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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또 한번의 새로운 다짐 (사 30:18~21, 막 5:16~ 20, 엡 4: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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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말씀: 이사야 30:18 ~ 21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며, 너희를 불쌍히 여기시려고 일어나신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주님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은 복되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온 백성아, 이제 너희는 울 일이 없을 것이다. 네가 살려 달라고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틀림없이 은혜를 베푸실 것이니, 들으시는 대로 너에게 응답하실 것이다. 비록 주님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셔도, 다시는 너의 스승들을 숨기지 않으실 것이니, 네가 너의 스승들을 직접 뵐 것이다. 네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치우치려 하면, 너의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 길로 가거라' 하는 소리가 너의 귀에 들릴 것이다.  아멘.

서신서의 말씀: 에베소서 4:21 ~ 24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해서 듣고, 또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아멘.

복음서의 말씀: 마가복음서 5:16~ 20
  처음부터 이 일을 본 사람들은,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돼지 떼에게 일어난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 자기네 지역을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집으로 가서, 가족에게, 주님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너를 불쌍히 여겨 주신 일을 이야기하여라." 그는 떠나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데가볼리에 전파하였다. 그리하니 사람들이 다 놀랐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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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올해 성령강림 후 주일 중에서 마지막 주일입니다. 9월의 첫 주일인 다음주부터는 새롭게 창조절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교회에는 절기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교회력에 따라서 계속 신앙생활을 해 오셨기 때문에 아마도 그 리듬을 감지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교회 절기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드린 후에 오늘의 설교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세계의 교회들은 교회력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점점 더 중요시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교회력은 그리스도교 예배 전통의 한 유산인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한 해의 계절과 시기에 따라서 구분합니다. 그리하여 예배드리는 사람들에게 각 시대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구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교회력의 시작은 성탄절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부활절 예배를 되풀이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주일 예배야 말로 전체 교회력의 기반으로서, 이 기초위에 교회력의 두 기둥인 부활절과 성탄절이 가미된 것입니다.

부활절과 성탄절은 교회들마다 다르게 발전되어오다가 뒤에 수렴되어서 하나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부활절 전후에 있는 사순절, 오순절, 성령강림절은 유대교에서 온 것이고, 성탄절 전후의 교회 절기들은 로마 교회에서 온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로마의 토착신앙은 태양숭배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태양숭배의 신앙을 기독교로 토착화시키면서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우리의 태양이시고 참 빛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며, 이방의 신들을 굴복시키셨다고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를 지정해서 생명의 날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대교의 전통과 로마 교회의 전통이 합류해서 현재 교회력의 부활절 절기, 성탄절 절기가 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지켜오던 서방 교회의 축제력은 탄생, 수난, 부활, 승천 등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신앙대로 살펴보면 성부에 대한 계절도 있고 성자에 대한 계절도 있고 성령에 대한 계절도 있어야 할 텐데 카톨릭 교회의 교회력에는 성자와 성령의 계절은 있으나 성부의 계절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교회에서는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9월부터 11월 말까지를 삼위일체 절기라고 해서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림절에서 시작되는 축제력과 달리 이 삼위일체력에서는 창조절을 시작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력 갱신운동은 스코틀랜드 장로교에서 시작이 되어서 캐나다 연합교회에서 공인을 하게 되었고, 1970년대부터는 우리 교단도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창조절의 역사적인 근거를 찾아보자면, 중세 비잔틴 교회에서는 9월 1일을 창조절로 지킨 흔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잔틴이 로마한테 망하면서 비잔틴 전승의 창조절은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동방 정교회의 일부에서는 9월을 창조의 절기로 지켜가고 있습니다. 또한 놀랍게도 오늘의 서방세계에서는 비잔틴 전승을 이어받아서 9월을 첫 학기의 시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공산권에서도 서방세계의 유산을 받아들여서 9월부터 새로운 학기의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각 주일마다 지정해놓은 성서본문과 성서일과가 있습니다. 3년을 한 주기로 하고 각 주일이 가지고 있는 절기별 의미를 고려해서 그에 알맞은 성경구절을 배열해 놓은 것입니다. 이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기억하게 할 뿐만이 아니라 성경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배열되어 있습니다. 설교를 강조하는 곳에서는 목사님들께서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 말씀을 전하고 계시며, 설교가 생략된 로마교회나 동방교회 일부에서는 이 성경본문만 읽고나서 바로 미사 성만찬을 드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구약성서, 사도서신, 복음서의 순서로 성경을 읽어야 할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한 번도 설명을 드린 적이 없기 때문에 잘 모르실 것입니다. 이제 그 이유를 알고 읽으셨으면 합니다. 회당 예배에서 이제 초대교회 예배가 되었을 때입니다. 초대교회 예배를 드리는데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던 대로 성경을 읽습니다. 그런데 성서라고는 구약성서뿐이었기 때문에 회당에서 읽던 대로 5경과 예언서만 읽습니다. 몇 십 년 동안 그렇게 합니다.

그러던 중에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인데 왜 유대교와 똑같이 5경과 예언서만 읽습니까. 이래서 되겠습니까. 그래서 존경하는 사도들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들의 편지가 신약성서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다가 또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인데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이야기, 예수님의 비유, 예수님의 이적, 이런 것은 왜 읽지 않습니까. 그래서 초대교회 때 여기저기에서 어록이 생기게 됩니다. 마가공동체에서도, 마태공동체에서도, 요한의 주변에도 어록들이 생기게 되고 그것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어록들이 함께 짜여져서 복음서가 된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초대교회 예배의 성서 봉독시간에 구약을 먼저 읽었고, 후에 사도들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복음서가 완성이 되어서 복음서를 읽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발생사의 전통을 우리가 지켜왔기 때문에 현재의 성경봉독시간에 구약성서, 사도서신, 복음서를 읽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서 일과는 누가 작성했습니까? 오래 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는 어떤 질서가 있어서 성경을 제대로 읽었는데 바벨론 포로에 잡혀가고 나서는 모든 질서가 흐트러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바벨론에 포로로 있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어른들께 우리가 성경을 체계있게 읽도록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그것이 구약의 성서 일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초대교회 때에는 사도서신이나 복음서도 체계있게 구분해서 읽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 지방, 저 지방에서 성서 일과가 만들어지다가 나중에 합쳐져서 2000년 동안 그런 유산이 축적되어 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는 로마의 바티칸 공의회에서 추기경들이 3년 동안 로마 교회를 스스로 개혁하게 됩니다. 이 개혁운동을 하면서, 주일성서 일과도 개혁하기로 결정하고 세계의 유명한 성서 신학자들을 수합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구교와 신교를 통틀어서 세계의 성서 신학자들이 함께 모여 성서 일과를 다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성서 일과가 천주교 것이다, 장로교 것이다, 감리교 것이다 이렇게 주장할 수 없을 만큼 유산을 함께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령 강림 후 마지막 주일의 성서 일과는 삼위일체 교회력의 본문들입니다. 제가 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 전통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절기의 전환점에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30장에 귀를 기울여 보겠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과 그 앞뒤에 쓰여 있는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양자택일을 강권하고 계십니다.

8절에서는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은 너희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18절 이하에서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다. 비록 주님께서 환난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셔도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기만 하면 너의 스승들을 직접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스승의 본래 의미는 예언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절을 성령강림절 말씀으로 배열한 배경으로 보아서는 성령께서 그 뜻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절의 말씀입니다. 네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치우치면, 너희 뒤에서 이것이 바른 길이니 이 길로 가거라 하는 소리가 너의 귀에서 들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우리 설교자들을 통해서 바른길을 알려주신다는 메시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정도를 걸으라. 이 말은 사는 동안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마치 공자의 중용에 표현된 인생의 진리처럼 들리는데, 이 말씀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배어져있는 기독교 신앙의 진리입니다. 바른길로 가라. 그렇게 실천하면서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선악으로 딱 구분되는 그런 세상이 아니고, 우리 인간 스스로도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힌 존재입니다. 선악으로 구분된다고 하면 선을 선택하고 악은 배제하면 될 것인데 사사건건 선악이 그렇게 구분되지만은 않습니다. 이런 삶의 현실에서 어떻게 바른 길을 선택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신학 가운데 기독교 윤리학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가르치는 학문입니다. 여기서는 세상의 길을 선택할 때 보다 나은 길(better way)을 선택하도록 합니다. 둘 다 악이지만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경우에는 덜 악한(less evil) 길을 선택하도록 합니다. 우리들의 처한 상황 속에서 옳고 그른 길을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요즘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라는 보수적인 단체에서는 사형제도를 살려야 된다고 들고 일어나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 밖에도 황우석 박사의 생명공학의 이야기, 이북과 가까워지는 관계 이야기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에 확실한 결론이 있습니까? 이렇게 여론들이 분분한 세상속에서 어떻게 이 구약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스승의 목소리에 기울이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서는 말씀합니다. 만약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치우치려고 하면 너의 뒤에서 이것이 바른 길이니 이 길로 가거라 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바른 길로 가거라. 사회가 복잡하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신앙적인 사고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냥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앙의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서신서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의 본문입니다. 본문의 앞뒤를 읽어보면, 옛 사람과 새사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대조하여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무지와 완고함 때문에 지각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들은 수치의 감각을 잃고 자기들의 몸을 방탕에 내맡기며 탐욕에 빠져서 더러운 일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내용이 오늘의 본문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에 관해서 듣고, 가르침을 받았으면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사람을 입으십시오. 어떻게 우리 마음에 그렇게 선한 영이 생깁니까. 성령의 도움, 신앙의 도움, 하나님의 은혜로 생기게 됩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옛 사람, 허망한 생각과 무지와 완고함과 수치와 방탕과 탐욕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와 가르침과 마음의 영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에 따른 의로움과 거룩함을 입으십시오.

옷을 갈아입는 계절입니다. 우리는 여름옷을 벗어서 세탁소에 맡기고 가을 옷을 찾아다가 갈아입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계절에, 옷뿐만이 아니라 속사람까지도 바꿀 수 있는 커다란 전환을 본문에서 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어떤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덥던 여름의 열기가 가시고 이제 아침저녁으로 시원한 바람이 이제 불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계절의 변화처럼 우리 속사람도 변화를 입으라고 하는 성령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립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서, 마가복음 5장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그 때 마침 그곳 산기슭에 풀어놓고 기르는 수많은 돼지들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귀신들이 예수님께 간청을 합니다. 우리들을 돼지 떼에게로 보내셔서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이를 허락하시자 악한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고, 성경 본문에 따르면 거의 2천 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비탈을 내려달려 바다에 빠져죽었습니다. 그러자 돼지를 치던 사람들은 놀라서 읍내와 시골에 달려가 이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때 몰려온 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이 정신이 들어서 멀쩡하게 새 옷을 입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 곳을 떠나달라고 말합니다. 그 간청에 따라서 뱃머리를 돌려서 갈릴리로 돌아가려고 하시는데 귀신들렸다가 고침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나도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거절하십니다. 안된다. 너는 너의 가족에게 돌아가라.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져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항상 병을 고치고 나면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보여주되 소문은 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에게도 그렇게 분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 말을 듣지 않고 온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소문을 냅니다. 이 지방 사람들이 그가 귀신들려서 미쳤었다는 것을 다 알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은 이제 내가 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나를 만들어준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데려가시는 일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스스로 예수를 전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성령 강림절에 이 구절을 배열한 것을 보았을 때, 아마도 견딜 수 없는 성령의 충동, 성령의 역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부를 거역했지만 뜻 깊은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은혜를 받고 복 받은 채로 평범하게 살아갑니다. 가끔씩은 그 평범함을 깨고 파격적인 방법으로 받은 은혜를 보답하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그런 충동을 느끼는 때가 없으신지요. 계절이 변화하는 이 시기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새로운 용기를 내 보라고 성령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다음주부터는 창조절이 시작됩니다. 이제 빨간 옷도 초록색으로 바뀔 것이고, 여름대신 가을이 올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이제 새로운 학기가 시작이 될 것이며 교회에서도 새로운 계절 행사를 맞이할 것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도 새로운 다짐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지난 연말연시에도 다짐을 했고 크리스마스에도 다짐을 했습니다. 또한 매달 성만찬에 참여하면서 우리 나름대로 인생의 다짐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계절에 한 번 더 새로운 다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바른길을 선택해야겠다. 새로운 사람으로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그리고 파격적인 신앙의 용기를 한 번 내어 보아야겠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한 번 더 새로운 다짐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 말씀에 응답하면서 새 계절을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박 근 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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