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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세상의 소금 (마 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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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소금은 너무 흔하고 우리 주변에 많이 있어서 소금의 용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진리는 쉬운 곳에 있고 흔한 것에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너희는 세상이 소금이란 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세상을 떠나 살 수 없고 세상을 외면하고 살 수도 없고 세상 속에 들어가 살아야 하는데 주님께서 세상의 소금이라 하심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첫째, 예수님은 세상을 버리지 않고 사랑한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굴러가지 않는 세상이다. 조화와 질서로 굴러가도 세상은 보시기에 좋았지만 세상을 관리해야 할 인간들이 죄의 종, 사단의 종이 되므로 죄악이 관영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구약 창세기 3장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은 인간이 사는 세상이 죄악으로 넘쳐나고 죄악이 더 큰 죄악을 만들어내는 부패한 곳임을 보여주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려는 하나님의 드라마를 빼놓으면 성경에서의 인간의 움직이는 모습은 모두 죄악사이다. 썩는 세상, 냄새나는 세상, 마귀가 인생들을 헛된 것으로 끌고 다니는 세상, 딤후3:13의 말씀대로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하는 세상이다. 딤후3:2의 말씀처럼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치 아니하며 부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는 세상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황금 만능주의, 향락주의, 허무주의, 염세주의, 이기주의에 빠져서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를 알지 못하고 있다. 행2:40을 보라. 베드로의 성령 충만한 설교의 결론인데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등을 돌린 세상, 하나님에 대하여 부정하는 무신 세상, 하나님 대신 사신 우상을 참신으로 섬기는 세상, 하나님을 믿으려면 내 주먹을 믿으라는 인본주의 세상, 유황불에 무너져 내린 소돔성보다 더 악한 세상은 패역한 세상이다. 역사와 문명은 발전했다고 하지만 하나님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 짐승처럼 살고 있다.

그런데 세상의 소금으로써 그리스도인을 정의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직도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계획이 있다는 것이다. 사단이 지배하는 타락한 세상을 하나님이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상을 하나님의 뜻이 임하는 곳으로 회복시키겠다는 구원 계획을 그리스도인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세상이 되도록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고 계신 것이다.

둘째, 소금으로서의 특성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 살라.
소금의 특성, 소금이 소금으로 존재하는 비결은 짠맛 때문이다.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소금이 아니다. 돌과 흙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세상의 소금이 되려면 짠맛을 잃지 않는 소금이 되는데 있다. 짠맛만 지니면 무슨 일에든 쓸데 있는 유용하고 필요한 소금이 되어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금이 짠맛을 지니면 사용될 때가 너무도 많다.

1) 하나님께 제사드리는데 사용된다.
레2:13 "모든 제물에 소금을 치라" 하였다.

2) 사람들의 의약용으로 사용된다.
사람들의 염분 섭취량은 생리 작용에 꼭 필요하다. 소금이 부족하면 건간에 문제가 생긴다.

3) 언약의 표시로 사용된다.
레2:13 "언약의 소금"이라 하였고 막9:50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였다.

4) 소금은 맛을 내는 조미료로 사용된다.
음식을 만들 때 소금이 빠지면 맛없는 요리가 된다. 떡을 만들고 나물을 무치고 된장찌개를 끓여도 소금이 빠지면 먹을 수가 없다. 소금은 아주 중요한 필수 조미료다.

5) 소금은 썩는 것을 썩지 않게 할 때 사용된다.
냉장 시설이 없을 때 무더운 더위 속에서 물건을 저장하는 방법은 소금을 치는 것이었다. 소금이 들어가면 어떤 물건이든지 상하지 않고 오래동안 보관이 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은 그 사용 용도 다섯 가지를 종합해보면 이런 세 가지 영적 의미가 있다.

1. 그리스도인은 삶이 거룩해야 한다.
소금이 제단에 하얗게 뿌려진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이 깨끗하고 정결하게 이 세상에 나타나야 한다. 예배의 거룩성, 기도의 거룩성, 봉사의 거룩성으로 소금처럼 흰색의 영성이 있어야 세상에 자극을 준다.

2. 맛없는 세상을 맛있게 만들어야 한다.
성도의 삶이 조미료가 되어 슬픔과 권태로 사는 인생을 기쁨과 감격의 인생으로 만들어야 한다.

3. 부패한 세상을 부패하지 않게 막아내야 한다.
죄아 불의와 싸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사명이다.

그렇게 되려면 소금의 특성인 짠맛만 자랑해서는 안된다. 짠맛을 지닌 소금이 세 가지를 해야 한다.

1. 녹아야 한다.
소금의 짠맛은 녹아내리므로 짠맛을 발휘한다. 녹는다는 것은 희생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소금이 되려면 철저히 자기 희생을 받아드려야 한다. 희생은 자기를 깨뜨리고 자기를 부정하는데서 온다.
막8:34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를 깨지 않는 자는 희생할 수가 없다. 소금이 짠맛이 있어도 녹지 않으면 짠맛을 낼 수 없듯 그리스도인이 주를 따르는 사람이 되었다 하더라도 십자가를 지는 희생의 길을 환영해야 한다.
양화진에 가보라. 외국인 묘소이긴 하지만 555기 묘비 중 선교사 묘, 167기로 세워져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기를 원했기에 한국에까지 와서 녹는 소금이 되었다. 그 중 헐버트 선교사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는 말을 남겼고 아펜젤러 선교사는 목포 앞바다에서 파선의 사고를 당하여 그 시신을 찾지도 못하였지만 여학생을 구하려다가 구조되지 못하고 죽은 참된 희생의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녹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예배가 살고 전도가 살고 교회가 살고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2. 스며들어야 한다.
녹기만 하면 안된다. 소금의 염분은 구석구석 스며들게 된다. 이 세상 어디를 가보아도 한국인은 김치 냄새가 난다. 그것은 소금이 모든 부분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소금이 된장, 간장, 고추장에 들어가고 마늘 짱아치, 김장 배추에 들어가서 스며들어 맛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각계 각층에 들어가서 거기서 그리스도인의 맛을 내야 한다. 내가 들어간 곳은 바로 내가 다니는 직장이다. 내가 섬기는 교회이다. 내 사랑하는 가정이다. 지혜롭게 스며들어야 한다. 직장이 스며들어야 한다. 간단하지 않다. 쉽지 않다. 그러나 스며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임이요 역할이다. 희생의 길이 그리스도인의 길인데 스며드는 일을 당연해 해야 한다.

3. 소리나지 않는 것이다.
녹는 것은 희생이고 스며드는 것은 맛을 내는 역할이다. 그런데 소리나지 않는 것은 조용한 변화를 의미한다. 큰소리내고 전쟁의 정복자처럼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일을 했다, 저 일을 했다 떠벌리는 것이 아니다. 소금이 스며들면 소리나지 않으나 분명히 방부가 되고 맛이 나타나게 되듯 그리스도인의 삶은 소리나지 않는 변화를 이끌러야 한다. 소금은 정복자의 당당한 기세로라기 보다는 조용하고 겸손한 희생과 봉사를 의미한다.
우리는 팔복의 교훈의 마지막 단계인 마5:14∼16에 기록된 빛의 기독교가 되는 데는 관심이 많다. 승리의 기독교, 당당한 기독교의 표상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소금의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세상 위에 나를 보라 외치는 빛의 종교가 아니라 세상을 위에 녹고 스며들고 전혀 소리를 내지 않는 소금의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어둠을 쫓아내는 빛의 기독교 이전에 뒤섞임 속에서 동화되고 마침내 변화를 가져오고 표현되지 않고 나타나지 않고 소리나지 않음 속에서 맛이 나고 썩지 않는 정결성이 만들어져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 이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길에 버려질 뿐이다. 이스라엘의 소금은 주로 광산에서 돌을 캐어내듯 채광하였다. 그 돌덩어리 같은 소금을 집으로 가지고 와 사용하려다 보면 소금이 아닌 흙덩어리들이 간혹 있었다. 그것은 짠맛을 잃은 소금이기에 사용될 때가 없었다. 그리하여 길에 버려 진흙 속에 발 디딤돌로 삼았다. 그러면 수많은 행인들에게 밟히는 돌로서 외면당할 뿐이었다. 기독교가 소금이 되지 못하면 가장 필요한 것이 소금이면서도 결국 내던짐을 받는 신세가 되고 만다. 소금이 흔하다 할지라도 소금이 자기 맛을 내기만 하면 그 소금보다 귀한 것이 없고 소금 없이는 하루라도 살아갈 수가 없다. 교회가 많다. 흔하기 때문에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소금이 안되기에 문제가 되고 외면을 당하는 것이다.

셋째, 소금의 기독교가 되는 사명의 삶은 심령의 가난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늘 본문의 구조를 보라. 소금의 기독교를 말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산상 설교를 시작하였다. 팔복의 복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아가 회복되고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 마5:1∼6 말씀은 개인의 자아가 온유한 자아로 확립되어야 함을 말한다.
2) 마5:7∼9 말씀은 개인의 자아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올바르게 확립되어야 한다.
3) 마5:10∼12 말씀은 삶의 고난을 기뻐하는 초자연적 가치가 확립되어야 한다.
그러고나면 마5:13 본문처럼 이 사회를 향해 소금의 역할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산상 수훈의 팔복의 교훈 중 세상의 소금이 되는데는 개인의 자아가 온유한 자아로 확립되기 위해 그 제일 첫 번째 걸음마로 나오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데 있다. 이 마5:3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기독교가 사느냐 죽느냐, 세상의 소금이 되느냐 못되느냐 그 출발은 바로 마음이 가난하라는데 있다. 내가 무엇이든지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의로운 자다. 나는 나를 구원하는 책임을 진다. 나는 이만하면 되었다 등의 마음가짐으로는 안된다. 오히려 나는 무능한 죄인이다. 나 스스로 나를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이다. 나는 연약하며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죄의 누더기 옷 밖에는 내어놓을 것이 없어서 하나님의 사치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고백을 할 수 있을 때, 깨끗하게 만드소서 애통해 할 때 소금의 기독교로 나아갈 수 있다. 주만이 나를 구원하시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부터 개인의 자아가 세워진다. 개인의 자아가 완성되는 일없이 계속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하지 못한다고 떠드는 의인이 많이 있지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데서부터 애통해 하는 자가 되는데서부터 온유한 자로 나의 자아가 확립되는데서부터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립되고 소금의 기독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책임을 감당하게 된다.

나의 자아의 확립이 중요하다. 이것을 무시하고 타인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될 수 없고 타인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이들이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소금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다리를 오르려면 첫 번째 단계가 중요하듯 소금의 기독교가 되려면 개인의 자아를 완성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겸손이 중요하다. 회개와 기도와 위로받음이 필요한 죄인의 고백이 중요하다. 거기로부터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죄를 고백하므로 천국의 복을 알고 애통하므로 위로의 복을 알았기에 그는 사회 속에 소금이 될 수 있다. 올바른 교회 생활, 올바른 가정 생활 그리고 올바른 세상의 소금이 되는 생활은 죄를 인정하고 내어놓는 것으로 시작된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자. (김 철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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