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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면 (요 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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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 사람들에게 따돌림이나 비웃음을 받던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일은
돌이켜 보면 정말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때 예수님을 보러 뽕나무 위에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만일 예수님이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그 말씀이 없으셨더라면...
그래서 삭개오가 예수님을 그날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삭개오의 생(生)은... 비록 돈은 좀 풍족하게 가지고 넉넉하게 살았을른지는 몰라도
그의 삶의 질은 형편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삭개오의 생애에 있어서 그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그의 삶의 분수령을 이룬 최대(最大)의 사건이요.. 최고(最高)의 사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사건들이 그러한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오늘 말씀을 나누려는 요한복음 20장과 그 다음장인 21장에서도
삭개오 못지않게 실의와 좌절, 불안과 공포,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다신 사신 주님을 만나게 되어
그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변화(變化)가 일어났으며
그들의 신앙 속에는 어떤 회복(回復)이 일어났으며
그들의 생애 위에는 어떤 축복(祝福)이 임하게 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데
오늘은 그 내용들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살펴볼 것은 사람들이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은 두려움이 변하여 평강이 되었고
의심이 변하여 확신이 되는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例)를 제자들과 도마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일찍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과 함께 사역을 했던 제자들도
그들 마음 속에는 유대인들을 향한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문들을 다 꼭꼭 닫고는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20장 19절 말씀입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혹자는 왜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들을 닫고 있느냐 하고 핀잔하겠지만
사실 그것이 인간의 현실이요 한계였기에 그런 것임을 우리는 부인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들이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순간 그 믿음 보다 두려움이 더 커져서 지금 문들을 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다시 사신 주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요한복음 20:19).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것은 선언이었습니다!!

순간.. 제자들 마음 속에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얼마전까지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다시 사신 주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렇게 말씀하신 직후부터 그들 마음 속에는 평강이 물밀듯 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평강은 주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절 후반부를 보면 제자들의 모습에 기쁨이 있는 것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조금 전까지 그들에게서는 기쁨이란 것은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이라는 것이 너무나 커서
그외 모든 것은 다 그 두려움 밑에 깔려 버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사신 주님께서 나타나시고 그들을 만나주시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렇게 선포해주심으로서
그들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평강으로 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평강이 기쁨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절 이하를 보면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난 도마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도마는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의심으로 가득차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의심이라기 보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자기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서야 믿겠다는
실증주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요한복음 20:25)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어떤 사람들은 이 도마를 보고 온갖 수식어를 다 동원하여 표현하기도 합니다.

의심 많은 도마, 회의주의자 도마, 불신주의자 도마, 전형적인 현대인의 표상 도마...

여하튼 좋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수식어를 지닌 도마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으며... 혹 그가 우리 자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도마는 제자들과 함께 모여있다가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은 지난 번과 똑 같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그리고는 도마를 향하여 보시면서...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아마 도마는 쥐구멍이라도 있었으면 그리로 머리라도 디 밀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도마에게 핀잔을 주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난 순간...
비록 부끄러운 모습이긴 하지만 그동안 지녀왔던 모든 의심이 다 사라지고 맙니다!!

그리고는 그 마음 속에 확신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요한복음 20:28).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것을 보면 비록 한때 예수님과 함께 훌륭하게 사역을 감당했던 제자들이
두려움과 의심으로 가득차게 되었지만
바로 그때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
두려움은 평강으로, 의심은 확신으로 변하게 된 것을 보면서
우리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제자들처럼 결정적인 순간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때 모든 문제는 다 해결 될 줄 믿습니다.


다음 둘째로 살펴볼 것은 사람들이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의 신앙 속에는 어떤 회복이 일어났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은
주님 향한 믿음의 회복이 일어났고
주님 향한 소망의 회복이 일어났으며
주님 향한 사랑의 회복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例)를 도마와 제자들과 베드로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도마를 향하여 의심많은 도마, 회의주의자 도마 이렇게 말하지만
그가 본래 믿음이 없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아마 12제자로서 사역을 애당초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도마뿐만이 아닙니다. 나머지 12제자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나 그 질이 서로 달랐을뿐이지... 믿음은 다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때 도마의 믿음은 지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믿음이 아니었을까 추정합니다.
그리고 그 지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서
허무하게 무너지는듯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지적인 측면이 강조된 믿음이 거의 다 무너져 내렸는가 싶은 바로 그 순간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게 됨으로서 주님 향한 믿음의 회복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탄성에 가까운 그의 고백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My Lord and... my God!!

그런가 하면 다른 모든 제자들은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남으로
주님을 향한 소망이 회복되었습니다.

사실 모든 제자들이 가졌던 소망이 예수님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에 대한 소망은 다분히 정치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중에 그들의 잘못된 소망을 교정시켜 주십니다.

  내가 왕이 되면 너희가 한 자리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하는 것이니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제자들은 알아들었는지 못알아들었는지 계속 따라 다닙니다.
그러다가 십자가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터지고 나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소망이 부서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들의 잘못된 소망을 교정(矯正)시켜 주시긴 하였지만
여하튼 제자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소망이 부서졌기 때문에 다 흩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사신 주님이 그들을 만나 주시자 마자
그들 속에 주님 향한 소망의 회복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그 소망이 그전에 품고 있었던 정치적인 소망이 아닌 완전히 영적인 소망으로
회복되었는데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20:21-23).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대단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들에게 진정 소망의 말씀이었고 소망 회복에 대한 선언이었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면 이렇게
이전의 믿음도 회복되고 이전의 소망도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이전의 사랑도 다시 회복되었는데
그것은 요한복음 21장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모습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베드로 그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제자였습니다.
그 마음 그 사랑은 그 어떤 제자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뜨거웠고 간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성질이 급해서 그런지 문제 발언도 종종 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실수를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 받으실 때 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마태복음 26:70)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태복음 26:72)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태복음 26:74) 

소위 수제자 베드로라는 사람이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함으로
그 즉시 그는 수제자 위치에서 추락하고 맙니다.

스스로도 추락함을 느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를 수제자로 인정하질 못합니다.

수제자란 스승이 고생할 때 같이 고생하는 것이 수제자이고
그를 변호해야 할 땐 어떤 어려움을 무릎쓰고라도 변호해야하는 것이 수제자이지
좋을 때는 수제자 노릇하고
어렵다 싶으면 자라 모가지 쑥 들어가듯 고개를 쑥 집어넣고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모른다 모른다 정말 모른다 하면서
그동안 모셨던 스승을 한순간 배신하고 저주하며 맹세까지 한 그였기에...
스스로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를 이젠 수제자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그렇게 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 그를 부르실 때 베드로라 부르시지 않습니다.

그의 옛 이름... 제자로 불리움 받기 전의 옛날의 그 이름으로 그를 부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그의 옛 이름을 3번씩이나 부르시면서
그의 옛 사랑을 일깨우고 점점 회복시켜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비록 과거 한때 크게 잘못했고
그래서 반석이라는 그 좋은 이름인 베드로도 다 날라갔고
수제자의 위치도 다 날라갔지만
다시 사신 주님께서 그를 만나주심으로 그의 주님 향한 사랑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요한복음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처럼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마다 변화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마리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도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남으로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고
의심이 변하여 확신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살펴볼 것은 사람들이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의 생애 위에는 어떤 축복(祝福)이 임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은
죄악의 세력을 이기는 축복이 임하게 되었고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축복이 임하게 되었으며
영생의 복락을 누리는 축복이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18)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린도전서 15:55-58).

무슨 말씀입니까?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면 죄악의 세력을 이기는 축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면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축복이 임하게 되는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고린도전서 15:12-19).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면 영생의 복락을 누리는 가장 좋은 축복도 임하게 되는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2-16).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삶이 힘드십니까?... 신앙생활이 예전같지 않으십니까?...
제자들처럼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까?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신앙생활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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