그 도박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보고 이런 비참한 말을 했습니다. "내가 점점 망가져 가고 있는데도 도무지 떠나지 못한다"

  여러분, 나쁜 습관은 지나가야 합니다. 예수를 믿었습니까? 나쁜 습관을 떠나 보내십시오. 예수 믿고 산다면 나쁜 정서를 떠나 보내십시오. 예수를 믿었으면 비뚤어진 자세를 바로 잡으시기 바랍니다. 이전 것이 지나가야만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확신할 수 있고 남들 앞에서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말에 확신이 있으면 그 말을 통해서 복음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된 확신이 없는데 남들보고 예수를 믿고 살자 한다고 그 사람에게 감동이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확신은 말을 안 해도 남들이 보고 느낍니다. 아, 저 사람은 예수를 믿고 확신에 찬 사람이다 그리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 속에서 삶의 목적이 다 변합니다. 우리는 이 삶의 목적이 변하는 여기까지 언제나 점검을 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다" 거기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이 사람이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으면 이제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 변해 가는 평가를 받아야 됩니다.

  새로운 목적

  15절을 보겠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 구절에서 '위하여'라는 말이 아주 함축적입니다. 우리는 이제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내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목적과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목적이 바뀌었다는 말은 주인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우찌무라 간조가 '실패는 죄가 아니다. 목적이 잘못된 것이 죄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주 중요합니다. 여행을 갈 때 어떤 차의 일등석인가 이등석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적지가 맞는 차를 타야 합니다. 언젠가 경부 고속도로의 호텔이 있는 금강 휴게소에서 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금강 휴게소는 상하행선 차가 다 들어옵니다. 보통 휴게소는 한 쪽에만 있는데 금강 휴게소는 양쪽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드신 승객이 서울에서 경주로 가는데 다른 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차는 경주에서 서울로 가는 차로 밑에 써 놓은 경주라는 글씨를 보고 타야 되었는데 위에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만을 보고 탔습니다. 한참 가다보니 대전이 나옵니다. 오늘 우리 삶의 내면을 평가해 보면 목적이 다 망가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병들어 있습니다. 삶의 목적이 균형을 잃고 있습니다. 애는 쓰고 땀도 흘리고 희생은 했는데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인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새로운 가치관

  16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철학자이기 때문에 그의 말이 때로는 조금 어렵습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이 육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부패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육체대로 살지 아니한다는 말은 내가 이제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가는 인간으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되는 가치관을 내가 바로 알고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목적이 바르기 위해서는 이 가치관이 흔들리지 말아야 됩니다. 목적은 바로 세워놓았는데 가다가 다 빗나가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목적에 이르려면 가치관을 바로 잡아야 목적지까지 명중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표는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라고 그렇게 기도는 합니다. 그런데 살아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가 아니라 나를 위하여 삽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가다가 중간쯤 가서는 유턴을 해 가지고 나를 위하여, 세상 것을 위하여 삽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이 목적에 맞는 가치관을 붙잡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차를 타고 양평을 지나오는데 그림 같은 전원주택이 강변에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환상적이었습니다. 순간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이 좋으면 뭐하냐 저 속에 사는 사람이 좋아야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보기 좋은 남의 집만 보고 마음을 뺏길 필요는 없습니다. 초막에 살아도 하나님을 섬길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집이 비싼 것하고 집이 값진 것하고는 다릅니다. 우리는 비싸지는 못할지라도 가치 있게 사는 인생이 되기 바랍니다. 요즘 우리 눈에 북한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선수단도 보이고 응원단도 보이고 탈북해서 돌아오는 사람 등 텔레비전을 통해서 북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는데 내 눈에는 다이어트를 해야 할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30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도 다이어트를 해야 할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에는 일을 많이 했었습니다. 읍에 사는 사람들도 5일 장날에 가서 장사를 하죠, 평일은 논밭에서 일을 하며 살았었습니다. 논밭에서 농사를 짓고 밤에는 길쌈을 하고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는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거의가 다 자연식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알고 보면 옛날 사람들이 진짜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모든 것이 다 모자랐습니다. 넉넉한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논밭에 나가 일할 일거리도 없습니다. 길쌈도 없고 새끼 꼬고 가마니 짜는 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텔레비전이 밤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요즘 자연식품이 귀합니다. 인스턴트와 화학처리된 식품이 모든 분야에서 넉넉해졌습니다. 사는 집도 넉넉한 집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비좁게 사시는 분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 중에 빈 방이 한두 개 정도 있는 집들이 많이 있습니다. 승용차도 혼자 타고 다니면서 빈 자리를 놔두고 있는 차들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넉넉합니다. 용돈, 식품, 냉장고에 꽉꽉 들어찬 음식들, 그 넉넉함이 다이어트를 해야 될 실정이 되었습니다. 넉넉함에서 인간들이 비만증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육체만이 비만증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정신세계의 비만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를 알고 도우면서 살 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가난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가난한 자를 알고 도와야 됩니다. 베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들을 안 하면 정신적 비만증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 넉넉해졌다고 행복해졌습니까? 고혈압, 암, 심장병, 뇌질환 같은 현대병은 다 넉넉한데서 온 병들입니다. 그 다음 가치관에 있어서 중요한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주를 위해 미치자

  13절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바른 가치관을 붙잡고 미쳐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목적을 바로 이룰 수 있습니다. 비뚤어진 가치관을 가지고 미치니까 모두 망가지는 것입니다.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몰두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뚤어진 가치관을 가지고 몰두하면 몰두할수록 그 사람은 망가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목적이 바릅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에 목적이 바로 서있고 가치관이 바로 서있기에 우리는 바른 가치관에 미쳐도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거든 미쳐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옳은 줄도 알고, 이것은 해야 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이것이 좋은 것인 줄을 아는데 한 가지 병이 무엇입니까? 미치지 않는 것입니다. 평생 미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한 때는 기도에도 미쳐봐야 됩니다. 예수 믿고 기도하는데도 미쳐보십시오. 전도하는데도 미쳐보십시오. 성경 읽는 것에도 한 때는 미쳐봐야 됩니다. 미치는 단계까지 가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미쳐야 됩니다. 야구, 축구장에 가 보면 간혹 미쳤다 할 정도로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속상해 하고 시위하지 않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그 사람은 정상으로 돌아가는데 사실상 관람의 묘미를 아는 사람은 미쳐버립니다. 운동장에 가서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으로 앉아 있으려면 가지 마십시오, 남에게도 김 빼는 행동입니다. 몰입을 해야 됩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몰입을 해야 됩니다.

  맺는 말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날 수는 있습니다. 이 말이 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평생 연구해도 그 분을 다 모릅니다. 그런데 그 분을 만날 수는 있습니다. 만나고 보면, 그 분과 함께 살고 보면, 그 분을 위하여 살고 보면, '아, 내가 믿는 하나님이 이렇게 좋으신 분이구나'라고 아는 것입니다. 만나서 알아야지 알고 만나려면 평생 가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그러면 좋은 하나님으로 알아질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삶의 목적, 새로운 가치관을 다시 한번 인식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안에서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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