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론의 축제를 끝내자 (출 32:30~32, 갈 5:13~15, 눅 4:18~21)

  • 잡초 잡초
  • 375
  • 0

첨부 1


구약의 말씀: 출애굽기 32:30 ~ 32
  이튿날 모세는 백성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크나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주님께 올라가서, 당신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빌겠습니다." 모세가 주님께로 돌아가서 아뢰었다. "슬픕니다. 이 백성이 금으로 신상을 만듦으로써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아멘.

서신서의 말씀: 갈라디아서 5:13 ~ 15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아멘.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4:18 ~ 21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아멘.

아마도 젊으신 분들은 저처럼 70이 넘은 분들에 비해서 60년 전의 광복절을 잘 실감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저는 일제 시대에 감옥에 있다가 나와서 산 속에 숨어있느라 해방된 줄을 몰랐습니다.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의 그 기쁨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야훼께서 시온의 포로들을 풀어주시던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꿈이던가 생시던가. 우리의 입에서는 함박과 같은 웃음이 터져나왔고 흥겨운 노fot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도다. 바로 그러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쁜 날을 경험하고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국토가 북쪽은 소련에 의해서 점령되고 남쪽은 미국에 의해서 점령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의 극렬한 대치상태가 한반도에서 이루어졌다 하는 사실을 접하자 우리의 기쁨은 분노와 슬픔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6.25 전쟁이라는 그 무서운 비극을 겪었으며 1953년도에 겨우 휴전 협정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52년 동안 휴전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북쪽에서는 하나의 큰 감옥과 같은 현실 속에서 수많은 국민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돈은 모조리 긁어서 핵무기를 만들고 미사일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남쪽은 정치적으로는 자유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경제적으로서는 시장 경제를 받아들여서 전 세계에서 12번째로 가는 부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직시할 때에는 오늘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론의 축제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서 자유의 땅 광야까지 들어왔습니다. 여기에서 가나안을 향한 행진을 위해 모세는 산 위에 올라가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그 동안에 산 아래에 있는 국민들은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 앞에서 춤을 추는 축제를 벌였습니다. 이것이 아론의 축제였습니다. 이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노하셔서 심판을 내려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 앞에 서서 중보의 기도를 올립니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하던지 저 축제를 끝내게 하여 가나안으로 인도하겠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저들을 용서할 수 없다면, 저의 이름을 당신의 기록에서 없애 주십시오. 그리하여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아론의 축제를 끝내게 되고 다시 가나안을 향하여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여러 가지 모양으로 타락하고 어려운 상황들을 맞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나사렛 회당에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그는 나사렛 회당의 단 위에 올라가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 부분이 바로 구약성경 이사야서 61장 1절에서 3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해방의 역사를 읽습니다.

그런데 7,80년대 우리나라의 해방 신학자들과 민중 신학자들, 그리고 소위 기독교 운동권에서는 이 장면을 잘못 인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 61장 1절에서 3절 말씀을 읽었지만 있는 그대로 읽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부분을 한 번 대조해서 읽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61장 1절에서 3절 말씀에서 “찢긴 마음을 싸매주신다”는 이야기는 빼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제 보복해서 벌하신다”는 이야기 또한 빼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부분을 빼 버렸다 하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주신 해방은 아론의 축제를 끝내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른 점이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이 부분을 읽고 난 다음에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 속에 이 말씀은 성취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유월절 날에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심으로써 성취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광복절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습니다. 바로 그의 죽음은 모세에 의해서 아론의 축제를 끝내고 가나안으로 들어왔던 해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해방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자유케 해 주시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자유케 해 주셨습니까? 로마제국으로부터 정치적 자유를 주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자유는 정치적인 자유보다 더 근원적인 자유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자유를 주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이 자유는 어떤 욕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사용하게 된다면 잃어버리게 되는 자유이다. 오늘 읽은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 15절 말씀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트만이라는 사람은, 욕정을 만족시키는 삶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이 그 사랑을 이웃을 위하여 실천하지 못하고 사는 삶이 바로 욕정에 사로잡힌 삶이다.

오늘 광복 60년을 맞이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이번 광복절에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은 범죄를 한 사람들 중에서 650만 명을 사면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정부에서는 422만 명을 사면합니다. 그런데 이는 4번째의 사면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제까지 사면한 사람은 대체 몇 명이며, 우리 국민들 가운데서 범죄하지 않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 것일까요.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이렇게 발전하고 부유했다고 하지만 실상은 어떻습니까. 그저께 발표된 바에 의하면 밥을 하루에 한 두 끼도 먹을 수 없을만한 빈곤자가 45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다가 밥을 먹기는 겨우 먹지만 상대적인 빈곤 때문에 좌절하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까지 세어보게 된다면 정말 말할 수 없이 많은 숫자가 산출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벌어지고 있는 세계 12번째로 가는 부유한 나라의 축제를 보십시오. 이는 극소수의 기업주와 부유층에 의해서 벌여지고 있는 아론의 축제이지, 국민 전체의 축제가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국민들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자포자기하는 모습이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앞에서 당장 우리가 선두에 서서 이런 상황을 다 바꿔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보자고 나서기에는 나와 우리 자신이 너무 무력합니다. 그럴 수 있을 만한 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당신들 가운데에서 이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나라와 세계의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의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세수하면서 거울 속의 얼굴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60년 전에 이 자리에서 처음 예배를 인도하던 때와는 참 많이 다른 얼굴입니다. 이렇게 늙어가는 저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아마 점점 더 늙다가 죽을 것이고, 무덤에 들어가서 썩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늙어가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나는 행복하다고 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거울 속에서 늙어가는 제 얼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저라는 인간 속에 와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믿습니다. 나이 많은 사도바울도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날이 갈수록 늙어가지만, 이렇게 늙어가는 내 자신 속에는 날로 새로워지는 그리스도가 와 계신다. 그러므로 나는 나날이 새로워진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번에는 우리 이웃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인간과 인간의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느끼곤 합니다. 문학가인 사르트르는 말하기를,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 속에서 나는 지옥을 경험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 눈길 속에서 지옥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길을 볼 수 있습니다. 나를 보는 예수님의 눈길을 느끼고 그것을 믿을 때에 우리는 사람간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말의 진정한 뜻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을 때에 나 자신과 이웃과의 관계만이 달라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찾아와서 조반을 몸소 손으로 찢고, 와서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함께 식사하시면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정말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내 양들을 먹이라. 그리고 세 번이나 그 이야기를 하십니다. 우리가 사랑을 받았다면 사랑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향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은, 아직도 나 자신 중심의 욕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지금 예수님의 사랑이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까. 극단의 빈곤 속에서 굶고 있는 450만 명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여러분께서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러시아의 사상가 니콜라스 베르자이에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어서 함께 먹는 때에 그 음식은 영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굶주린 사람들을 곁에 버려두고 나 혼자 먹는 때에 그 음식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적으로 썩어지는 물질이 되고 만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매일 영적인 음식을 먹고 있는지 썩어 없어질 물질을 먹고 있는지 돌이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광복절입니다. 이제는 남과 북의 평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평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남과 북의 성장은 없고 함께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당장의 통일은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남쪽에 사는 이 사람들과 북쪽에 사는 이 사람들을 함께 합쳐 놓으면 그 동안에 쌓여진 미움과 증오로써 싸우고 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북한 사람들과 남한 사람들이 서로 60년 동안 미워하고 욕했던 생활을 바꾸어서 사랑과 동포애를 나누는 일입니다. 그런 사랑을 여러 가지 면으로 실천을 시켜서 우리가 서로 한 민족이라는 동포애가 어느 정도 생긴 다음에 통일을 하지 않으면 서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반도에서의 평화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평화가 깨지는 때에 동북아시아 전체의 평화가 깨지고 그것은 나아가 세계 평화가 깨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오늘의 이 광복절에 혼자서 하는 아론의 축제를 끝내버리고, 함께 춤추는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커다란 힘은 없을지 모릅니다. 슈마르크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Small is beautiful", 작은 것이 아름답다.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우리 경동교회 성도들이 통일을 위한 기금을 모으고, 환경을 조금이라도 살리려고 하는 노력을 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렇게 작지만 아름다운 것이 큰 역사를 바꾸는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론의 축제를 끝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은 사람입니다. 오늘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여서 평화를 성취하는 일에 함께 나아갈 것을 다짐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강 원용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