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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존귀히 여길 사람 (빌 2: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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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며 돌을 던진 바울, 그 바울이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을 때 바울의 곁에서 바울의 목회를 도운 사람들이 많다. 바나바는 바울이 온전한 크리스챤이 되었음을 교회에 소개했고 누가라는 의사는 바울의 연약한 육체를 돌보는 자로서 세계 전도 여행에 함께 했고 뵈뵈라는 집사는 보호자의 역할을 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사역을 돕기 위해 이사를 가면서 동행하였고 마침내 목숨이라도 내어놓는 사람들이 되었다.
바울의 사역이 이방인을 위한 사역이었고 기독교의 초석을 놓는 사역이었으나 그의 위대한 삶의 곁에는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때론 핍박자들에 의해 매를 맞고 쫓겨 다니고 옥에 갇힌 수난의 때도 있었으나 그가 전한 복음은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점점 확장되어 갔다.

바울의 제2차 세계 전도 여행을 통해 빌립보 교회를 세웠다. 복음의 초창기 때부터 바울을 돕던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교회가 아닐 수 없었다. 바울이 로마 옥중에 갇혔을 때 빌립보 교회는 사도를 염려하여 에바브로디도를 옥바라지 책임을 지워서 보냈다. 바울은 그 전령을 통해 옥중 생활에 많은 도움을 얻었고 옥 안에서도 기회가 주어지면 복음을 전하여 로마 시위대 사람을 구원하였다. 그런데 심부름꾼 에바브로디도가 얼마나 바울의 사역을 돕는 일을 충성되이 잘하는지 바울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1. 빌2:25 "그는 나의 형제다."
2. 함게 수고, 함께 군사된 자다.
3. 빌2:26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다."

바울은 전 마음을 다해 에바브로디도의 사람됨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존귀히 여기라고 빌2:29에 명령하였다. 복음 앞에서 사람은 평등하다. 신분과 인종에 상관없이 한 형제요, 한 가족이다. 차별이 없다. 그것이 복음의 비밀이다. (엡3:1∼6) 그런데 복음의 사도인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교회 중에서 존귀히 여기라고 추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헌신의 삶이 누구보다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성도가 존귀하게 됨은 그의 소유나 지위가 아니고 주님 앞에 자신을 헌신함에 따라 결정된다.

첫째, 에바브로디도는 교회의 사자로서 깨어 있었다. (빌2:26)
빌2:26을 보면,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돕는 조력자가 되기 위해 로마에 왔는데 자신이 질병에 걸렸다.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의 건강 문제가 빌립보교회에 전달되고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기대를 충족치 못하고 걱정의 대상이 된 것을 심히 근심하였다.
빌2:26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로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에바브로디도의 근심은 돕는 사명을 중단할 수 없는데서오는 근심이었다. 빌립보교회의 사자로서 옥바라지를 잘해야 되는 일에 한순간도 게으를 수 없는 깨어있는 자로서의 근심이었다. 또, 빌립보교회를 실망시킬까 걱정하는 근심이었다. 그러므로 에바브로디도는 자기의 맡겨진 일에 깨어 있으려는 신령한 근심을 한다. 빌립보교회의 자랑스러움이 되는 사자로 깨어 있으려는 근심을 한다.
우리 많은 사람들은 맡겨진 일과 사명에 깨어 있으려고 근심을 하지 않고 무엇을 먹고 입고 사느냐는 문제 때문에 근심을 한다. 세상 근심은 우리의 영혼을 잠들게 하지만 사명을 감당하려는 신령한 근심은 하나님의 일에 더욱 분발하게 한다.
고후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로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깨어있게 한다. 간절하게 하며 불타게 하며 사모하게 하며 열심있게 만들어 준다. 복음의 사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도 깨어있지 못함을 근심하자. 교회가 내게 맡겨 주신 일은 내 육체의 질병과 연약함으로 인해 감당하지 못하게 됨을 근심하자.

둘째,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충성하였다. (빌2:30上)
에바브로디도는 대단한 영적 거인이었다. 빌2:27, 30을 보면 자신이 지닌 질병은 죽기에 이를 질병이었다. 그런데 그 지경이 되었어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자기 목숨을 내던진 사람,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초개처럼 여기는 사람,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일이 곧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기에 에바브로디도는 생명을 걸었다. 거짓없는 참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서 죽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목숨을 내놓지 못하고 희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사랑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위한 최고의 사랑은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충성에 있다. 목숨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순교요, 신앙의 최고 표현이다.

에바브로디도의 이름은 찬양 또는 경배 또는 거룩이란 뜻이 있다. 교회 안에서 가장 존귀히 여길 자라고 바울이 선포하지만 사실 온 성도가 찬양하고 경배할 자는 주님 뿐이다. 그런데 주님의 일을 위해 목숨을 돌아보지 않는 충성된 자를 경배와 찬양의 뜻을 지닌 에바브로디도라 했으니 무슨 뜻인가? 바로 주어진 일에 목숨을 거는 충성된 삶이 진정한 예배라는 뜻인 것이다. 참다운 경배를 원하는가? 노래하라. 사모하라. 예배하라. 그리고 바치는 헌신으로 예배하라. 우리 오목천교회 안에 이런 일군이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
거룩한 일에 사람들은 목숨을 걸지 않는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고 쓸데없는 일에 목숨을 건다. 경정, 프로축구, 경륜, 프로야구, 프로 골프에는 돈을 걸고 시간, 목숨을 걸어도 교회와 주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지 않는다.
역사와 능력은 목숨을 거는데서 나온다. 부흥도 선교도 목숨을 거는 교인이 있느냐에서 시작된다. 조지 헌터는 부흥되지 않는 교회는 목사님과 함께 목숨을 걸 수 있느냐 하면 "미쳤어요?"라고 말한다고 한다. 교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느냐 하면 목사들이 "천만에요."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부흥되는 교회는 이 똑같은 질문 앞에 "아멘! 목숨을 걸 수 있어요. 희생할 수 있어요. 함께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와 같은 삶은 진짜 에바브로디도의 이름처럼 주를 경배하고 찬양하는 예배가 된다. 목숨을 걸자.

셋째, 빌립보교회와 바울 사도 사이에 부족함을 채우려고 노력한 자였다. (빌2:30下)
빌2:30下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빌립보교회는 사도를 섬기고 싶어했다. 개척 조기부터 선교비를 후원하여 선교 정신에 깨어있었던 빌립보교회는 옥바라지 선교로 섬김을 확대하였다. 그 일이 구체적으로 진행되려면 옥중에까지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서 섬기게 해야 한다. 에바브로디도 또한 현장에 달려와서 바울 사도를 섬김에 있어서 교회의 지침을 잘 이행하며 바울을 섬기는 일에 조력자로 행동해야 된다. 즉, 사도를 돕고자 하는 일에 교회의 부족함이 나타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이런 일에는 경험과 지혜가 있어야 충실한 결과로 얻을 수 있다. 교회가 위임한 섬김의 역할이 아무리 자세하고 원칙들이 제한되어 있다하더라도 부족함을 채워가는 것은 일 맡은 자의 능력이다.

교회의 전략에 부족함을 채우는 자가 누구인가? 바로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일군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빌립보교회와 사도 사이에 섬김의 부족함을 채우려 온 자, 그가 에바브로디도다. 얼마나 훌륭한 자인가? 목숨을 건 자세도 훌륭하고 부족한 것을 부족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게, 미숙한 결점을 미숙한 결점으로 나타나지 않게 채우려는 사도가 너무도 아름다운 것이다. 에바브로디도는 섬김의 사역에 태만하지 않았다. 그는 깨어있었다. 그는 목숨을 걸었다. 그는 부족함을 태우려는 자였다. 정말 혼신의 열정을 다 쏟아부은 일군이었다. 어찌 이런 사람을 쉽게 구할 수 있겠는가? 정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어찌 환영하지 않겠으며 존귀한 자라 여기지 않겠는가? 충성된 사자는 잠25:13에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한 것처럼 온 교회가 기뻐해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 교회 윤광덕 권사님이 병원에 들어가신지 만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윤광덕 권사님을 생각하면 정말 교회에서 존귀히 여길 신앙의 사람이라고 불러주고 싶다. 그분은 오목천교회에서 성경을 가장 많이 읽는 이였다. 한 주일에 300장, 200장씩 읽었고 최근 병중에도 100장 이상씩 읽었다. 그래서 윤 권사님이 계신 오목7속의 성경읽기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분은 오목천교회에서 기도를 가장 많이 하는 이었다. 구 성전에 있을 때 밤 12시면 자정 기도를 하고 그 기도 또한 치열한 기도였다. 울고 부르짖고 하나님과 싸우듯 씨름하고 기도를 드렸다. 교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목회자와 자식들을 위해 최근까지 교회 건축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분은 교회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목회자를 사랑했다.

그에게 있어서 큰 근심이 있었다면 교회가 잘 되는 근심이었다. 구 교회 성전을 지을 때도 최선을 다해 헌금을 하였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잘려진 엄지 손가락의 산재금을 받아 주님을 위해 드렸다. 그분의 삶은 33세에 과부가 된 이래 너무도 힘들었다. 세 아들을 키우는 가운데서도 너무 힘들어 집을 나갈까 하다가도 방에 누워 자는 열 살, 일곱 살, 두 살의 세 아들을 보노라면 결코 다른 맘을 먹을 수 없어 남양까지 걸어다니며 빗자루를 만들어 파는 행상의 삶을 살았다. 약속의 땅 위에 지어지는 예배당을 바라보면서 자신도 교회 건축 헌금을 마련하겠다고 하루 10,000원씩 드리기로 작정하고 날마다 개떡을 만들어 고색초등학교 앞에 가서 팔았다. 시금치 물을 들여 쑥떡이라고 파는 떡장사가 많은데 윤광덕 권사님은 개떡을 진짜 쑥떡이라고 많은 사람이 팔아주기에 신이 나서 떡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옆구리에 통증을 느낀 권사님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대장 전체가 헐어서 약도 쓰시지 못하고 결국 병원에 가신 지 만 이틀 만에 소천하셨다.

권사님은 그의 생 전체를 교회를 위해, 교회만을 소망으로 삼고 헌신하셨다. 교회 부흥의 간절함 때문에 그것이 아픔이 되었다면 추측이긴 하지만 그 근심으로 인해 피를 쏟았고 교회 건축의 완공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피를 쏟았고 자녀들 걱정과 나라 걱정과 신령한 근심을 하느라고 피를 쏟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를 쏟음, 권사님은 건축 완공을 위해 부르짖다 피를 쏟았다고 할 수 있다.

제가 오목천교회를 부임한 이레 윤광덕 권사님은 강대상을 닦고 청소하는 봉사자였다. 새벽이면 남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수건 들고 나아가 제단을 깨끗이 청소하였다. 그 청소하던 일은 결국 큰아들과 자부에게 물려주고 나서야 그만 두게 되었는데 그 정성은 특별하였다. 주님을 사랑해도 삶의 전부로 사랑하였다.
우리 교회는 정말 존귀한 믿음의 권사님 한 분을 잃었다. 너무도 마음이 아프고 섭섭해서 나도 눈물을 닦아냈다. 아쉬워서, 더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입당이 얼마 남지 않아서 울었다. 그러나 이런 권사님이 계셔서 오목천교회가 세워지고 있다. 권사님의 마지막 말씀이 떠오른다.
"죽는 것이 뭐 겁나요? 천국에 가는 것이죠. 그런데 새 성전 입당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나 하다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의 소원의 말이 기억 속에 맴돈다. 에바브로디도처럼 섬기는 사역에 깨어있고 목숨을 걸고 어찌하든지 교회의 부족한 부분을 몸으로, 마음으로 채우려 했던 권사님을 신앙의 좋은 모델로 삼고 우리도 부끄럽지 않는 존귀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겠다.

무엇을 위해 깨어 있는가?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거는가?
무엇을 위해 부족한 것을 채우려 하는가?
예수, 교회, 사도 사역의 섬김을 위해서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되자.
(김 철 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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