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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특별의식과 배반 (요 18: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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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체포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순종하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의 배반을 다루고 있는 장면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특별의식과 배반의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칼을 거두게 하시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잡아 결박하고서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 갔습니다(12-13). 안나스는 주후 6-15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있다가 로마의 행정장관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Fratus)에 의해 추출된 인물입니다. 그 후 그의 사위인 가야바가 18-36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지냈습니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유익하다며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명분을 내세우던 자였습니다(14).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당시의 제사장은 가야바였지만, 안나스는 여전히 막후의 실권자로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나머지 제자들은 모두 달아났고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제자는 대제사장과 안면이 있는 사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밖에 섰습니다(15-16). 저자 요한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자기를 ‘다른 제자 하나’로 소개합니다. 요한이 어떻게 대제사장과 안면 있는 사이였는지에 대해서 인척관계였다고 하기도 하고, 요한의 아버지가 물고기를 대제사장에게 납품하는 관계였다고 추측하기도 합니다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안면이 있었던 요한은 문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문 밖에 섰던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원래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경쟁했던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 일행을 거절했을 때는, 불을 내려서 멸해버리자고 예수님께 건의할 만큼 성깔이 있고, 마음이 높아져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기록할 무렵에는 가능하면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할 만큼 매우 겸손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베드로보다 특별히 용감하거나 예수님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대제사장과 안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솔직하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서면서부터 베드로는 자기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겪게 됩니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여종이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17)하고 물었습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들어가고 있던 베드로는 갑작스런 질문에 화들짝 놀랐던 것 같습니다. “나는 아니라” 갑자기 아무런 준비 없이 옆구리를 가격당한 사람처럼 얼떨결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말이 나왔을 것입니다. 이 말은 마치 요한은 제자일지라도 나는 아니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베드로는 늘 자기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리라”(마 26:33)고 하셨을 때도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막14:29)”라고 했고, 오히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13:37)”고 장담했습니다. 지금도 다른 제자들은 도망갔지만 자기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도망간 제자들을 형편없는 놈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해봤자 오십보 백보였습니다. 특별의식이 많았던 베드로는 배반도 특별한 형태로 했을 뿐입니다. 체포대 앞에서는 용감한 것 같았던 베드로가 한 계집아이 여종 앞에서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하고 맙니다. 베드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피워놓은 숯불을 쬐며 군중 속에 몸을 숨겼습니다(18).

마침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해 심문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19). 예수파의 조직 강령과 저변 세력들을 파악하여 일망타진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보통 이단 집단은 핵심 멤버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일반인에게 공개적으로 가르치는 교리가 다릅니다. 은밀한 곳에서 온갖 부정과 비리를 행합니다. 그래서 취재를 하려고 하면 뒤가 구려서 해외로 도피하거나 만나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권세자들 앞에서도 조금도 거리끼는 것이 없었습니다.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20-21) 예수님은 은밀히 행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빛 가운데서 행하셨고 언행이 일치하셨습니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었으므로 더 이상 밝힐 것이 없었습니다(요일1:5). 예수님께서 너무 당당하게 말씀하시자 곁에 섰던 하속 하나가 태도가 불량하다며 손으로 예수님을 때렸습니다(22). 예수님은 권력에 아부하는 그를 꾸짖으셨습니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23) 그 후 예수님은 결박당한 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보내졌습니다(24).

예수님이 심문을 당하시는 동안 베드로는 계속 불편하고 괴로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속에게 맞는 것을 볼 때에는 얼굴이 일그러졌을 것입니다. 결박을 당하실 때에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시종일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이 이상했던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25).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며 두 번째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에게 귀가 잘렸던 말고의 일가인 대제사장의 종 한 명이 베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26) 베드로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또 부인했습니다. 그 때 닭이 울었습니다(27). 마태복음을 보면 베드로는 처음에는 그냥 부인했지만, 경사진 미끄럼틀에 미끄러진 것처럼 두 번째는 맹세하고 부인했고 세 번째는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습니다.

주로 베드로처럼 ‘나는 특별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시험에 잘 빠지는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 베드로에게 특별해 보이는 점들이 있습니다. 그는 주와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새 삶을 시작할 만큼 결단력도 있고 의리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꾸짖기도 할 만큼 배짱도 있었습니다(막8:32). 믿음이 충만해서 한 순간 물위를 걷기도 했습니다(마14:29). 예수님은 베드로라는 별명을 특별히 지어주셨고, 그의 장모가 아플 때에도 심방해 주셨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만, 아무튼 조금 남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 때문에 베드로는 우월의식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특별의식 때문에 그는 예수님께서 세 번 부인할 것을 예고하셨을 때도 자기를 너무 몰라준다고 섭섭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막14:30).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도 새겨듣지 않고 잠만 잤습니다(마26:41). 자기는 지금까지도 성실과 충성심으로 예수님을 잘 따라왔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자신에 대한 지나친 신뢰로 영적인 준비를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준비가 없었던 그는 갑자기 위기를 만나자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한 번 부인하고 나니 가속도가 붙어서, 더욱 점차 강도 높게 두 번 세 번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닭 우는소리와 함께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베드로의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그 순간에 성실과 의리와 충성심은 너무나 맥없는 것이었습니다. 자부심과 자기 의도 날아가 버렸습니다. 베드로의 배반 사건은 그 누구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우월의식, 혹은 다른 단체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특별히 무너지기 쉽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12절에는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시험에 빠졌었고, 이삭도 시험에 빠졌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조차 한 순간 유혹으로 죄에 빠져 극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면에 조금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오십보 백보차이’일 뿐입니다. 그 속에 죄악 된 본성은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베드로처럼 배반의 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 베드로는 배반했지만 ‘나는 배반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특별의식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특별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대체로 다른 사람의 단점을 잘 봅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는 비판과 함께 나는 그렇지 않다는 비교우월감을 가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것은 ‘나도 베드로처럼 배반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발견할 때, 자신도 역시 연약한 존재임을 시인하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 공동체도 연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있어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덧 붙여 생각해야 할 문제는, ‘나도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기 게으름이나 자기 죄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연약하니까 계속 연약하게 살겠다는 자세는 성경이 가르치는 자세가 아닙니다. 이는 실패 이후 베드로의 변화된 삶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입니다.

베드로는 이젠 더 이상 제자로 살 수 없을 만큼 철저히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실패는 베드로로 하여금 연약한 자들을 이해하고 섬기는 훌륭한 목자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게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며 버티던 죄악을 심히 통곡하며 눈물로 회개했습니다(마26:75).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지 못하고 근거 없는 허풍과 자만심을 가졌던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허물과 연약함을 아시면서도 변함없이 사랑과 겸손으로 섬겨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자기를  신뢰하는 대신에 예수님의 은혜에 기초한 신앙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이 예비 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베드로는 이처럼 철저한 실패를 겪어야만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닫고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후에 성숙해진 베드로는 핍박을 받아 흩어진 성도들을 위해 목자의 심정으로 베드로 전후서를 썼습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일깨우며 권면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베드로는 나도 연약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도 연약하게 살아도 좋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연약하기 때문에 근신이 필요하고, 깨어 있는 것이 필요하고,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면서 마귀를 대항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기도함으로 깨어있어서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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