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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될 성도와 교회 (사 3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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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년 전부터 이 분당 전 지역이 내려다보이는 오포 고개에서 분당지역을 바라보며 기도로 시작된 이 교회의 역사는 마침내 2년만인 1991년 10월 5일에 이 분당지역에서 첫 번째 설립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위에 마침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한 개의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은 비록 우리 자신 스스로가 보기에는 부끄럽고 또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에도 누추한 모습이지만 그 모든 허물을 덮으셨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은총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동안 날마다 구원받은 믿음의 식구들의 숫자를 더하셔서 지금은 어른들과 아이들까지 합하여 재적이 16,000명 주일마다 어른과 아이 합해서 9,000명이 예배를 드리는 예배공동체, 양육공동체, 선교공동체, 생활공동체, 헌신공동체, 이 시대와 역사를 향해 기여와 공헌을 기억하는 시대의 공동체로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매년 하나님의 은혜의 일정표에 맞추어 교회가 초기에 정한 시간표에 따라 한해 한해 정확히 하나님의 역사를 향해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그리고 이번 회기를 기점으로 제1기 교회의 개척 및 설립기, 제2기 교회 체제 정비기를 넘어서 드디어 제3기 대 사회 기여과 공헌의 연습기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7년을 주기로 14년을 마쳤을 때 이제 우리 앞에는 대사회 기여 및 공헌의 연습기로 우리는 오늘부터 발걸음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교회가 선언적인 교회로 끝나는 것을 마다하고 실천적인 교회로 존속하기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존립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 교회의 비전으로 말미암아 역사와 사회를 의식하는 교회로 존립하고 우리는 역사와 사회를 의식하는 방법으로 인물을 키워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로 인물 양성이라는 전략을 선택하여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기반을 위해 성도들의 영적 건강을 이루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는 이렇다하게 내놓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 자랑할 만한 이렇다 할 것은 이 교회가 존속하는 그 어느 시간까지 그 아무것도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민족과 사회 앞에 위축되어서 할 말이 없는 이기적이고 배타적이고 자기 논리만을 주장하는 초라한 종교 단체로서의 모습이 아니기를 소원합니다. 역사와 사회 속에 그리고 우리가 처한 이 지역사회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지상 속에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으로 존속하기를 애썼고 또한 그러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성도들이 이 교회 성도임을 행복해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창피해하고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은총의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을 통해 우리들에게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의 모든 기초적 체제 정비가 끝나 교회의 모든 사역이 대내사역에서 대외 사역으로 중심 이동이 이루어지게 되는 3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각 교회의 사역들이 각 지체의 책임성 있는 수고와 열정으로 말미암아 시스템화 되어 움직이고 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헌신된 여러 헌신자들로 말미암아 주의 교회가 원활히 역사되고 있음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설립 14주년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오늘 본문을 통하여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될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을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황무지가 변하여 풍요의 땅이 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메시지입니다. 비록 곤경에 처한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임하실 것을 예언하여 곤궁 중에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또한 궁극적으로 택한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구원의 축복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잠시의 죄악으로 인한 징계와 하나님의 진노에 기간 동안에 누를 당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자비와 은총으로 그들을 회복하시고 은혜와 영광을 베푸신다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은총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생각해 봅니다.

그 첫 번째는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신 있는 교회 자신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5장 3절을 보니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 주며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우리의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우리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굳세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가로막는 자들을 다 하나님께서 훼파해 주시며 우리에게 원수된 자를 다 보복해주시며 하나님께서 마침내 우리 앞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의 기쁨, 생활의 활기, 축복에 대한 나눔과 감격이 있는 기쁨의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을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자신이 있고 그 자신감이 삶의 기쁨으로 연결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시고 우리의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시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어떤 어려움을 당하여도 그것을 어려움으로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하여 또 한 번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하나님의 은혜의 빛 가운데 녹아지며 사라지고 격파될 것입니다. 우리는 한없는 온유한 백성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말할 수 없는 강력한 영적인 군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비록 능력은 최고가 아니더라고 노력만큼은 최고를 다하여 이루어야 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우리 앞에 역사하는 모습을 보아야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겁과 두려움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앞을 가로막는 사단의 세력은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헤쳐 버리실 것이고 우리 앞에는 그 자취조차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방향을 향해 우리의 달려갈 길을 경주하는 일만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감과 열정입니다. 우리는 생활의 활기가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 있는 성도들은 활기가 있습니다. 활기 있는 교회와 성도들은 다른 주변을 일깨워 함께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 눈물과 슬픔을 극복해 갑니다.

이 시대의 비극은 자신감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 자신감의 상실은 열등감과 병리적인 가해심리로 변질되어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에서 조차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비극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것을 좌시하지 않고 결국 우리들에게 영적 자신감과 활기를 가진 성도들을 만들어 교회를 통해 우리를 또 이 세상에 보냄을 통해 마침내 교회와 세상을 은혜의 세계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에 오늘도 복음을 전하며 우리의 삶의 곳곳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역사를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축복의 도구와 통로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 자신감과 활기를 전파하여 함께 공유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신감은 교만함이 아니라 겸손으로 표현됩니다. 나를 드러내고 나대는 것이 아니라 소리 없으되 이미 우리가 속한 모든 모임에는 사랑과 훈훈한 은혜의 분위기를 조성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모임에는 우리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지만 우리가 속한 모임은 이미 행복한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있고 그 구성원은 이미 행복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의 근원인 축복받은 성도의 모습이요,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나눔과 감격이 있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강하고 자신이 있으며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이 직접 그 앞에서 모든 대적을 멸해주시는 은혜의 백성에게 남은 일은 이제 축복을 나누는 일이며 그것으로 감격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의 번창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다만 그 기도가 하나님의 의도를 능가하는 것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만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애쓰고 기도하고 헌신의 힘을 기울여 이루시기를 원하는 만큼 우리는 과정에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로 믿고 우리는 내 마음에 맞건 맞지 않건 흡족하건 흡족하지 않건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 우리 스스로 주인공이 되기를 원치 않으며 우리의 사역을 마친 후에는 조용히 역사의 무대 뒤로 내려오기를 소원합니다.
‘준비는 철저히 훈련은 가혹히 전투는 치열히 그리고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은 우리의 구호일 뿐 아니라 우리 삶의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천국에서 그 모든 위로와 상급을 받기를 소원해야합니다. 이 땅위에서 모든 상을 받아버리면 우리는 하늘에서 상이 없음을 압니다.

우리는 이제 성도들의 삶에 날마다 감격과 감사가 있으며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세계와 인간들을 포함한 만상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인 아름다움을 찾고 그것을 누리고 우리의 마음과 삶이 하나님을 닮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고행주의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이 고통 중에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최고의 성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녀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부모처럼 우리가 성도로서 이 세상 가치와 기준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세상과 기준과 가치에 합하여 아름답게 세상을 살다 주님의 천국에 오시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이 세상 또한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로서 우리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세상은 더럽고 우리는 깨끗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자체를 아름답게 보고 만들고 세상 속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아름답고 기쁘게 살기 위하여 우리의 영적인 애씀과 수고의 땀을 흘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 있는 교회 자신 있는 성도로서 하나님이 황무지를 변하여 풍요로운 곳으로 되게 만드는 그 은총의 축복을 입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빈함에도 부유함에도 처할 수 있는 균형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가 기쁘고 즐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우리는 책임을 져야하고 배려해야 되고 내 이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함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균형있는 축복과 은혜의 수용입니다. 우리는 한쪽으로 치우친 복음이나 주의나 주장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여건이나 어떤 상황에 놓인 그 모든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가장 가난한 곳에 처할 수도 있고 내가 가장 부요한 곳에도 처할 수 있고 내가 어떤 어려운 지경에 처할 수도 있고 내가 어떤 편안한 지경에도 처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자신감을 갖습니다. 어떠한 여건 속에서도 나는 기쁠 수 있으며 나는 어떤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고 어떠한 여건 속에서도 그 여건 속에 하나님의 나라와 역사를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따라서 빈함과 부함에 대한 균형잡힌 사고를 가지고 어떤 경우에서건 감사할 수 있고 어떤 경우건 인정할 수 있고 어떤 경우건 우리는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능력이 있다고 해서 혹은 능력이 없다고 해서 부유하다고 해서 가난하다고 해서 배웠다고 해서 무식하다고 해서 그것이 타도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되고 또한 내 자신의 현재 위치를 합리화하는 근거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우리의 수고와 애씀이 최선을 이룸이 있어야 합니다. 그 상태 속에서 감사하고 떳떳하게 서로를 인정하고 애틋한 배려한 격려와 인정함이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배운 자나 무식한 자나 연로한 분이나 젊은 사람이나 서로를 존중하고 함께하는 천국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을 가장 큰 헌금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300데나리온 즉 요즘으로 따지면 장년의 1년분의 임금에 해당하는 수천만원짜리에 해당하는 그와 같은 기름은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아도 그 마리아를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물질의 단위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도 칭찬하셨고 가장 비싼 것을 부은 자도 칭찬하셨습니다. 나사로의 집에서는 여러 제자들과 더불어 함께 거하며 음식을 먹고 그 집에 머무르기도 했고 예수님께서는 아리마대 요셉이 마련했던 무덤에 그의 시신을 누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라고 해서 증오하지도 않으셨고 가난한 자라고 해서 업신여기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증오해도 안 되며 남의 잘됨을 축복하고 축하해야 합니다. 잘못돼 어려움을 겪는 자들을 비하하거나 조롱해서는 안 됩니다. 진심으로 가슴아파하며 함께 나누기에 우리의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천국의 백성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슈퍼성도가 없는 것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이 교회에는 교만한 사람이 없는 것에 감사합니다. 이 교회는 또한 위축되어야 할 사람이 하나도 없음을 감사합니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여러 몫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수고하고 애썼으면 그 자리에서 내려와 이제 또다시 침묵하고 정진하는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은총의 백성의 아름다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 한번 따라서 합니다. ‘침묵정진’ 우리는 주의 일을 하고 나서 침묵정진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즉 이 교회는 사회계층이나 서로를 질시하지 않는 사랑이 있는 진정한 교회여야 합니다. 있는 자는 없는 자를, 힘이 있는 자는 없는 자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없는 자는 있는 자를, 힘이 없는 자는 위치를 가진 자에게 분노해서도 안 됩니다. 서로의 수고와 아픔과 애씀을 인정하고 애쓰기 위하여 노력하며 사람의 환경이나 근원을 탓하기 전에 내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나를 세우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야’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위치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내 여건이 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뽑아서 세우겠다는 것이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의 각오와 결단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사랑과 긍휼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 성령충만의 기본입니다.

이 교회는 세상 속에서 비굴한 자도 없고 다른 이를 무시하는 자들도 없는 진정한 은혜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진정한 은혜의 공동체의 특징은 서로를 부러워하고 닮아가고 싶어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깨진 공동체는 나보다 잘되는 사람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잘되면 군림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교회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게으름에 대하여 혹은 우리의 자만에 대하여 탓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직한 결과에 대해서는 감사함과 떳떳함으로 받아들이고 자랑스러워하고 축하해 주어야합니다. 이 교회는 어떤 특정한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 오래 들린다거나 크게 들린다면 그리고 자기의 목소리가 자기의 귀에 크게 들린다면 때가 되었구나 하고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무대 뒤로 내려가 주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가슴이 아파도 이것이 이루어져야 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로서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으며 인간냄새 풀풀 풍기지 않고 모두가 겸손한 가운데 헌신하고 기여할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 세계에서 하나님의 교회 하나 바로 세우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이제까지 그것을 이루어 주셨기에 오늘처럼 갈등이 없고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우리의 신앙을 연마하기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는 믿음의 도장을 우리는 만들어 오늘 이와 같이 참석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가꾸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자비와 사랑은 있어야 하지만 정당한 룰은 지켜져야 합니다. 우리는 16000분의 일일 뿐입니다. 내가 더 커지고 싶다면 그것은 이 공동체에서는 은혜를 받지도 못하고 은혜를 끼칠 수도 없습니다. 출석의 시간이 늘어갈수록 본인의 겸손과 자신을 내려놓음이 익숙해져야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다른 사람이 더욱더 훌륭해 보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시간이 갈수록 우리 자신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신이 자책되어지고 내가 하나님 앞에 회개의 가슴이 뜨거워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이 자꾸 보이고 다른 사람의 지적되는 순간 나는 그 순간으로부터 한걸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순간입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천국의 복음 선포는 형이상학적 내용뿐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내용도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실제적인 면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실제의 개선을 위한 점진적인 사역을 이루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의 사역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을 위한 사역입니다. 하지만 또한 눈에 보이는 삶의 구조와 현실을 무시하지 않고 소중히 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무대로 보고 개선해 나아가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배고픈 사람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광야에서 배고픈 사람이 있을 때 ‘너희는 조금 있으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고 천국에 올 것이니 어떻게 살아도 배고파도 괜찮다 조금만 참아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배고픈 사람을 민망히 여기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그들을 배불리 먹이셨던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병들어 고통하다 조금만 있으면 죽게 되고 그러면 너희에게는 평안한 천국이 있으니 짧은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천국에 와서 너희는 기쁨을 누려라’라고 말씀하지 않고 예수님은 병들어 고통당하며 예수님 앞에 나아와 치유를 원했던 사람을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귀신들려 고통 받는 자에게 ‘너희는 얼마 있지 않으면 세상을 떠나게 되고 주의 천국에서 영원한 것을 누리게 될 것이니 너희는 그대로 있거라’라고 말하지 않고 귀신들려 고통을 당하며 예수님 앞에 나아온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 주셨던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선포하시며 실제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배고픈 자를 보면 먹이셨고, 병든 자를 보면 고쳤고, 귀신들린 자를 보면 귀신을 쫓아주셨습니다. 딸의 귀신들림을 통하여 예수님 앞에 나아와 개와 같다고 예수님의 자비를 구했던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고 그의 딸을 귀신에서 해방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들이 불에도 던져지고 물에도 던져지는 이와 같은 귀신에 들려 주님 앞에 나온 아버지를 보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 할 일이 없다고 그의 믿음을 북돋아 주시며 그의 아들의 귀신을 쫓아주심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의 구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의 지상의 삶에 대하여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지상의 삶에 대한 관심도 역시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상에서 주의 나라를 이루다 우리는 영원한 주의 천국에 가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도피하거나 현실을 잊고 싶어서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 속에서 주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수고하고 애씀 속에 우리가 현실 속에 이루건 이루지 못하건 그 과정을 거쳐 주의 천국에 이르는 백성들입니다. 결국 주님도 우리가 이 현실 속에 살면서 할 일이 있기에 우리를 지금 여기에 남겨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시킬 것인지 우리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3기 사역이 끝나면 우리는 집중적으로 우리가 가장 잘하고 이 역사와 사회에 기여하고 공헌할 수 있는 것을 반드시 찾게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로서 해야 될 기본적인 영혼 구원과 양육의 사업 그리고 나아가 우리에게 맡겨진 고유의 분깃의 사명을 감당하고 나머지는 주님의 손에 맡기며 홀연히 세계 속의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하여 날마다 우리 자신을 돌보며 ‘어떻게 더 잘할 수 없을까’를 생각하며 ‘어떻게 더 힘을 낼 수 없을까’ ‘어떻게 더 헌신할 수 없을까’를 안타깝게 생각하며 우리의 길을 가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쇄진이나 가혹한 종교적인 증세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모두가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는 지혜로움 가운데 진행되어야 합니다. 열심이 있는 삶의 문제는 그 열심이 자칫 잘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강요된다는 사실입니다. 열심은 강요되어서는 안 됩니다. 감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강요를 통해 단시일 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통해 영원히 이루어 가는 주의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돈합니다. 지난 16년 전부터 목사 한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된 교회는 지난 14년 동안 이러저러한 모든 성도들의 각양각색의 헌신과 희생과 아름다운 봉사와 그리고 그들의 눈물어린 애씀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물이나 조직이나 외향이나 아니면 규모나 그것이 아름다움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 자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빛을 받은 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동안 교회를 아름답게 이루신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또한 그 가운데 사용되어 하나님의 역사에 한순간이라도 기여할 수 있었던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그 후대 손손 대대 자손까지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한분절의 기점에 서있습니다. 이제까지 어린 교회를 세워 장성하게 하셨으니 이제는 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힘과 그동안 연습된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원하심 속에 우리는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한순간이라도 하나님 손에 쓰임 받았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수고를 다 마치고 무대 뒤로 내려올 시간까지 우리는 우리의 수고를 더할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빛을 가리우고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빛의 무리가 될 것입니다. 주의 성도들과 그 가정과 기업과 사역과 건강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시는 은혜의 백성 되시기를 주의 백성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 종 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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