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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물 속의 물고기 (마 13:4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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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3장의 하나님 나라 비유들은 크게 3가지 요점으로 정리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장한다는 것, 내 모든 소유를 기꺼이 포기할 만큼 지고한 가치가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열매 맺지 못하는 밭과 열매 맺는 밭으로 나누었습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세상에 공존하는 두 부류를 나누었습니다. 그물 비유는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로 나눕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47-48) 그물 비유는 가라지 비유는 두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범위의 차이입니다. 가라지 비유는 세상 전체를 두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그물 비유는 그물밖에 있는 물고기는 일단 제외하고, 그물 안에 있는 물고기들 중에서만 좋은 것과 못된 것이 분류됩니다. 비유에서 그물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가라지 비유가 세상에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음을 말했다면, 그물 비유는 교회 안에도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의인’과 ‘악인’은 도덕적인 삶을 보고 판단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의롭다’라고 할 때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법정적인 개념으로서 하나님께 의롭다는 선언을 받았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관계적 개념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의미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선언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악인은 그 반대개념입니다. 교회에는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섞여 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아마도 그런 악인들이 적었을 것입니다. 예수 믿는 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추방되고, 고문과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원형경기장의 사자 굴에 던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기름먹인 천에 감겨 횃불로 사용되었습니다. 여인들은 능욕을 당하고 가슴이 잘려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입으로 시인하는 일은 오늘날 전도 받고 잠깐 기도하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달렸으므로 신중하게 고민하고 고백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핍박이 그치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교회의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교회는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성직자들은 병역에서 면제되었고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성직자는 농노나 서민들이 신분상승 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고서는 관직에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교회는 전도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초대형 건물들이 건축되었습니다. 교회에는 의인들 중에 악인들이 많이 섞이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중세의 부패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도 초창기에는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천주교 전래기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나고 미풍양속을 어지럽히는 범죄자로 취급되어 처형된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추앙하는 천주교가 그 후 제사를 다시 허용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아무튼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던 시기에는 교회에 다닌다는 자체가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핍박 받는 소수의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시대 교회는 여러 가지 혜택을 제공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불교도들 중에서도 유치원에 보낼 형편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 선교원에 자녀들을 맡겼습니다. 정치인들 중에는 표를 확보하기 위해 교회 회원으로 등록하기도 합니다. 이민 교회에는 대인관계를 위해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대학입시에 떨어지거나 사업에 실패하면 ‘신학교에 가서 목사나 되라’고 권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단지 친목을 위해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증가하는 교인수와 함께 교회 건물은 커지고 많아졌지만, 영향력은 감소되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순수하게 예수님만 배우려고 교회에 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외롭고 힘든 마음을 위로 받고 싶어서, 혹은 호기심에, 혹은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교회에 들어옵니다. 그것 자체는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온 후에 점차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사람이 있는 반면, 끝까지 처음 목적에 머물러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대체로 완전하게 거룩하지는 않습니다.

가라지 비유와 또 한 가지 다른 점은 강조하는 초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라지 비유는 세상 끝날까지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는 이유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물 비유는 세상 끝날에 있을 분류에 초점이 있습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49-50) 세상 끝에 반드시 될 일이 하나 있는데,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는 일입니다. 지금은 구별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섞여서 지냅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반드시 구별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갈라내십니다. 그런 후에 악인은 지옥에 던지십니다. 간단하지만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세상 끝날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상당한 시간적인 거리감을 느낍니다. 입버릇처럼 ‘말세다 말세야!’라고 할지라도 당장 예수님이 오셔서 심판하실 것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죽음은 언제 임할지 모르며, 죽는 그 날이 그에게는 세상 끝입니다. 장례식장에 갈 때마다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정말 죽음에는 순서가 없더군요. 잘 알고 지내던 후배 한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젊다고 해서 죽음이 결코 멀리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이처럼 개인에게 있어서 끝날이 언제 임할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물 비유는 자신이 좋은 물고기인지 못된 물고기인지에 대한 심각한 진단을 해보도록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분류하기도 전에 이미 어떤 것이 좋은 물고기인지 어떤 것이 못된 물고기인지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명확하게 구별할 수 없지만,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못된 물고기가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은 알 수 있습니다. 못된 물고기는 말씀을 들어도 요지부동입니다. 위로를 주거나 이 세상의 삶에 유익한 말씀은 받아들이지만, 회개나 헌신을 촉구하는 말씀들에 대해서는 무감각합니다. 말씀을 듣고 자기의 욕심과 고집을 회개하기보다는 반발심으로 마음이 점점 굳어집니다. 반면에 좋은 물고기는 말씀을 들을 때에 심판하실 거룩한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가집니다. 말씀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회개합니다.

물론 교회는 영원한 삶을 위한 진정한 유익을 줍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 백성답게 살다보면 그 결과로서 이 세상 삶에서도 유익을 얻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유익을 얻는 것에 목적을 두고 교회를 찾는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교회에 있으면서도, 그물 속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게 느낄 것입니다. 교회에만 있으면 구원받을 줄로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입니다. 그물 안에 들어온 고기들 모두가 천국 복음에 반응하여 예수님께로 나온 무리들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하심과 그분의 의가 구현되기를 간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러하오이다”고 대답합니다. 천국 비유를 듣고 깨닫는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천국 비밀을 깨달을 때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 기쁨과 즐거움은 세상의 어떤 유익이나 즐거움과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불멸의 가치를 깨닫는 순간, 세상이 양파 껍질을 벗겨놓은 것처럼 새롭게 보입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풀 한 포기에도 강한 생명력이 느껴집니다. 어떤 분은 말씀의 비밀을 깨달은 후에, 너무 기뻐서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리다보니 버스도 추월하고, 택시도 추월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깨닫는 기쁨 속에 있었던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을 하시므로 비유를 마감하십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 옛 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말씀을 말하며, 새 것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하신 말씀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이 깨닫게 된 비밀을 자신들의 마음 창고에 보관해두지만 말고, 적절하게 꺼내서 베풀라고 하신 것입니다. 천국  비밀은 잘 보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잘 알려지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역할은 깨달은 사람들의 몫입니다. 비유를 듣고 깨닫는 것이 제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면, 깨달은 바를 전파하는 것은 제자들의 의무입니다.

비유를 마치신 후 예수님은 고향에 가셔서 가르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에 놀랐습니다(53-54).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예수님을 단지 이웃집에 살던 청년으로만 생각하고 무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55-56). 이 사실은 예수님의 신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분의 가르침과 능력을 직접 체험해도 천국 비밀을 깨달을 수 없고 그 분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 자체입니다. 예수님이 단지 목수의 아들, 곧 사람으로 안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참고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안다면 그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않으셨습니다(58). 예수님을 존중하는 곳에 능력이 임합니다. ♥ (최 동 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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