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는 백성의 교회와 짐을 지는 장로의 교회 (민 11:4 - 민 12:16)

  • 잡초 잡초
  • 424
  • 0

첨부 1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은 자기가 그리스의 자유민으로 태어난 것과 남자로 태어난 것,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한다는 말을 했었습니다.
  제가 플라톤의 흉내를 낸다면, 저는 예수 믿는 신앙 안에서 진정한 자유인이 된 것과 남자로 태어나서 목사가 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개혁주의 신앙 전통을 따르는 장로교회의 일원이 되었음을 감사할 것입니다.
  구원 받는 개인 신앙은 꼭 같지만, 그런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의 정체(政體)에 따라서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회중 중심의 침례교가 있는가 하면 감독 중심의 감리교도 있습니다.
  물론 이 지상교회에서 완전무결한 형태라는 것은 있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 중에서는 가장 성경적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장로교에 속한 기독신자가 되고 장로교에서 안수 받은 목사가 된 것에 대하여 저는 자부심을 느끼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출애굽이라는 큰 구원 역사를 체험한 선민들이 모인 이스라엘의 광야교회가 그 내부로부터 큰 위기를 당하여 흔들리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그 광야교회가 어떤 모습의 정체(政體)를 가져야 할지에 대하여 명백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 광야교회가 인본주의적인 시행착오를 벗어나서 실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있는 모습의 공동체로 성장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교회를 통하여 가르쳐 주셨던 교회의 체계는 과연 어떤 것이었습니까?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라는 이름을 가지고 함께 이루어 나가고자 하는 교회의 모습이 과연 어떤 성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장로교회는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 불신앙인 불평이나 개인적인 요구가 교회를 어지럽히는 것을 단호히 배격합니다.

  본문 11장 4절부터 6절에 기록하기를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광야교회의 위기는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음”으로써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아직도 신앙이 약하고 광야교회의 공동체 정신도 희박했던 사람들이 먼저 불만을 터뜨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도” 따라서 “다시 울며” 그 불만을 더 크게 확대시켰습니다.
  그 신앙 약한 이방인들이 불신앙적인 불평을 하면 신앙 좋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것을 무마하고 진정시켜야할 입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거꾸로 그런 분위기에 같이 휩쓸려 들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불만이란 것은 사실상 별것 아닌 음식 투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만나를 잘 받아먹고 있다가, 갑자기 몇 사람의 선동에 휘말려서 “생선, 외, 수박, 부추, 파, 마늘”을 못 먹게 되었다고 울기까지 하면서 참 유치한 불평을 시작했습니다.
  반찬 몇 가지 없다고 해서, 그들이 아직 기억도 생생해야 마땅했던 출애굽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도, 매일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감사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들끓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어떤 불만은 항상 신앙 약한 사람들이 그 발단이 되기 마련입니다.
  평소에 그리 교회 생활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 어쩌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항상 교회 내에서 어떤 불만을 찾아내는 눈은 밝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불만이라는 것은 지극히 세속적이며 자기 욕구 중심적인 것들뿐입니다.
  정말 예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면 아무 불만거리도 될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교회가 어쩌니, 교역자가 어쩌니’하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섞여 사는 사람’들이 불신앙적인 불평의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신앙 있는 교인들이 그것을 지혜롭게 잘 권면하지 못하고 자기도 그런 소리에 오히려 합세하게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주객전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영적 비주류에 속한 사람들의 소리가 교회 안에서 더 크게 확대되는 일이 없도록, 특히 잘 믿는 성도들이 그런 말을 들을 때 지혜롭게 권면하고 처신함으로써 그런 시험을 초기에 싹을 잘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1장 10절과 11절에 기록하기를 “백성의 온 가족들이 각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런 유치한 울음 앞에서 모세는 그야말로 철없이 보채는 “젖 먹는 아이” 이백만 명을 혼자 품에 안고 있는 “아비”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원래 모세에게 주어진 책임은 그 백성들을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 가나안으로 무사히 인도해 가는 그것뿐이었습니다.
  그것만 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그처럼 백성들의 자질구레한 불평불만에 대한 비난까지 다 받아야 했으니 실로 “혼자서는 다 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이었으며, 차라리 “즉시 나를 죽여” 주십사고 하나님 앞에서 하소연하게 될 만큼 괴로웠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만과 요구는 인간적으로만 생각하자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의 의사 표현의 자유도 없다면 결코 민주적인 공동체가 아니라는 소리를 들을만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개인의 불만 표출은 그 지도자 모세를 괴롭게 했으며 그런 소위 민주적인 의사 표현이라는 것이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게” 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아니 됩니다.

  목사는 결코 팔방미인이 될 수 없고 교회가 무슨 도깨비 방망이를 두들기는 곳도 결코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가장 큰 구원, 십자가 대속과 천국 영생의 소망을 그 최고의 축복으로 믿고 함께 따라가는 공동체이며, 목사는 교인들로 하여금 이 대열을 끝까지 함께 따라가도록 인도할 영적 책임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일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들 중에는 교회 다녀도 자기 육신 생활이 뜻대로 안된다고 불만을 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아니합니다.
  또한 자기 집안에서나 직장, 사업처에서 무슨 일이 잘 안되면, 그 스트레스를 교회에서 토해내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일수록 교회에서 걸핏하면 말을 만들어 내고 회의 시간만 되면 열변을 토하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목사라는 사람은 그런 교인들의 불만스러운 것들을 해소해 주고 그런 교인들의 의견이라는 것을 모아서 교회를 이끌어가야 마땅하다고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교인들과 그렇게 끌려가는 목사가 합작을 함으로써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산으로 올라가는, 사공이 많은 배’가 되어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누구보다도 민주주의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민주적인 교회’라는 말에 대해서만큼은 의구심과 회의를 느끼는 목사이기도 합니다.
  정말 ‘민주적인 교회’가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 될 수 있겠습니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이 경향교회가 처음부터 철저하게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교회였다고 한번 가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독신자로서의 생활을 어떻게 하고 교회의 예배와 봉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만약 우리가 처음부터 성경은 딱 덮어놓고 장로교 헌법도 없는 것으로 해 놓고, 그냥 ‘중생 받은 각자의 양심’만을 가지고 민주적인 투표로서 모든 것을 결정했다고 하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한 주에 예배를 몇 번 드리면 좋을까?’라는 의제를 두고 토의가 시작되면 그 누군가가 일어나서 “예배는 주일 아침에 한번만 ‘진하고 뜨겁게’ 드리고 주일 오후에는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육신의 안식을 취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발언할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누가 그 완벽한(?) 논리에 반대하겠습니까?
  새벽기도회나 수요예배는 고사하고 주일밤예배조차 그 공동의회에서 통과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헌금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라는 의제가 나오면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 의무적으로 시행하고 나머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에 맡깁시다.”라는 정도의 발언을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그것은 구약 시대의 율법적인 명령에서 나온 것이니 십일조든지 무슨 헌금이든지 일체 강요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도 ‘자발적인 헌금’을 훨씬 더 기뻐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발언하면, 그 훌륭한(?) 말씀에 당장 동의 재청이 따라 나오지 않겠습니까?
  만약 경향교회가 그렇게 민주적으로 시작되었더라면 오늘날 신학교 후원이나 세계선교 사업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었을 뿐 아니라, 이 강서 성전 건축은커녕 아직도 을지로의 창고 건물에서 목사 월급이나 겨우 주는 꼴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민주적 교회’라는 것은 결국 ‘사람이 기뻐하는 데로 가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따라야 하는데, 그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은 거의 다 예외가 없이 사람에게는 부담이 되기 마련이고, 민주적인 결의는 다수가 싫어하는 것이라면 백이면 백 반드시 부결시킬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사실상 세상 정치에서도 민주주의라는 것은 쉽게 ‘중우정치(衆愚政治)’가 될 위험이 다분하지 않습니까?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주력해야 할 교회를 ‘민주적’이라는 미명 하에 결국은 사람의 욕심과 어리석은 생각에 휘말리게 되는 ‘중우교회(衆愚敎會)’로 만드는 일은 결코 범하지 말아야겠다는 이 장로교회의 요긴한 정신을 바로 깨닫고 공감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장로교회는 말씀을 맡은 목사와 그 사역을 돕는 장로들로 구성된 당회를 중심으로 교회의 질서와 화평을 지킵니다.

  11장 16절과 17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 백성의 장로와 유사 되는 줄을 네가 아는 자 칠십인을 모아 데리고 회막 내 앞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지지 아니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불평하는 백성들과 낙심한 모세의 모습을 내려다보신 하나님께서는 일단 그들에게 메추라기를 주어서 그 고기를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31절부터 35절에 보면, 그 고기 먹은 직후에 그런 원망의 주동자들과 동조자들을 재앙으로 치심으로써 심판하셨습니다.
  광야교회와 모세를 향하여 함부로 원망하는 죄를 하나님께서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아니하심을 천명해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그 혼란에 빠진 이스라엘 광야교회를 위하여 새로운 대책을 세워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와 유사”들 중에서 “칠십인”을 특별히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모세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모세 혼자 지지 아니하도록 조처하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 중에서 이 칠십 명의 장로들을 뽑아놓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백성의 불만에 대한 대변자 노릇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오직 그 백성을 바로 인도해 가려는 모세의 사역을 돕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24절 이하 3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칠십 장로들에게 “모세에게 임한 신”을 꼭 같이 임하게 하심으로써 일종의 취임식을 해 주셨습니다.
  그 칠십 인 중에서 “엘닷”과 “메닷”은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회막에 나오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까지도 꼭 같은 성신 능력의 체험을 입게 해 주셨던 것으로 보아서, 그들에게 어떤 불경한 동기는 없었던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이처럼 장로는 기본적으로 목사의 사역을 돕기 위해 주어진 직분입니다.
  무슨 교인들의 불만을 대변하고 교인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당회에 반영하는 것이 장로가 해야 할 사명의 본질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말하자면, 장로는 국회의원 같은 사람이 아니라 대통령을 보좌하고 돕는 장관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목사가 혼자서 다 질 수 없는 교회의 짐을 나누어지고, 교인들을 보살피는 책임을 함께 담당하기 위하여 장로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장로의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목사와 성령 안에서 늘 마음이 일치되어야 하고 눈만 마주쳐도 뜻이 통할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사와 장로가 영적으로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17절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임하게 하셨던 성신을 “그들(칠십인)에게도 임하게” 해 주셨지만, 여전히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모세)와 말하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달하는 일만큼은 어디까지나 모세에게만 주어진 고유의 특별한 사명이었고, 이것이 모세와 다른 칠십 장로들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였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점을 너무나도 뚜렷하게 강조하셨습니다.
  12장 5절부터 8절에 기록하기를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모세가 “구스 여자” 즉 에티오피아의 이방 여인을 취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 정확한 배경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죽어서 재혼을 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첩을 취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지 간에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으로 하여금 모세를 비방할 계기를 만들어 준 것에 불과했고, 실제 이슈는 모세의 지도권에 집중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이 모세를 비방하여 말할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라고 그들의 진짜 의도를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즉각 직접 개입하셨고,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모세의 편을 드셨습니다.
  비록 미리암과 아론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들로서는 도무지 비교도 못할 특별한 것이 모세에게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점을 가리켜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된 자”이며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는 관계”라고 두 가지로 밝히시면서, 그런 모세를 어찌 함부로 비방하느냐고 그 두 사람을 책망하시고 특히 그 주동자였던 미리암을 일주일 동안 문둥병에 걸리도록 징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해당되는 광야교회를 맡아서 충성되이 섬기는 그 직분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그 사명에 있어서 미리암과 아론은 그야말로 모세와 상대도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장로들 중에도 “목사만 중생 받고 목사만 성령 받았느냐? 우리도 꼭 같이 받았다.”라고 아론과 미리암처럼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목사와 교인, 목사와 장로 사이에는 엄연한,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목사가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생각하는 정도라는 것은 그 아무리 신앙 좋은 장로나 집사나 권사라 해도 결코 따라갈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 목사가 있다면, 그 목사는 일찌감치 스스로 사표를 내어야 마땅합니다.
  또한 목사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교회를 이끌어가야 할 고유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목사를 가리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딤전 5:17)라고 다른 일반 장로들과 명백히 구분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그 누구보다도 교회를 사랑할 뿐 아니라 교회를 지도할 말씀을 맡은 목사이니, 그런 목사가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장로들은 그런 목사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획하는 일, 그런 목사가 성경을 가지고 선포하는 설교에 저 ‘칠십 장로’들처럼 같은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전적으로 공감하고 조력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바로 그런 당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영적 ‘관할과 치리’에 기꺼이 순종함으로서 실로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의 교회를 제대로 세워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께서 세례 받으시거나 입교하실 때 하나님과 공회 앞에서 했던 서약들 중에서 네 번째로 했던 것, “나는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며 그 정결함과 화평함을 이루도록 힘쓰기로 작정합니다.”라는 서약이 보통 중요한 서약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자복하는 첫째 서약, 내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음을 고백하는 둘째 서약, 그리고 내가 이제부터 신자다운 거룩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다는 셋째 서약 - 이런 알짜배기 서약들에 이어서 네 번째로 넣을 만큼 중요한 서약인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의 관할과 치리’라는 말은 바로 지교회 내에서는 ‘당회의 영적 다스림’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미 세례를 받고 입교하신 모든 교인들은 자기가 속한 교회의 당회의 영적 지도와 행정에 ‘복종하기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서약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세례 받을 때 서약했던 이 네 번째 조항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지켜야만 이 교회가 ‘개인의 목소리’가 중구난방하는 시장바닥이 되지 아니할 수 있음을 깨닫고, 말씀을 맡은 목사와 그 사역을 돕는 장로들로 이루어진 이 교회의 당회를 중심으로 이 경향교회를 ‘그 정결함과 화평함’을 지키는 질서 있고 은혜로운 공동체로 함께 세워나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이스라엘의 광야교회의 정체(政體)가 어떻게 되어야 할지를 명백하게 지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목소리들이 주도하는 민주정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 중심의 공동체였으며, 한 교권주의자의 독재정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칠십 인의 장로들을 모세 주위에 함께 세워 주신 공동체였습니다.
  자기 불만을 터뜨리면서 우는 자들의 소리만 드높은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오직 말씀을 맡은 지도자와 그를 돕기 위해 함께 성령 받은 장로들이 리드하는 교회만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루어 갈 수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다른 교회는 제쳐 놓고 그래도 명색이 ‘장로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 가운데서도 실제로는 그저 ‘민주적인 교회’라는 미명 아래 교회의 질서가 파괴되고 교회의 영적 권위가 땅바닥에 내팽개쳐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어느 교회의 부교역자로 섬기게 되었을 때 ‘교회 헌법책’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마침 아버지 목사님께서 미국에 오셨다가 당신께서 가지고 계시던 헌법책을 제게 주고 가셨습니다.
  그것은 당시 우리나라의 어떤 큰 보수 장로교단에서 발행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헌법책에서 ‘세례서약’에 관한 부분을 읽다가 한 가지 이상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보통 우리 장로교에서 행하는 세례서약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네 가지가 있는데, 그 헌법책에는 처음 세 가지만 있고 네 번째 서약은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 번째 서약이 인쇄된 자리 바로 밑에 있는 여백에, “그대는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며 그 정결함과 화평함을 이루도록 힘쓰기로 작정하십니까?”라는 그 네 번째 서약이 제 아버지의 친필로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그 어느 장로교단에서는 그 네 번째 서약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여기고 일부러 빼어버린 것이 분명한데, 도대체 왜 그랬겠습니까?
  이제는 장로교회 목사들과 신학자들까지도 ‘교회의 관할과 치리’라는 것을 스스로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네 번째 세례서약은 요즘 같이 민주적인 교회 운영이 각광을 받고 있는 시대에는 무언가 교권주의적인 냄새만 나는 구시대의 산물처럼 취급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 됨을 자복하고 예수 신앙 고백하고 경건한 신자 생활에 대한 서약만 했으면 충분하지, 거기에 왜 교회 운운 하는 사족을 달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처음 세 가지 서약을 통하여 그 개인의 신앙생활만 틀림없이 고백되고 확인되어졌으면, 이제 그 개인 신자가 모여서 이루게 되는 교회 따위는 아예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방식이, 다른 교단도 아닌 장로교단의 헌법책에 버젓이 드러나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목사들이 생각하는 것이 그 정도이니 교회들이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 네 번째 서약은 우리 개혁주의 신앙의 선배들이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고 교인이 교인답게 되기 위해서는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서약이라고 생각했던 까닭에, 그 중요한 세례서약 속에 포함시켰습니다.
  그처럼 주님의 몸 되신 이 귀중한 교회의 정결함과 화평함을 지키기 위하여 필요불가결한 그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대한 서약을 목사라는 사람들이 그처럼 헌신짝 버리듯이 내버리고 그저 ‘민주적인 교회’ 어쩌고만 하고 있으니, 오늘날 이 지상교회들이 세상의 회사보다 질서 없이 중구난방 하는 장터가 되고 사회의 동창회보다도 더 결속력이 약한 이합집산의 무리로 전락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헌법책의 여백에 제 아버지께서 만년필 글씨로 또박또박 써 넣으신 그 네 번째 조항을 읽으면서 혼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 아버지의 친필은 바로 제가 존경하고 또한 자랑스럽게 여기는 개혁주의 신앙의 선배 목사님들의 교회관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는 글씨였고, ‘하나님의 집’을 충성되이 섬기고자 하는 목사가 마땅히 따라가야 할 길을 무언의 소리로 저의 심령에 영원히 새겨 준 글씨였습니다.

  ‘우는 백성’의 소리만 높은 교회는 밖으로 구령 단체로서의 힘을 상실할 뿐 아니라 안으로도 계속 상처 받는 영혼들만 남기게 될 뿐입니다.
  오직 ‘말씀을 맡은 목사’와 ‘짐을 나누어 담당하는 장로’들의 영적 리더쉽이 교회를 바르고 강력하게 이끌어 갈 때만이 안으로 약한 성도들이 성장하게 되고 밖으로 세상을 향하여 규모 있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민주적이라는 미명 하에 개인의 불만과 인본적인 사고방식이 판을 치는 어지러운 교회를 만들지 아니하고, 오직 교회의 가르침과 지도에 순종하는 각 교인이 됨으로써, 실로 개인적으로는 구원의 은총을 더욱 뜨겁게 확신하고 전체 공동체를 통하여서는 복음의 능력을 조국과 세계를 향하여 함께 크게 발휘하는 경향교회의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 기 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