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버리자 (마 23:27~28)

  • 잡초 잡초
  • 368
  • 0

첨부 1


거룩하고 복된 주일에 기둥교회에서 예배드릴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여기에 모인 우리들의 예배를 받으시옵소서.
우리는 안식과 평화를 누리는 복된 시간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세상에서 빛 되길 원하나 세상 바람이 너무 셉니다.
하나님, 우리가 세상에서 소금 되길 원하나 세상 부패가 너무도 심합니다.
그래서 때로 절망이 오고, 복된 삶을 포기하고 싶은 연약함을 느낍니다.
승리할 힘을 주시옵소서. 강하고 담대하게 하시고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서 지쳐 피곤해진 영혼들이 모였습니다.
초신자로부터 목사에 이르기까지, 태중의 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제 새 힘 얻고 새로운 마음으로 일어나는 기쁨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와 함께 예배드릴 수 없는 이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기 원합니다.
외국과 객지에 나가 있는 이들, 군대에 나가 있는 젊은이들, 병상에 누운 환자들
이 모든 이들을 하나님의 넉넉하신 품으로 안아 주시옵소서.
하나님, 부족한 종을 세우셨사오니 성령 충만케 하셔서…
신령한 말씀, 뜨거운 말씀, 능력의 말씀, 치료와 회복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서로 인사합니다. "옆에 앉아서 감사합니다. 옆에 앉게 된 것은 제게 복입니다"
오늘 복 받아서 귀한 분 옆에 앉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심이 느껴지나요? 진심으로 인사하신 건가요? 사람 속을 알 수 있어야지요?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사람의 마음을 읽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가리켜
외식(外飾 겉치레, 외면치레)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란 말은 헬라어(hypokritai)로 '연극배우'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좋게 보이려는 생각으로 속 사람을 감추고 드러나는 것만 멋지게 하는 사람,
가식적인 '무대연기(theatrical performance)'를 연출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이나 악역을 연기하는 사람들을 향해 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자가 맡은 역할에 대해 욕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 제 고등학교 동창이 찾아왔습니다.
신앙생활 잘해서 출석교회에서는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직업이 연기자인데 그동안 TV에서 자기를 못봤느냐고 묻는데 저는 전혀 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다녀간 뒤에 TV를 보다가 그 친구를 봤습니다.
실제상황 24시인가 하는 프로그램에서 경찰들이 범인을 잡는 장면에서
그 친구가 깡패 두목으로 나왔습니다. 세상에 못된 짓 많이 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배역에 충실히 연기하는 것 뿐이지 실제로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외식>이라는 말속에는 바로 이와 같이 연기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실제보다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없는 것을,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감추기 위해서 허영과 가식으로 포장을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자처하며 종교적 율례와 규범 준수에서 완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했고, 십일조도 철저히 드렸고, 구제도 많이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높은 학식을 쌓아 놓은 자들이었고,
당대에 소소한 법적 문제도 판결해주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회적 지위와 열정적인 종교심 때문에 당대의 많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3장 6~7절에 보면 그들은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에 앉았고
시장에서는 사람들에게 문안을 받았고 사람들에게는 랍비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랍비"(Rabbi)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나의 위대하신 분'이라는 뜻으로 '선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종교의식에 충실한 삶의 모습… 모든 면에서 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화(禍)있을진저…!" -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섬뜩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평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그들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물론 겉과 속을 같이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겉과 속이 다른 그들의 삶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7절에
"화(禍)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 23:27)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가까워지면, 많은 사람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순례자들이 시체나 사람의 뼈를 접촉하여 부정하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무덤에 회를 칠해서 눈에 잘 뜨이도록 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우리의 무덤처럼 봉분이 있는 무덤이 아니고 사각의 돌 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겉과 속이 다른 회칠한 무덤같은 사람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보실 때 보통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르게, 다른 것을 보십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을 읽어보면 하나님과 사람의 보는 것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사무엘상의 기록연대를 보통 주전 950~1000년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약 3000년 전 그 옛날 사람들도 외모를 보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키 큰 사람을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선지자 사무엘도 사람의 겉만 보고 판단하려 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울을 왕으로 세운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사무엘상 9장 2절에 보면,
"기스가 아들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 하더라" (삼상 9:2)
사무엘은 사울의 훤칠한 키와 준수한 용모에 대해서만 기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평가를 듣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사무엘상 10장 24절에 보면,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삼상 10:24)
짝할 만한 이가 없다라는 말은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키가 크고 외모가 준수했던 사울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사울을 대신해서 새로 왕이 될 사람을 찾아 이새의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새의 아들은 여덟명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 엘리압을 본 사무엘은
외모에 탄복하며 그를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삼상16:6)
사무엘은 외모만 보고 사람을 택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었음에도 외모만 보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 (삼상16:7)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경건하고 풍부한 경험을 지니고 있어도,
인간으로서의 시선, 사람의 외모에 반하는 것 같은 눈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선지자도 사람의 겉만 보았으니 보통 사람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새의 일곱 아들 모두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셨습니다.(삼상16:10)
그때 이새의 여덟째아들 다윗은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삼상16:11)
아버지 이새는 다윗을 선지자에게 보이고 싶을만큼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다윗을 데려오게 했습니다.
다윗이 도착했을 때 보니… "피부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습니다."

성경에 표현된 대로 보면 다윗은 사내 대장부답기보다는 여자처럼 예쁘게 생긴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다윗을 왕이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가 그니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 (삼상 16:1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가 그니 = '바로 다윗이 왕이 될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어떻게 그렇게 이스라엘의 대단한 왕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 답이 사무엘상 16장 13절에 나옵니다.
"…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삼상 16:13)고 했습니다.
☞ 쉽게 번역된 성경을 보면 (쉬운성경)
"…그 날부터 여호와의 영이 큰 힘으로 다윗에게 들어갔습니다" (삼상16:13)

다윗이 형들보다 못하고 연약해 보이는 미소년에 불과했지만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크게 들어가니까
그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는 사람이 단순히 외모로 평가받고 해야 한다면
목사는 잘 생긴 사람, 키 큰 사람들만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수많은 과정을 거쳐 안수를 받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하나님께서 능력주시니 이렇게 목회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닫지 않는 외진 곳에서 양을 치던 목동 다윗을 하나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는 자리에 있는 이들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택하실 때, 판단하실 때 있는 자리나 겉모양만을 보시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예쁘게 생겼든 못 생겼든, 키가 크든 작든… 좋은 옷을 입고 고급 집에 살든,
가난하여 밥 먹고 살기 어렵든,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것이 아무런 문제가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마음에 드는 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

여러분은 오늘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올 때 어떤 마음으로 나오셨습니까?
여러분의 품고 있는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지난주간에 고향에 다녀오셨습니까? 어른들을 찾아 인사 드리셨을 것입니다.
부모님을 찾아뵐 때… 즐거운 마음으로 가서 인사드리셨지요?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억지로 고향에 다녀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만약 억지로 찾아 뵌 것을 부모님이 아신다면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부모님의 회갑, 칠순, 팔순 잔치를 '축하와 감사'의 마음으로 차려드리셨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억지로… 상을 차려드렸다면 그 상을 받으신 부모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성 없는 형식적인 예배, 헌신 없는 습관적인 예배, 사모함 없는 의무감의 예배…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구약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으셨고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이삭이 그랬고… 노아, 욥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찾고 계시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여호수아도 백성을 향하여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수 24:14) 했습니다.
<경외>, <성실>, <진정한 마음>… 이런 것들은 말로 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말과 마음이, 말과 행동이 같은 것은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섬김의 신앙생활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신앙생활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 …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2) 했습니다.
감찰이라는 말은 '감시하여 살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시하고 살피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3절에 보면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3)했습니다.

모든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 다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에게만 잘 보이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교회에 나오는 사람의 마음과 그 마음에서 드러나는 자세와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결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중심, 마음이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집사, 권사, 장로가 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정말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버려야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예수님을 믿겠노라고 고백했을 때의 감동, 세례 받을 때, 처음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마실 때,
처음 직분 받았을 때… 여러분의 마음과 자세는 얼마나 진지했습니까?
교회에서 처음 대표기도를 하게 되었을 때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문을 준비하여 연습하고 기도를 했던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3년, 5년, 10년… 다니는 동안 기도를 시키면 습관처럼 유창하게 기도하는 것이…
어쩌면 익숙해진 기술자의 모습이 아닐런지요?
하나님은 기술자를 원치 않으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처음 직분 받아 일하는 기쁨과 감사로 합니다. 그런데 3년, 5년, 10년… 되면서 불만이 생깁니다.
자기 나름대로 판단이 생기고, 남을 정죄하기까지 하고…
그리고 귀히 여기던 목회자에게도 막 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의 기술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저도 순간순간 '기술자 목사'가 되지 않기 위해,
매주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설교를 준비하고 전하는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너무 익숙해 있고, 너무 잘합니다. 그러다 보니 감동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어느 신혼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자기가 출근하면,
집에 홀로 있어야 하는 아내에게 미안해서 작은 메모지에 "사랑합니다"라고 쓰고
그 쪽지를 이곳저곳에 숨겨놓았습니다.
아내가 옷을 입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이상한 것이 잡힙니다.
"사랑해요" 아내는 놀랍고 행복했습니다.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면 거기에도 "사랑합니다"라는 쪽지가 있었습니다.
밥을 먹기 위해 냄비 뚜껑을 열어도, 화장품 뚜껑에도,
심지어 신발 속과 화장실 휴지에도 "당신을 정말 사랑합니다" 라는 글이 써 있는 것이었습니다.
집안 어느 한 구석에도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마음이 안 단 곳이 없었습니다.
이 아내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너무나 감동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세월이 흐르니까 밥하려 할 때마다,
옷을 입을 때마다, 화장품 뚜껑을 열 때마다 뻔한 단어 "사랑해요"가 쓰여 진 종이는
더 이상 감동이 아니었고 늘어나는 쓰레기에 불과했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사랑하나 예전의 감동은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 하나님을 향해 예배하는 삶을 살겠다고 하면서도
세월이 흐르면서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하기는커녕 불만과 불평을 말하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드리십니까?

누가복음 18장 9~14절을 보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이 또 등장합니다.
11절에 보면“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1)
12절에는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 (눅 18:12)

여기 나오는 바리새인의 자기 자랑은 조작된 것이 아니라 모두 다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기도는 예수님께 칭찬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의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고백이 아니라,
자신이 행한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우월의식에 빠져있었고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 세리를 경멸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바리새인은 말끝마다 제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자기를 높이고 있습니다.
기도는 자신을 높이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자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파티가 아닙니다.
대표기도를 할 때도 모든 사람이 듣고 아멘할 수 있는 내용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어떤 분들은 기도하면서… <설교>하는 분들도 있고
<훈계>하고 <책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하나님인양 목사에 대해, 다른 사람에 대해 정죄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바리새인의 기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잘난 점을 알리고, 자신이 높아지려는 욕망을 하나님께 전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제사이며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나오면서 여러분은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드리는 것에 신경을 쓰셨나요?
아니면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신경을 쓰셨나요?
-.정말, 하나님의 사랑에, 기둥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에 감사하십니까?
-.지금의 삶에 감사하십니까? 가정에, 부모에, 자녀에… 정말 사랑의 마음으로 섬기나요?
-.이웃을 도우라는 설교에… 선교헌금을 하라는 소리에… 봉사하라는 권면에…
감사한 마음으로 아멘하고 동참하십니까?
-.여러분은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에 대해 감사하십니까?
아니면 어쩌다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느냐고 항변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이 땅에 이 모습대로 보내신 것은
우리가 이 땅에 빛과 소금이 되어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제 우리,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십시다. 사람 의식하는 가면을 버려야 합니다.
신앙의 외식도 버려야 하지만 생활의 외식도 버려야 합니다.

요즘 살기가 어렵다고 말하는데… 제가 잘 모르지만 살기 어려운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소득은 일정한데 물가도 오르고 기름값도 오릅니다.
그렇다면 소득과 지출을 맞춰 살려고 해야 합니다. 기름 값이 오르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든가
다른 생활비를 줄여서 생활해야 하는데 전에 살던 대로 유지하려니 어려운 것입니다.
다른 사람 의식하고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세상 삶의 태도도 이젠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하게 살려는 결심을 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의 평판과 박수에 신경쓰기 보다 하나님의 눈에 드는 신앙이 되기 위해 애쓰시기 바랍니다.
적은 일에 충성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평안을 만드는 자로
희망과 승리를 믿고 저 높은 곳을 향해 가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 마음에 드는 가에 관심 가지고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하게 살려는 결심을 하고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의 평판과 박수에 신경쓰며 살기보다
하나님의 눈에 드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희망과 승리를 믿고 비록 힘들고 험하고 높은 길이라도 찬송하며 가는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거룩한 주일 하나님께 나와 예배 드리는 성도들
세상 삶도 예배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귀한 시간 세상에서 얻은 소득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