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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비린내 나는 십자가 (요 19: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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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관한 기록은 우리 모임에서 수양회 때마다 단골 주제였습니다. 십자가의 메시지가 전해질 때마다 우리는 시청각적인 묘사를 많이 해왔습니다. 설교자이든, 모노드라마 강사이든, 어떻게 하면 좀 더 실감나게 십자가의 고통을 표현하고, 좀 더 그 고통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습니다. 그리고 청중들도 이미 감성적으로 은혜(?) 받을 준비를 하고 기다렸습니다. 평소에 잘 받을 수 없었던 강력한 은혜를 그 때만큼은 꼭 받아야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어떤 강의 때보다도 엄숙하고 진지하게 경청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일들이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느낀다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십자가 말씀이 특별히 날 잡아서 전해야 하는 말씀이 아니라 평소에도 전해야 하는 말씀임을 이 시간 상기하고 싶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대한 감성적인 접근만큼이나 지성적인 접근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하고 싶습니다. 십자가는 드라마틱하게 세팅되어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느낄 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생 생활 속에서도 늘 묵상되어야 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기록한 4복음서의 저자들은, 드라마틱한 영화감독처럼 십자가의 고통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일에는 참 인색합니다. 특히 요한의 경우에는 17절과 18절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만 단순하게 언급할 뿐입니다. 사랑의 사도라고 불릴 만큼 감성적인 측면이 강할 것 같은 그가, 십자가에 대해서는 유달리 감성적인 부분을 대폭 제해버린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학자들은 이미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십자가의 고통에 언급했기 때문에 그 끔직스러운 광경을 더 길게 묘사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에서도 십자가의 고통에 대한 시청각적인 묘사는 상당히 부족합니다. 만약 요한이 십자가의 고통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 고통에 대해 좀 더 보충해서 묘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요한의 관심은 십자가의 고통 자체를 묘사하는 것에 있지 않고, 십자가의 의미를 밝히는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요한은 십자가의 고통을 간과해버리지는 않습니다. 오늘은 두 마디 말씀을 중심으로 십자가의 고난과 그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내가 목마르다

“내가 목마르다”(28)는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가상칠언) 중의 하나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십자가 고통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이 말씀조차 그의 육체적인 고통을 묘사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이 응하게 하려고 하신 말씀이라는 부연설명으로 밝혀놓고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하는 안타까운 느낌을 가지도록 하기보다, 목마름의 고통을 느끼시는 분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살아계셨던 동안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믿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는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너무 확고해져서 그분의 인성을 믿기가 오히려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활개 치게 되었습니다. ‘영은 거룩하고, 육은 악하다’는 이원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악한 육체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육신을 가지신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가현설’을 주장했습니다.

겉으로는 가현설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실제적인 생각에 있어서는 가현설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렸어도 전혀 고통을 당하지 않으셨거나, 고통을 덜 느끼셨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목마름까지도 느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예수님의 고통을 극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고통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또 하나의 큰 잘못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십자가를 지신 그 분은 목마름의 고통까지 느끼시는 분이셨음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예루살렘 근처 기봐트 하밉타의 뼈 동굴에서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의 골격이 발굴되었습니다. 몸은 앞으로 향하고 있는데, 발은 십자가에 옆으로 못 박혀있는 자세였습니다. 그런 자세가 되려면 몸이 허리에서 90도로 꼬여있게 됩니다. 부자연스런 자세로 뜨거운 태양 아래 노출되어 있고, 팔이 당겨져 있어 정상적인 호흡을 하기가 힘듭니다. 이 자세에서는 폐가 서서히 수분을 흡수하게 되고, 체액이 내부에 축적되어 서서히 질식 현상이 생기면서 심장의 활동에 심각한 장애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숨을 한번 들어 마시기 위해서는 팔과 가슴 근육의 긴장을 풀기 위해 다리로 몸을 밀어 올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리를 부러뜨리면 숨쉬기가 불가능해져서 빨리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32).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쏟아졌습니다(34). 이 때문에 의학적으로는 예수님의 사인(死因)을 ‘심장파열’로 봅니다. 심장이 파열되어 쏟아진 피가 늑막에 고였다가 시간이 지나자 혈청이 분리되면서 물과 피로 나누어졌고, 창으로 찌르자 쏟아졌다는 것입니다. 아마 체액도 피와 함께 고여 있었겠지요. 심장 파열은 고속으로 달리는 차에 부딪치는 것과 같은 강한 물리적 충격이 없이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대해서 드라마틱하게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목마름조차 느끼셨던 그분이 십자가에서 심장이 터지는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그런 고통을 당하셨습니까? 30절을 보면 예수님은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하셨습니다. 이 말은 완료시상으로 쓰였는데, 완전히 성취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실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을 다 성취하셨습니다. 막 10:45절에서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대속’(代贖)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죄 값을 갚아주시기 위한 사법적인 ‘대리속죄’(vicarious atonement)였습니다. 그래서 갈 3:13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다는 뜻입니다.

대리속죄는 객관적(objective)으로, 역사적인 한 사건으로 이미 발생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그 때에, 이미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속물로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다 이루셨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왜 대속이 필요했습니까? 이는 하나님은 죄를 참아보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인에게 진노하셔야만 합니다. 죄에 대한 합당한 형벌을 내리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구약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행할 때마다 심판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모두 간과해 두고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그 모든 것에 대한 진노를 십자가에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대속물이 되심으로 그 진노를 다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죄는 하나도 간과하지 않으시면서, 택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은 빠짐없이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선언되면서, 죄인 된 자기 백성들과 다시 화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먼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동시에 우리를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롬 8:1-2).

오늘날 십자가는 예쁜 장신구가 되었습니다. 은과 금으로 치장된 채 여인들의 목과 귀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의 단상에 달려있는 십자가도 멋있는 장식품 역할을 합니다. 기념품 가게에 가면 언제든지 십자가 선물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십자가는 피비린내 나는 저주스런 나무였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십자가’는 그 명칭만으로도 치를 떨게 했던 끔찍한 사형틀이었습니다. 그 사형틀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이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예쁘게 장식된 십자가가 아니라 피 비린내 나는 십자가로의 회복입니다.

항상 피 흘리는 제물을 드려왔던 유대인들은 피비린내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알았습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죄가 사함 받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재물의 피 흘림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에서 해방되고 다시금 하나님과 화목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연사하시거나 병들어 죽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대속물로, 그리고 화목제물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 피로 인해, 우리도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습니까? 좀 더 착하게 살면 되겠습니까? 좀 더 열심히 신앙적인 활동을 하면 되겠습니까? 좀 더 금욕적이고 고행적으로 살면 되겠습니까? 소위 ‘일천번제’라는 헌금을 드림으로써, 혹은 힘에 겹도록 전도하고 오지에 나가 선교한다고 되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이 자기 의를 쌓는 행동을 합니다. 마치 어떤 류의 희생을 드림으로서 하나님을 만족케 하고, 평화를 누리고자하는 어리석은 시도를 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의 희생은 필요치 않습니다. 주님께서 온전히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게 됩니다. 뭔가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2%의 부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만약 종교적인 활동에 몰입함으로서 평화를 누리는 것 같다면, 그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으며, 우리 대신 십자가의 저주들 받으신 화목제물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이루신 주님 앞에서 자기의 모든 의를 버리고 그 분만을 신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선을 행할 수 있고, 바른 헌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다 이루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감사를 표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알 때, 아무리 헌신했을지라도 자기 의로 삼지 않고, 단지 은혜로 여기는 참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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