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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는 축복의 기초(사 38: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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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실한 건축이 되려면 먼저 좋은 설계도가 있어야 하듯이,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좋은 인생설계도가 필요합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설계도를 자기 스스로 그리려고 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인생설계는 하나님께서 친히 해 주십니다.인간은 실수도 하고 잘못 설계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설계도는 설계 변경할 필요 없이 완벽합니다.하나님께서 자녀로 부르신 사람들을 위한 계획과 뜻에는 전혀 하자나 차질이 없습니다.단지 우리가 어리석어서 그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따라서 우리는 기도와 말씀생활을 통해 그 뜻을 바로 깨닫고 순종하려고 노력하고 기도하며 헌신해야 합니다.설계도가 나왔으면 건축을 시작하게 되는데, 먼저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삼은 지혜로운 건축가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인생의 위기를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질병으로 더 이상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받기도 하고, 국가적인 위기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바다가 항상 잔잔하지 않듯이, 하늘이 항상 맑고 밝지 않듯이, 우리의 삶에도 큰 풍랑과 파도가 엄습할 때가 있습니다. 고난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 기독교 신앙에 하나의 큰 도전입니다. 많은 인생들이 고난을 만나면 때로 하나님께 "왜 하필 이런 일이 내게?"하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기쁘고 좋은 일을 맞을 때뿐만 아니라 슬프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슬프고 힘든 일을 통해서 우리들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겸손하게 만드시고, 우리들의 병든 영혼을 치료하시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토인비는 "인간의 역사는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이루어진다"라고 했는데 고난도 이와 같습니다. 고난이 다가올 때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이를 극복하겠다는 자세를 취하면 고난은 오히려 축복으로 변합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우리의 영혼이 살아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의 몸에 외부의 병균이 침투하게 되면 피의 백혈구가 힘을 합해서 침투한 병균과 싸운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상처에 누런 고름이 끼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백혈구가 싸워서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신앙인은 고난 속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유대인은 유대인의 고난의 역사가 만들었다”는 말은 저들의 역사가 고난의 역사였기 때문에 여호와를 의지하였고, 성서에서 지혜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가마 불로 구워 낸 도기는 결코 빛이 바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로 연단된 인격은 영구히 변하지 않으며 험한 바다는 유능한 선장을 만들며, 온실에서 자란 화초보다 눈, 비, 바람 맞으며 자란 들꽃이 강한 것처럼, 몸을 녹이는 쓰라린 아픔이 없이는 귀한 진주가 탄생될 수 없듯이, 뜨거운 불을 통과하지 않고는 정금이 될 수 없듯이, 우리 인생도 고난의 때를 지나지 않고는 진정한 성품의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생사 간에 큰 위기에 봉착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유다의 히스기야 왕입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병들어 죽게 된다는 소식을 들었고 지금 나라는 앗수르의 침략을 당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병들어 죽으면 나라도 망하는 큰일을 겪게 되는 것이지만 그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죽음 직전에 경험한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왕의 체면도 버리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매달렸던 때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사 38 : 3). 그는 자기의 기도를 듣고 오직 자신을 위해 하늘의 해를 붙잡으셨던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사 38: 8). 그래서 그는 감사의 노래를 불렀고 이 히스기야의 감사하는 장면을 통해서 감사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사야 38장 1절에서 히스기야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중년에 음부의 문에 들어가고 여년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도다." 인생은 죽음을 망각하고 있으나 죽음은 인간을 잊어버리지 않고 반드시 찾아오기에 인류 최대의 비극과 슬픔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유다의 왕이 되어서 10년 동안 열심히 활약했지만 그에게도 어김없이 죽음의 그림자는 찾아왔고 자기 인생에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 고통으로 처음에 히스기야는 자기의 처지를 처절히 한탄합니다. 이사야 38장 11절에 보면 히스기야는 '내가 다시는, 다시는'하고 세 번이나 반복하며 하나님과 사람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2절과 13절에도 "나의 명이 조석 간에 마치리로다"하고 두 번이나 강조하며 인생의 한창 때에 죽게 된 것을 서러워했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히스기야의 탄식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절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한 가닥의 희망에 자기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이사야 38장 14절에서 그는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나의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기도는 우리의 망가져 버린 상태를 수선할 가장 좋은 도구입니다. 기도는 우주를 움직이는 무진장한 힘에 우리들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살아날 마지막 방법으로 기도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기도는 보통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얼굴을 벽으로 향한 채 사생결단의 기도를 드렸고(사 38: 2) 울면서 기도했고 눈이 희미해지고 지칠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이사야 38장 15절에 보면 그는 서원기도까지 했습니다. "내가 종신토록 각근히 행하리이다." 생명이 끝날 때까지 겸손히 행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간절함이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을 일하시게 만듭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반응하셨습니다. 이사야 38장 6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15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에 반응하여 그의 수명을 15 년 연장시켜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성을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까지 덤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약속의 신실함을 나타내시기 위해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 물러가게 하는 증거까지 주셨습니다. 덤까지 주시는 하나님! 증거까지 주시는 하나님! 참으로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십니다. 히스기야는 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확신하자 그의 마음속에는 뜨거운 감사가 불타올랐습니다. 이사야 38:17-20 말씀은 병이 낫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를 표현한 글입니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몇 가지 감사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다.

17절에서 히스기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이 고백은 참으로 큰 깨달음입니다. 즉 고통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비롯된다는 말입니다. 병을 통해서 인간의 혈액이 강해지듯이 고통을 통해서 인간의 심령이 강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강하게 만드시려 때로 고통을 지나게 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불행하게만 생각하고 불행은 행복의 전주곡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자꾸만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고통은 피할수록 더 빨리 다가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결국 고통의 뚜껑이 열리면 고통 안엔 진실도 숨어 있고, 자유도 숨어 있고, 삶의 지혜도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고통을 허락하실 때 자유라는, 진실이라는, 삶의 지혜라는 열매를 함께 준비해 두십니다. 어떤 분의 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의 꽃나무가 있다. /잎은 애벌레에게 뜯긴다./ 

꿀은 벌에게 뺏긴다./ 향기는 바람에 날려 보내야 한다. /

얼핏 보기에 이 꽃나무는 모든 것을 빼앗겼다. /

그러나 사실상 이 꽃나무는 잃은 것이 하나도 없다. /

가을이 되면 열매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가장 선한 열매를 주려고 하시며 그 목적을 위해서 때로 어려운 과정도 허락하십니다. 히스기야 왕은 자기에게 닥친 크나 큰 고통이 하나님의 선한 목적으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히스기야의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들은 자기의 현재의 모습 그대로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최선의 모습임을 생각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오직 산 자만이 할 수 있다.

18절과 19절에서 히스기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음부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죽은 자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살았으나 감사를 모르는 자는 죽은 자와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자기들이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야 합니다.

우리들은 인생살이가 쉽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들의 이마에는 땀이 넘쳐야 합니다. 게다가 급격히 변화하는 현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은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 정신없이 달려가야 합니다. 하루하루를 너무나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기도도, 감사도, 사랑도, 심지어는 하늘도 잊어버릴 때가 가끔 있습니다. 마치 모든 것이 우리들에게 어려움을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바쁜 현실마저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자는 감사를 알고 죽은 자는 감사를 모른다는 사실을 한 번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감사하는 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20절에서 히스기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신실을 아비가 그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선생은 학생에게 , 목자는 성도에게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들은 서로 서로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 하면 천성적으로 인간은 감사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인생의 모습은 마치 들꽃과 같아 가만히 놔두면 그들의 마음속에 배은망덕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것은 장미와 같아서 물도 주고, 정성스럽게 기르고, 사랑하고,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감사하는 습성을 끊임없이 마음속에 키워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간적인 감사가 아닌 영원한 감사를 드려야 한다.

20절에서 히스기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이다." 히스기야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겠다고 했고, 감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았으며 일생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로 살아가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순간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며 그분의 무한한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은 인생들의 깨달음을 감싸고 있는 껍질을 깨뜨리는 도구입니다. 고통이란 인생들의 병든 자아를 고치는 의사의 쓴잔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의사이신 하나님을 믿고 묵묵히 그 잔을 마시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이것을 나에게 주십니까? 감사합니다. 주님! 이 쓴잔을 나에게 허락하십니까? 감사합니다."

조선일보 이규태 논설위원이 그의 글에서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병은 감사 결핍증이라고 지적을 했습니다. 어느 가게에서 물건을 사 가지고 돌아설 때 감사하다는 말 대신에 '또 오십시요'라는 이기적인 인사를 하고,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 주면 '고맙습니다'라는 말 대신에 '신난다'라는 말이 앞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쓰는 용어 50개중에 28%가 `감사하다'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새 신발을 샀을 때는 감사하면서 두 발 갖고 있다는 사실에는 감사할 줄 모릅니다. 우리는 새 장갑을 산 것에는 즐거워하면서 두 손을 주신 하나님께는 감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은 항상 작아 보이는데 남이 가진 것은 왠지 커 보입니다. 우리 속담에 손 안에 있는 한 마리의 새가 숲 속에 있는 두 마리의 새보다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내가 가지고 있는 직분, 가족, 은사, 사명, 일 등 모든 것은 주님 안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다른 사람과 절대로 비교하지 마십시오. 감사거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감사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지 말고, 얻은 것을 생각하십시오. 건강을 잃어버렸어도 믿음을 얻을 수 있고, 명예를 잃어버렸지만 겸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잃어버린 것들이 있을지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작은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일 때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너무나 큰 것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심령은 채울 길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는 심령은 돈이 있어도 불평이고 돈이 없어도 불평입니다. 그 심령은 관심을 기울여 주어도 불평이고 관심이 없어도 불평입니다. 우리들은 감사하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같은 물이라도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됩니다. 똑같은 사건 속에서 감사가 없는 심령은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나, 감사가 있는 심령은 기쁨을 발견하고 감사합니다. 우리는 감사를 연습해야 하겠습니다. 환경이 나에게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사를 드림으로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모든 조건과 상황을 초월하여 하나님이 하실 일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실패했는데 매일 싱글벙글 하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실패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고, 반대로 성공했는데 매일 같이 불평 충만하다면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최악의 상황과 조건이라 할지라도 긍정적인 생각과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무장한다면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넉넉히 살 수 있으며, 뿐만 아니라 깊은 수렁에서도 충분히 찬송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생각과 가치 기준에 따라, 우리는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며 불행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나 환경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런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기준과 세속적인 가치관 때문에 힘들어 하고 어려운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감옥에서도 실라와 함께 이중창으로 찬송의 하모니를 이루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감옥이냐 궁궐이냐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의 방향입니다. 지나간 삶을 회고해 보면 하나님은 결코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은혜를 깨닫고 첫 열매를 드림으로, 물질과 시간을 드림으로, 그리고 온 몸 전체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는 산 자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감사는 축복의 기초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십니다. 다음 주일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축복 된 삶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감사로 축복의 기초를 놓으시기 바랍니다. (서 정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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