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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날마다 더해가는 교회 (행 2:42 ~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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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는 중단하거나 퇴보한 적이 없습니다. 2000년 기독교사에 교회운동이 때로는 퇴보한 것처럼 보일 때도 없지 아니 했습니다. 퇴보 정도가 아니라 재기불능의 상태까지 이르렀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지상교회가 당하는 환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신 일이었다고 정리할 따름입니다. 기독교사에 나타난 수많은 고난의 현장 역사는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시련과 환난이라는 도구로 행하신 섭리적 사건들이었습니다. 이 지상 교회는 환난을 통하여 오히려 힘을 얻었습니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부흥에 부흥을 더하여 왔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운동은 날마다 더해가는 교회였습니다.

Ⅰ. 내적으로 충실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 교육하는 교회입니다
본문 2장 42절에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세상 과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사도들이 여러 사람들이지만 가르치는 내용은 통일성을 유지했습니다. 그 증거가 사도는 문법상 복수형태를 취하지만 가르침은 단수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르침의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지상교회에 설교자가 많을지라도 가르치는 내용은 동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의 수 만큼 방법과 내용이 다양한 것이 문제입니다.. 『떡을 뗀다』는 말은 특별히 성찬을 의미합니다. 기도한다는 말 역시 교제를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교제'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바른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대신관계), 성도들과의 바른 관계(대인관계), 물질과의 바른 관계(대물관계)입니다. 바른 관계가 무너지면 교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바로 됨에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사랑하고 섬기는 예배적 인격자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도우며 그리스도를 전하는 인화 협동적 인격자로, 자기의 존재 의의와 특수한 사명을 자각하며 자기가 선 자리에서 맡은 일에 충성하는 문화적 인격자를 양성하는 것이 교회 교육의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2)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교회입니다.
본문 2장 43절에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두려워한다』는 말은 동물적 공포가 아니라 경외심과 존경하는 마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마가복음 4장 41절에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7절에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했습니다.
사도로 인하여 나타난 기적을 사도적 이적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을 통하여 나타난 기적들로 말미암아 저들의 사도직에 대한 확증을 얻는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도적 기사를 살펴보면 베드로는 룻다에 살고 있던 애니아의 중풍병을 예수 이름으로 고쳤습니다(행 8:32-34). 베드로는 욥바에서 다비다를 죽은 데서 살렸습니다(행 9:36-43).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행 14:8-10).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표적과 큰 능력으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행 12:1-19). 베드로와 요한은 40년 동안이나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를 걷게 했습니다(행 3:6; 4:22,30).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점하는 귀신을 떼어 주어 온전케 했습니다(행 16:18). 바울은 드로아에서 밤새도록 설교하는 중에 3층루에서 떨어져 죽어 버린 유두고 청년을 살렸습니다(행 20:9-16).

이 외에도 사도적 이적은 많이 있습니다. 사도들 당시에 있었던 이러한 이적은 그 때 그 시대에 복음 전파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사도적 이적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신앙적 수단과 혹은 복음 전파의 수단으로 일반적인 신유의 은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진정한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의 택자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믿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그 믿음을 행동화하는 것이 표적중의 표적입니다.

Ⅱ. 받은 은혜를 활용할 줄 아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2장 44-45절에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다 함께 있었다』고 해서 가정을 버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성도들의 적극적인 모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는 말은 공산주의 분배원칙을 연상해서는 이 성경해석에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첫째로 인간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소유관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둘째 의미는 모든 재산을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공동의 유익을 위해 헌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소위 공동체 운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중심하고 나타나는 차원 높은 교제입니다. 성령에 의한 공동체는 사랑이라는 원리와 언약이라는 결속에 의해 형성된 것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는 바울의 전도를 통해 형성된 이방인 공동체와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전자는 유무상통(有無相通)의 공동체인 반면에 후자는 사유재산이 인정되는 공동체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1-22절에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자신의 것을 다 드린다는 차원에서 이방인공동체는 초대교회 공동체와 분배원칙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굥동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각자의 행위대로 얻는 축복의 증거를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Ⅲ. 외적으로 충실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 잘 모이는 교회입니다.
본문 2장 46절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라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이는 것은 교회운동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동시에 교회운동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들은 성전에 모이는 것을 각자의 신앙 표현으로 삼았습니다. 저들은 성전에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예배하고 찬양으로 영광을 돌렸습니다. 저들이 성전에서 모인 것은 성전에 찾아오는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 저들의 모임의 가치와 목적을 두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유대인들의 율법적 형식과 관습적으로 모이는 획일적인 모임은 아니였습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모두 다 기쁨으로 모였고 분명히 이들의 모임은 자발적인 동시에 무엇보다 생산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모이는 성도들의 모습은 기뻐야 합니다. 마치 잔치 집에 모여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는 것처럼 흥분되고 기대에 차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중생 받은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산적인 모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임의 가치를 반드시 객관적 체험으로 공유해야만 합니다.

2) 온 백성에게 칭송받는 교회입니다.
본문 2장 47절에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당시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Plinius)가 트랴얀(Trajan)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은밀한 조사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은 법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보고한 것을 감안할 때 당시 기독교인들의 윤리적인 실천의식이 불신자들까지도 감동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관계 속에서 오는 축복이 칭찬을 가져오게 되는 동인이 됩니다.
떡을 떼었다는 것은 성찬과 애찬을 같이 했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오늘날 구역예배처럼 이집 저집을 다니면서 모임을 가지고 교제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 성도의 수가 증가하는 교회입니다.
본문 2장 47절에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주께서'라고 하므로 구원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 『더하게 하시니라』( , 프로세티데이)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해서 더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여기서 끝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그 숫자가 증가되어 갔습니다. 누가의 이러한 표현은 장차 신약교회 부흥의 시작일 뿐입니다.
'더해 간다'는 것은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더해지는 과정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부흥은 어느 정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질 뿐입니다. 이 세상 끝날이 바로 절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교개혁자 루터는 음악을 사랑했지만 프로테스탄트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음악이 아니라 설교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초대교회는 사도들에 의한 교육 곧 설교가 우선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여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중세시대에 들어오면서 예배는 제단의 성례 곧 미사 중심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제단에서 설교단의 중심으로 옮겨지면서 진정한 복음전파의 길을 다시 열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그의 글에서(T. Harwood Pattison, The History of Christian Preaching)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논리자와 웅변가가 되어야 한다. 반드시 가르치고 담대하게 꾸중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주제에 대해 설교하더라도 실례를 들어 설명해야 한다. 게으른 사람들을 꾸짖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바로잡고 거짓교리를 가르치는 자들을 책망해야만 한다"라고 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은 자신들을 사제로 여기기보다는 반드시 설교자로 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설교는 교육 그 이상의 것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도시대의 교회는 설교가 중심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초대교회를 이끌었습니다. 가르치는 사도나 가르침을 받는 성도들이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원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표적과 기사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받은 은혜를 활용할 줄 아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께로부터 받은 사랑에 감격하여 사랑의 분배원칙을 활용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웃을 향한 전도행위입니다.
결과 외적 충만한 교회는 잘 모이는 교회로, 모든 이들에게 칭찬 듣는 교회로, 마침내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으로 열매를 보는 교회입니다. 주께서 숫적 증가는 반드시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 가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 부흥이 자신의 부흥보다 우선입니다. 병행해서 교회 부흥은 곧 자신의 부흥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강 구 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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