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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무(專務) (행 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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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설교를 듣고 싶다." 소위 강남의 인텔리들의 일성입니다. 누가 들어보아도 애원이 묻어나는 이 말은 유명 기독교 저널 9월호의 특집이자 헤드라인입니다.
이 말 속에는 설교에 대한 불만 정도를 넘어서 고통의 신음소리가 베어 나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갈급한 탄원을 초대교회 공동체 조직을 통하여 해결의 돌파구를 찾기 원합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서 폭발적인 전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교 내의 빈민 구제 사업에는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일정한 지역 내의 거주민들 중 극빈자들에게 매주 금요일마다 열네 끼에 해당하는 돈을 지급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떠돌이 빈민에게 음식을 무한정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구제 방법은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지역의 빈민자들에게 매일매일 지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지급 과정에서 헬라파 과부들이 히브리파 과부들보다 대접이 공평하지 못했기 때문에 원망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불평이 공동체 안에서 표면화 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사도들은 교회의 중심인물들입니다. 이들은 교회내의 문제들을 엄격히 처리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 구제 사업을 비롯해서 행정적 업무가 늘어만 갔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사도들은 자신들의 주업무인 복음 증거 사역이 소홀히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사도들은 복음 전파를 위하여 공동체 안에 일을 이원화 시킬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4절의 말씀대로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 지금까지 해왔던 많은 교회 안의 일들은 사람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맡긴다고 했습니다.

Ⅰ. 기도하는 것은 사도들의 전무(專務) 입니다.

본문 6장 4절에 『우리는 기도하는…전무하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주님께서 친히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6장 10절에서 13절에 기록된 주기도문입니다.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7장 5절에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6장 12절에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4절에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장 9절에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에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4장 12절에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이 자신들의 사명임을 인식하고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하기로 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1-2절에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결코 구속적인 중보기도가 아닙니다. 구속적 중보기도는 오직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보에 해당하는 메시테스( )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에만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의 기도를 구속적 중보기도로 착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이를테면 로마 카톨릭적 발상입니다. 사제들 앞에 이른바 고해성사는 중보기도의 허구성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비성경적 행위입니다. 오늘날 교회 목사가 하는 목회기도는 다릅니다. 다만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는 엔툭시스( )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도를 위하여 하는 주의 종의 기도입니다. 마음을 같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애써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 것은 기도 없이는 성도라는 이름을 계속해서 지탱할 수 없는 것입니다.

패트릭은 말하기를 "기도가 없는 것은 배터리 나간 전지와 같다."라고 했습니다. 죤 머레이는 말하기를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을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스웨덴 속담에 "당신의 근심이 무릎 위로 기어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유대 속담에는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35편 13절에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합심으로 기도하고 애써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더불어 기도하는 것은 목회자의 전무입니다.

Ⅱ. 말씀전하는 것은 사도들의 전무(專務) 입니다.

본문 6장 4절에 『우리는…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특별히 말씀 전하는 사명을 명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설교의 역사는 바로 교회운동과 그 기원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설교는 하나님 계시전달의 절대 방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시가 교회라고 하는 기관과 선포하는 행위를 방편으로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포행위가 항상 동일한 상태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여러 시대 여러 모양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날 마지막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포되었습니다.

① 족장시대에는 왕적 선포였습니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직접(불, 뇌성, 환상, 우림과 둠밈 등을 통하여) 나타나셨습니다.
② 국가시대에는 제사장적 선포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사장들의 제의례를 통하여 인간에게 전달되었습니다.
③ 왕국시대에는 예언자(선지자)적 선포였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소명된 선지자의 마음에 담아 먼저 그들을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시키시고 마침내 그들의 입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전달하셨습니다.
④ 교회시대는 설교사역의 전부입니다.

예수의 마지막 지상명령이 전파사역이었습니다(마 28:19-20; 막 16:15). 이를 위하여 보혜사 성령을 약속했습니다(요 14:16-17,26; 15:26; 16:7-8,13,14; 행 1:8). 약속대로 성령이 강림했습니다(행 2:1-3). 강림하신 성령은 하나님의 큰일을 증거 했습니다(행 2:11). 하나님의 큰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교회시대는 바로 이 위대한 전파사역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① 사도들과 처음 교회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② 초기 교부시대의 설교사역은 사도적 신앙의 계승이었습니다.
③ 중세 교회시대는 모든 분야에서 암흑기였습니다.
④ 16세기 종교개혁시대는 설교의 부흥시대였습니다.
⑤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는 청교도운동과 그 영향권의 시대였습니다.
⑥ 19세기 초 미국과 영국을 중심하여 설교 재 부흥시대가 도래했습니다.
⑦ 20세기는 설교의 절대 이데올로기가 자리를 잃는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21세기에도 계속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금 이 시대는 모든 것이 종교화 되는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따라서 절대와 상대의 가치가 자리를 잃고 표류하는 시대입니다. 여기에 따르는 심각한 병리현상은 성경해석의 자유화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성경해석이 교리적 틀을 통과하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선포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교회운동이 왕성할 때마다 설교사역이 왕성했습니다. 역사의 분수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나누어집니다. 바로 그 시대가 B.C.와 A.D.를 갈라놓았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그 후에 초대교회는 밝았습니다. 중세교회 천년의 세월은 어두웠습니다. 마침내 종교개혁시대는 설교의 재발견시대였습니다. 그 후는 다시 쇠퇴하고 있습니다.
구속사로서의 교회운동은 바로 설교운동(전파사역)과 직결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말씀전파(설교) 사역은 교회운동의 근간입니다.
칼빈은 "설교사역은 그리스도의 대리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설교가 그리스도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맡은 자가 그의 사신이요 청지기라는 점에서 최고의 교사라고 했습니다.

설교가 없이는 그리스도의 구원이 전달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설교는 인간의 일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 곧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역이라고 했습니다. 설교는 곧 하나님이 지배하는 전신이라고 정의를 마쳤습니다.
① 설교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사역입니다(살전 2:3-4).
② 설교사역은 그리스도 자신의 사역보다 더 큰 일입니다(요 14:12).
③ 설교사역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육체에 채우는 일입니다(골 1:24).
④ 설교사역은 화해사역입니다(고후 5:18-19; 롬 5:6-11).
⑤ 설교사역은 하나님의 청지기 사역입니다(딤전 3:15; 마 24:45).
⑥ 설교사역은 바로 구령운동 곧 생명운동입니다(딤후 4:2; 고전 9:16).
⑦ 설교사역은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마 28:19; 행 1:8; 막 16:15).

참된 설교가 무엇입니까?
첫째, 말씀자체의 선포입니다(Kerugma).
둘째, 그 말씀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입니다(Didache).
셋째, 그 말씀에 대한 강한 호소와 설득력을 갖는 권면입니다(Paraklesis).
넷째, 그 말씀을 오고 오는 그 시대 그 환경의 사람들에게 그 말씀 그대로를 적용하는 것입니다(Homilia).
언제나 참된 설교는 성경이어야만 합니다. 오늘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설교를 듣는 자들이 성경 그 자체에 비중을 두지 아니하고 전하는 환경과 전하는 사람에게 비중을 두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Ⅲ. 교회 일은 집사들의 전무(專務)입니다.

본문 6장 3절에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라고 했습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전파하는 일이 목사의 전무라면 그 외의 교회 일은 선택받은 집사들의 전무입니다. 그 일은 목사의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의 조력입니다. 말씀 전하기 위한 일과 말씀 전한 후에 후속조치의 일은 집사들의 몫입니다.
이 일을 맡기려고 선발된 집사들은 먼저 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②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③ 칭찬을 듣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집사들이 교회 일을 등한히 하면 교회부흥이 되지 아니합니다.

우리 헌법 교회정치 제 6장 집사 25조 집사의 직분 그리고 27조 집사의 직무가 있습니다. 여기에 중요 부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집사의 직무는 "교회에 속한 재정을 관리하는 것과 가난하고 곤란한 교인을 살펴 구제하는 일을 주관하고 재정에 관한 문서를 보관하는 직분이다(행 6:3-4; 빌 1:1, 정치문답조례 103문 참조). 또 빈곤한 자를 구호하며 교회의 서무, 회계, 구제에 관한 사무를 담당한다(행 6:1-2)"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회정치 제 5장 치리 장로 제 24조 장로의 직무 중에 중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목사를 도와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며 전국교회의 신령한 관계를 총괄하며 양 무리가 도리오해나 도덕상 부패에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당회나 개인으로 선히 권면하되 회개하지 않는 자를 당회에 보고한다. 또 교인을 심방하되 병자와 조상자를 위로하고 무식한 자와 교회내의 믿음의 어린이를 기르고 살필 의무가 있다. 평신도라도 사랑의 법칙을 실행할 의무가 있거든 장로는 신분상 의무와 직무상 책임이 더욱 중하다. 장로는 교인과 함께 기도하며 위하여 기도하고 설교의 결과를 교인 중에서 찾아보며 질병과 슬픔을 당한 자와 회개하는 자와 특별히 구조받을 자가 있을 때에는 목사에게 보고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밭 가는 일은 머슴에게 물어야 한다."는 뜻으로 모든 일은 전문가에게 물어야 옳다는 경당문노(耕當問奴)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기도와 설교는 철저히 목사의 영역입니다. 장로와 집사들은 이 일을 보좌하고 도우는 직분입니다. 아마 한국교회 목사들처럼 바쁜 교역자들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 강단이 지극히 빈곤한 나머지 마침내 우리는 설교를 듣고 싶다는 탄원이 나오는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차적인 이유야 틀림없이 설교자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회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목사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부지런해서 생기는 결과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목사는 양들에게 풀을 먹여야 하고 성도가 먹어야할 풀은 신구약 성경 66권입니다. 따라서 목사의 전무는 설교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은 설교 준비하는 시간을 얻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준비 안 된 설교는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린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면 갈수록 설교는 더 힘들어집니다.

성도들이 일차적으로 바라는 것이 설교라면 목사에게 설교 준비할 수 있는 여건을 부여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목사가 성숙한 교인을 배출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성숙한 교인들이라야 목사로 하여금 가장 중요한 일에 몰두하도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 준비에서부터 성도들의 문제는 시작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양들이 배곯는 소리가 어떤 경우에든지 들리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목사에게만 있지 아니합니다. 초대교회에 사도들이 일이 너무 많아졌을 때 그 일에 파묻히지 아니하고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일로 뛰쳐나온 것은 참으로 현명하고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설교가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어떤 경우든지 해석하고 비판하는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설교로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잃는데서 그치지 아니하고 설교로서의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기독교 모 저널이 금년 8월 1일부터 8일까지 서울, 경기 지역 크리스천을 대상으로 설교에 대한 의식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총 2,750명이 설문에 대답했는데 남성 1,480명(53.8%), 여성 1,270명(46.2%)이 참여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① 지난 주 주일 예배 설교 일부분만 기억한다가 53.3%
② 주일 예배 설교에 은혜와 감동을 받았다가 73.4%
③ 주일 예배 설교가 삶에 적용이 안 된다가 40.3%
④ 교회를 선택할 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설교가 91%였습니다.
⑤ 설교사역을 돕기 위해 당신이 한 노력은 없다가 41.6%였습니다.
⑥ 설교를 듣고 이웃에게 전한 경험이 있느냐 에는 4명 중 1명이 경험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이 조사에서 성도들에게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한 것은 기쁨이자 한편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설교가 삶에 적용여부가 중요합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 모두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설교자에 대한 설교 준비 과정에서부터의 시간과 환경적 배려는 필수적입니다. 교회의 모든 일을 설교자에게 부담을 주지 아니하도록 최선의 조치를 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설교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경청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목사가 전하는 복음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대하는 영적인 성숙도가 필요합니다.
(강 구 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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