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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위문 (요 11: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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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역에서 가장 기억되는 심방이 있었습니다.

첫목회지 조그마한 시골교회에서 일이었습니다. 한교인이 40여명 되는 면소재지에 위치한 시골교회엿는데 어느날 어떤 여자성도님 한분이 등록을 하엿습니다.등록한 그 다음날부터 새벽기도나오고 주일빠지지 않고 교회생활을 아주 잘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그렇게 교회를 어느날 등록하게 된 이유가 바람둥이 남편때문이었습니다. 산판 일을 하는 남편은 외지에 가서 오랜 기간 일을 하면서 자꾸 바람을 피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께서 새벽마다 주일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항상 그문제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어느날 주일 그분 남편이 함께 교회를 나왓습니다. 그래서 가정에 심방을 가게 되었습니다. 전화로 심방약속을 하고 저와 장로님과 집사람이 그 집을 방문했는데 집안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방안에 들어갔는데 저를 방 아랫목으로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50이 넘으신 어르신들이 갓 30이 넘은 애송이 전도사를 향해서 갑자기 두분이서 큰 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너무 당황해서 “이러시면 안됩니다”하면서 제지를 하고 말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하는 말이 “우리 평생에 처음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왔는데 어떻게 큰 절을 안할 수 잇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두분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후에 제가 그 교회를 떠나고 나서도 항상 그분의 소식을 묻곤하는데 어린아이같이 신앙생활을 너무 잘하시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항상 기뻤습니다.

요즘은 과거같이 그렇게 교회에서 가정에 심방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전부 맞벌이로 바쁘고 자기 사생활을 쉽게 개방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특별한 경우나 새가족이나 요청이 없으면 과거처럼 그렇게 심방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심방이 필요한 상황을 만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가장 심방이 필요할 때가 언제입니까? 고통의 순간을 경험할때입니다. 그때 인간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을때 오직 위로부터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는 목회자의 심방을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죽은 나사로의 가정에 심방으로 위문을 오신 우리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죽은지 4일이 된 그 가정에서 우리 주님은 이 가정에서 어떻게 함께 하셨습니까? 주님이 심방을 통하여 이 가정에 소망이 회복됩니다. 놀라운 생명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고통의 가정을 심방으로 위문하셨습니까?

1. 예수님은 믿음을 갖으라고 위문하십니다.

오빠 나사로가 죽은지 4일이 된 마리아와 마르다 가정에 찾아오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고 하십니다.

지금 사랑하는 오빠를 먼저 떠나보내고 마르다는 슬퍼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버니도 없이 세오누이가 함께 살았는데 그 사랑하는 오빠가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할 때 얼마나 상실감이 컸을까요?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이 좀 빨리 오지 않은 것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님에게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주여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빠가 이렇게 죽지 아니하였겠습니다”라고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오빠가 병으로 위급하여 주님께 사람을 보내었는데도 주님이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일종의 원망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마르다는 주님께 소망을 갖습니다.“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하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합니다. 죽음의 사망에서 주님을 맞이한 마르다는 소망 중에 주님의 심방을 받았습니다.

죽음을 맞이하였고 절망과 슬픔의 이 가정에 우리 주님이 주신 말씀은 “믿음”의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하십니다.
먼저 주님은 마르다에게 자신을 부활로 믿으라고 하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믿으라고 하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먼저 예수님을 나에게 부활을 주시는 분,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혹시 내가 지금 죽음의 위기가 있습니까? 혹시 우리 가정이 지금 질병 가운데서 고생하고 있습니까? 우리 삶에 두려움과 슬픔으로 힘들어하고 있습니까? 먼저 심령에 가정에 우리 주님을 믿음으로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 인생에 우리 가정에 영접하게 될때 우리에게 놀라운 소망이 있습니다.믿음이 없으면 소망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소망의 불이 껴집니다.

기독교는 죽음 저 건너편에 존재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면서 나사로를 포함하여 3명을 살려주셧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소년 소녀의 부활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청년도 부활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년세대에 해당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모든 세대가 주 안에사 장차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3명을 살리심으로 그것은 우연이 아니고 반드시 존재하는 사실의 일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은 우리가 부활할 때 영광의 부활을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전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부활할때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 소망을 갖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화 중에 잊을 수 없는 영화가 바로 쿠오바디스입니다.

특히 그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잊을 수 없습니다. 로마의 원형경기장에 굶주린 사자떼를 풀어놓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그 경기장에 몰아넣습니다. 네로황제와 그 신하들은 사자 앞에서 두려움에 떨면서 그들이 비참하게 죽어갈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결국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포기할 것으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자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손을 자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도망가거나 비굴하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찬송을 부를 때 그 경기장에 있던 사람들은 오히려 기독교에 놀라움 매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죽어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찬송을 부르고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힘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주님같이 부활할 것을 믿는 믿음은 죽음너머의 소망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죽음 이편에도 존재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요구합니까?
믿음을 요구합니다. 26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 하십니다.그때 마르다는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24절에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습니다”27절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마르다에게 주님의 존재는 의미가 없습니다.장차 부활의 역사가 있을지 몰라도 현재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신앙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역사하심을 믿지 못하고 절망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냥 내세에 일어날 모든 것을 믿기만 하는 미래주의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은 지금 현재에도 구체적인 능력을 맛보고 장래에고 맛보는 살아있는 종교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적용을 못하는 경우가 우리들 속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100% 정확하게 주님이 누구신지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없이 불신할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역사하시는 살아계시는 주님이십니다.지금 절망이 지배하는 삶의 자리에서,지금 슬픔과 탄식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부활이신 주님께서는 지금 나의 삶 속에서 역사하셔서 나에게 소망을 주시고 나에게 기쁨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언제나 우리는 소망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서로의 삶도 아무리 힘이 들고 어려워도 서로에게 소망의 말씀을 주시고 서로의 삶에 문안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공감하면서 위문하십니다.

나사로의 무덤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자세를 우리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5절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여기 눈물을 흘리는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음 앞에 우셧습니다. 물론 살아나겠지만 그 상황에서 슬퍼하는 오누이들과 사람들을 보면서 슬픔을 느낀 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시고 느끼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보면 굉장히 감정이 풍성하신 분이심을 우리가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감정은 인간의 감정이면서도 신정을 품고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감정을 어떻게 갖아야 하는가?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그 감정처리를 어떻게 하셨는가를 주목하여 보십시오.

33절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라고 합니다.주님께서 마리아가 울고 마리아의 집에 위문을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라고 합니다. 38절에서도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라고 합니다.

여기 “통분”이라는 단어는 “분노로 고통스러워하다”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죽음으로 인해서 울고 있는 사랑스런 마리아의 모습과 많은 우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보게 됩니다. 예수님 앞에서 울었던 마리아의 눈물과 유대인들의 눈물은 그냥 울음이 아니고 원어의 의미를 보면 “울부짖어 우는 울음”이었습니다. 죽은 나사로 때문에 슬피 부르짖어 우는 것이엇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모습을 보고 마음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시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 주님은 무엇 때문에 분노하시고 무엇 때문에 마음에 민망해하십니까?
마리아를 비롯해서 많은 유대인들이 저토록 울고 슬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죽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죽음이 인간에게 찾아왔습니까? 그것은 바로 죄때문이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나사로의 무덤을 향해 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투쟁을 준비하는 투사”로 표현합니다. 정의의 칼을 빼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위해서 의연하게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투사같이 우리 주님은 지금 죽음과 정면 승부를 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사망이 찾아오고 그 사망 중에 탄식하고 절망스러워 하는 인생입니다. 주님은 그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죄에 대한 의연한 정의감과 그 모습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민망히 여기는 심정을 갖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죽은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눈물 흘리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의로운 신정을 갖고 죽음과 당당히 맞써 싸우는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보면 강하신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그분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죄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는 안따까운 인간의 불쌍한 운명에 대한 연민의 눈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땅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죄 때문에 때때로 실패합니다. 모든 세상이 죄로 가득차서 그 죄로 인하여 서로 싸우고 죽이고 죽는 고통의 현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면서 지금 그 고통 가운데서 힘들어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동정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자로되 죄는 없으니시라”고 합니다.

우리 연약함을 우리 주님이 동정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그 주님의 동정을 받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죄에 실패하여 넘어질때 우리 주님이 어떻게 바라보실 것같습니까? 죄에 대해서 분노하시면서 우리를 넘어뜨리는 악한 마귀에 대해서 분노하면서 그러나 그 죄로 인해서 실패한 자기 백성을 바라보면서 눈물흘리시는 줄 믿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땅에서 삶을 살아갈 때 가져야 할 감정의 자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해서 마귀에 대해서는 의로운 감정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일지라도 죄를 지었을때에는 죄에 대해서는 “아니요” 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일지라도 죄를 지었을때에는 “너 그러면 안돼”라고 우리는 죄를 단호하게 물리칠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같이 죄를 지을 수 잇는 위험이 많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니니아 삽비라 부부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나비아가 자기 소유를 팔아 사도들 앞에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소유를 막상 팔고 돈을 받고 낫을때 마음에 변심했습니다. 그 돈이 아까운 마음이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 중에 ‘처음 주신 마음은 하나님 마음, 두 번째 마음은 사람 마음, 세 번째 마음은 마귀가 준 마음“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감동을 주는대로 하는 것이 대개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경우가 맞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내 삽비라도 알았습니다. 그때 아내가 ’여보 당신 그러면 안되요‘라고 말을 햇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이 부부는 알고도 그 죄를 함께 짓습니다. 결구 성령님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함께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왜 우리는 함께 죄에 빠지는 것입니까? 인정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같이 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자녀들이 죄에 빠지는 것을 그냥 허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습니까?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분노하십니다. 의로운 감정으로 그 죄와 맞서 싸우십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죄를 미워하시면서 죄로 인해서 실패한 그 사람과 그 상황에 철저하게 동정하시면서 공감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즘을 흔히 감성시대라고 합니다.
요즘 시대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것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종종 감정표현에 대해서 극단적인 입장을 갖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가령 남자는 눈물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경건하다는 의미를 “얌전하고 조용한 것”으로 너무 극단적으로 이해하여서 과거에 한때 교회에서는 박수를 치거나 춤을 추거나 하는 것을 금기시 여겼던 것을 보게 됩니다.

저 자신도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 부분에서 굉장히 어색하고 힘들어서 지금도 사실은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 속에서 좀 내성적인 분들 자기 생각을 잘 말씀하지 못하시는 분들을 공감합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을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목회를 하면서 이러 부분들이 많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저는 이런 부분에서 부족함을 알고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교회에서 본인이 죄로 인한 실패와 연약함 속에서 인생의 실패 속에서 고통스러워하여 눈물흘리는 사람을 만날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삶에 좋은 일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을 만날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롬12:15에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는 것입니다.우리들에게 성경은 “공감할 줄 알라”고 하십니다. 우리주님처럼 함께 그 감정을 공유하여서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누가 공감할 수 있습니까?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는 사람은 바로 주님의 마음을 갖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마음은 죄는 정말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그러나 자기 사람들은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의 분이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공감의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목장에서 서로 서로 공감의 위문이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 속에서 서로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면서 마음을 나누는 아름다운 만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3. 예수님은 기도로 위문하십니다.

이제 주님께서 죽은지 4일이 지난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서 어떻게 직면하십니까?
주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기도하기에 앞서 먼저 인간 편에서 2가지 준비와 행동을 믿음으로 결단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첫째. 돌을 옮겨 놓으라 하셨습니다.결단을 요구하십니다.
39절에 예수께서 돌을 옳겨 놓으라
유대인의 무덤은 돌을 파서 무덤을 만들고 그 입구를 돌로 막아둡니다.이미 나사로는 죽은 지 4일이 지났고 완전히 장사가 끝난 뒤였습니다.이 무덤 앞에 오셔서 주님은 ‘돌을 옳겨놓으라’고 하십니다.

둘째. 믿으라고 하십니다.
4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왜 예수님이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무덤 앞에서 우리 주님은 기도하기에 앞서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을 미리 잠재우시는 것을 봅니다. 무덤 문을 열게 함으로써 그 안에서 썩는 냄새가 나타나는 것은 빈무덤이 아니라 시체가 있는 무덤인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나올 수 있는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시는 것은 만약 믿지 않고 기적과 이적이 나타나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믿음이 하나님의 영광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뒤에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41절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절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 예수님께서 무덤 앞에서 감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아직 죽은 사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단지 문만 열렸습니다.그런데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무덤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항상 내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여기 주님은 그 분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시며,  그를 구원하기를 원하시며, 그래서 자신을 보내셨다는 것을 압니다. 이 기적과 이적을 통하여 그 하나님의 원하시는 역사들이 이루어 질 것임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감사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감사하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감사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내 말을 들으시고 내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지금 여기에서 살아계신 능력의 아버지로 나를 통해서 일을 하시는 것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낙망하고 힘들어하는 가정과 성도들과 교제할 때 서로 믿음으로 기도하시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때로 인간으로는 도움을 줄 수 없는 문제일지라도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대의 특권 중에 하나가 기도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기도하면 크고 비밀한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기도하면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마치는 말 )  내삶에 순간마다 찾아오셔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위로하시는 주님의 위문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상처받고 고통중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서로 위문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속에서 주님의 위로하심으로 삶에 위로를 많이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박 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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