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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의 씨앗을 심는 지금 (고후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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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언제가 인생의 전성기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은 전성기가 아니고 앞으로 전성기가 올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지금이 자신의 인생의 전성기, 황금기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안계십니까?

지금 하십시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아침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런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 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다면 지금 웃어 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가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이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에는 너무 늦을지 모릅니다. /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 어느 무명 시인이 쓴 시를 소개했습니다. 

지난 어제는 이미 내 것이 아니고 또한 내일은 아직 내 것이 아니므로 오직 오늘 지금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요 인생의 전성기, 황금기라고 고백하고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를 산다는 것은, 가장 자신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꼭 하고 싶은 일을 뒤로 미루지 않고 현재에 경험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또한 현재를 산다는 것은, 현재를 깨어서 사는 것, 깊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순간에 몰두하는 모습입니다. 현재를 깨어 사는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뒤로 미루지 않고, 그리고 순간에 몰두하여 경이를 체험하는 사람입니다. 현재를 깨어서 깊게 사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매우 좋은 길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서점에 어느 날, “내일은 책을 무료로 드립니다” 라는 현수막이 나붙었는데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에 왔던 사람들이 그 현수막을 보고는, 내일 다시 와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서점으로 갔더니 서점은 공짜로 책을 받아 가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욕심껏 책을 가지고 사람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서점을 나오는데, 이상하게 출입구 쪽의 계산대에서는 여전히 돈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서점 주인에게 따졌습니다. “아저씨, 오늘 책을 무료로 준다고 해 놓고서는 왜 돈을 받는 겁니까?” 주인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아, 현수막을 보시고 그러시는 것 같은데, 그 현수막에는 내일 무료로 드린다고 했지, 오늘 무료로 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돈을 내셔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손님들은 우르르 몰려나가 현수막을 다시 보았더니 현수막에는 여전히 “내일은 책을 무료로 드립니다”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내일'이라는 날을 우리가 현실로 만날 수 있거나 몸으로 체험할 수 있을까요? 있습니다. 예컨대 내일, 시험 합격자 발표를 합니다. 그러면 오늘 하루 종일 마음을 졸일 겁니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하루를 보내고 나면, 드디어 합격자 발표를 볼 수 있게 됩니다. 내일을 현실로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내일을 현실로 체험합니다.

그런데 앞의 이야기는 경우가 다릅니다. 서점 주인과 같은 어떤 의도가 개입되면, 손님들 입장에서 내일은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내일은 영원히 현실로 만나지지 않습니다. 손님들은 서점 주인에게 속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도 속는, 그런 묘한 상황이 벌어지는 겁니다. '내일'은 그런 묘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내일'이란 지평선과 같은 것입니다. 그 지평선까지의 거리는 하루거리입니다. 물론 지평선의 특정 지점에는, 하루를 걸어가면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평선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기껏 하루를 걸어가 보면, 지평선은 그만큼 뒤로 물러나기 때문입니다. 특정 지점에는 도달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지평선은 저 멀리 있습니다. 지평선에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습니다. '내일'이란 그렇게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내일'이란 시간의 현상입니다. 시간의 현상 안에는 이런 묘한 면이 있습니다. 시간의 현상인 '내일'은 어떤 시각에서 보면 만날 수 있지만, 또 어떤 시각에서 보면 영원히 만날 수 없습니다. 이는 딱 떨어지는 답을 얻을 수 없는 수학 문제와 같은 것입니다.

시간의 속도는 일정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만나고 있을 때는, 시간은 매우 빨리 흘러가지만 반대로 지겨운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시간은 몹시 늦게 흘러갑니다. 시간이란 도깨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시간을 이런 모습으로 창조하셨을까요? 이러한 모습의 시간을 무대배경으로 하여,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배우라는 뜻일까요? 복잡한 이야기를 모두 생략하고 결론적으로, 다만 현재, 지금 여기를 살라는 것입니다. 선(線)이란 수많은 점(點)들의 총합입니다. 점들을 빼면 선은 자동적으로 사라집니다. 그렇듯 세월도 수많은 현재의 총합입니다. 현재를 빼면 세월은 사라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하면, 우리는 인생을 헛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지금”을 특정한 때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 현재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현재가 은혜의 때라는 겁니다. 은혜는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사건이라는 겁니다. 기회는 지나갑니다. 기회는 항상 있지 않기에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영국 어느 박물관에 머리는 말의 머리이고 꼬리는 새의 꼬리로 된 모형의 동물이 있는데 그 이름이 기회라고 합니다. 기회는 앞으로 올 때는 말의 머리와 같아서 붙잡고 올라 탈 수가 있지만 한 번 뒤로 지나간 다음에는 아무리 붙잡으려고 해도 새의 꼬리와 같이 미끄럽고 잘 빠져나가서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소망을 갖습니다. 소망이란 미래의 은혜를 바라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소망의 성취는 하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데 소망의 성취와 관련하여, 치명적 오해가  있다면 곧 현재를 시들하게 살면서, 마음을 미래에 두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소망의 성취를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아니, 지금 자신이 가진 소망의 씨앗을 심고, 지금 그 소망의 나무를 키우는 겁니다. 그 순간에 몰입하여 말입니다. 그렇게 순간순간 정성으로 소망의 나무를 키우다 보면, 어느 날 그 나무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겁니다. 곧 소망의 성취는 충실한 현재의 자연스런 결과인 것입니다. 충실한 현재가 없는 소망의 성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이란 무늬로 보면 미래의 문제이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현재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의 씨앗을 심는 지금,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소망의 나무를 키우는 지금,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지금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미래에도 은혜가 없습니다. 과정에서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결과에서도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 겁니다. 오늘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일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을 잘 살면서, 오늘 은혜를 느끼는 사람만이, 내일이 오늘로 되었을 때, 그 오늘에 은혜를 느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며 미래에 대한 기대로 살아갑니다. 그러한 그에게 현재는 불만족 투성이입니다. 그의 현재의 삶은 어둡고 짜증스럽습니다. 아니, 지금 어떤 상황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설령 그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 하더라도, 현재를 잘 수용하는 겁니다. 원치 않는 바의 틈새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찾아내는 겁니다. 그 숨결을 깊고 고요히 호흡하며, 은혜를 느끼는 겁니다. 그는 외칩니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로군요!”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지만 그 은혜들을 은혜인줄 알아차리지 못하여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은 온통 하나님 은혜와 신비로 출렁이고 있음을 아시고, 지금 자신을 사랑하고, 지금 모든 사물에게 사랑을 전하고, 지금 만나는 모든 것에 마음을 다하여 반응하고, 지금 소망의 성취를 맛보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지금 만나러 가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입에서 매일 매일 이런 외침이 끊이지 않기를 바랍니다.“지금이야 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성도의 삶은 새로운 삶, 새로운 기쁨, 주님이 함께하시는 기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일의 모든 염려와 걱정을 벗어버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좋은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힘쓰고 기쁨과 행복한 마음으로 살고 적극적으로 살고 이웃을 향하여 긍휼을 베풀며 용서하며 살고 부요한 자로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일 년을 사는 것이 아니고,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날마다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고 하루하루를 살았듯이 성도는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을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죄악 많고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기쁨이 있는 것은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좋은 만남에서 시작하고 좋은 만남이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축복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열리게 됩니다. 좋은 만남은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매개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린 인간에게 사랑의 통로요, 은혜의 통로입니다.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인생에게는 생명의 나침판이요, 소망입니다.

어스킨 목사가 스코틀랜드에서 목회 하던 시절, 스칼렛 이라는 부인이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그날 큰 은혜를 받고 깊은 감동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주일 스칼렛 부인은 어스킨 牧師의 설교를 들었으나 은혜를 못 받았습니다. 스칼렛 부인은 목사님을 만나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어스킨 목사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지난주에는 당신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왔기 때문에 신령한 은혜를 받았지만, 오늘은 나를 보려고 왔기 때문에 은혜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누구를 만나러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모든 은혜는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주님은 지금도 나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지금 은혜 받아야 합니다. 다음 시간은 내 시간이 아니고 내일도 내 시간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지금 

인생의 황금기도 그저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착각일 뿐입니다. 흘러가고 나면 그 뒤에는 아무런 자취도 남지 않고 허망할 뿐입니다. 거기에서 얻어지는 열매는 얼마나 적으며, 무르익은 열매 또한 얼마나 적은가요! 그런데도 우리는 그 무르익은 열매들을 소홀히 하고 경멸하고, 향유하지도 않은 채 썩도록 내버려둘 수 있는가요? 화려한 인생처럼 느껴지는 것들에서부터 해방되어 후회 없는 뒤안길이 되도록 자신에게 아름다운 삶이 진정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분명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사랑하는 사람들, 아름다운 것들과 함께하는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어린 아이들은 항상 현재를 삽니다. 아주 쉽게 그것도 '경이'에 가득한 눈으로... 어린 아이들을 본받아 '지금'에 충실하면 어떤 사람과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신앙은 마치 돈을 버는 것과 같습니다. 돈을 벌게 되면 번 돈을 잘 지켜야 하듯이 신앙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주님은 모든 일을 돌보시고 지켜주십니다. 오늘 하루를 좋은 하루, 좋은 날로 하나님이 주셨는데 감사함으로 주님을 향하여 하루의 문을 열 때 주님이 나의 하루를 비추어 주시고 양식과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 때 여러분의 삶이 능력 있는 삶, 성공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소망의 씨앗을 심는 지금이 바로 은혜의 때입니다.  (서 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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