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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팥죽 한 그릇 인생(창 25: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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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 한 그릇 인생 (창25:27-34)

                               

야곱의 처 리브가의 태중에는 에서와 야곱이 자라고 있었다. 둘은 한 배에서 서로 싸우며 나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예언하셨다(창25:23, 말1: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롬9:11-13절에도 리브가의 태중에 있는 아이들 중에 야곱을 선택하시고 사랑한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속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에서가 장자로 태어나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동생 야곱이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고 사냥에서 돌아온 형의 배고픔을 이용해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사는 간교함이 있었고 이삭이 죽기 전에 별미를 먹고 축복하려하자 에서가 사냥을 나간 사이에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으로 염소새끼를 잡아 별미를 만들고 몸에 털로 분장하여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는 거짓됨이 있었으나 성경은 야곱의 잘못과 부도덕성을 지적하기 보다는 에서를 어리석고 망령된 자(히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로 표현하고 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 때문에 망령된 자가 되었고 미워하는 자가 되었으며 야곱은 팥죽 한 그릇 때문에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영적인 장자가 되고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되었다. 팥죽 한 그릇에 담긴 그들의 인생의미와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첫째, 육적인 인생을 말한다(창25:27).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으로 자라나서 들사람이 되었다.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였으며 장자 에서를 사랑하였다.  남자답고 활동적인 그의 성격은 자신을 세상적이고 육적인 삶에 관심을 갖게 하였고 급기야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게 되었고 후에는 장자의 축복마저도 야곱에게 빼앗기게 된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 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일이 세상적으로 결론이 나서는 안 된다. 사냥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들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취미와 직업이 세상의 쾌락과 만족을 따라 세속화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세상을 사랑치 말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신다. 세상은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종국에 심판을 받을 것이기에 여기에 빠지면 같이 망할 수 밖에 없다. 에서는 어릴 때부터 세상의 쾌락과 만족에 길들여지고 심취하다보니 영적인 일에 소홀해지고 관심이 멀어지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영적인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팥죽 사건이다.
에서는 분명히 영적인 경건한 자손으로 출생하였지만 그의 직업으로 인해서 점점 더 세속적인 것으로 물들어 갔고 변질되어 갔다. 밭과 토양은 좋은데 가꾸고 돌보지 않아 점점 황폐한 땅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직업도 잘 선택하고 잘 가꾸어나가야 세속적이지 않고 영적으로 관리되어진다. 세상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열중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과는 그 만큼 더 멀어지는 것이다.
거룩하고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어떤 직업이든지, 어떤 형편이든지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조건으로 만들고 관리해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라 이것이 세상을 이기고 욕망을 제어하는 좋은 방법일 것이다.
에서처럼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복에 대한 것 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선호하고 가치를 두기에 육체의 허기를 채우는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영적인 축복과 은혜를 가볍게 여겨서 맞바꾸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는 것이다. 정말로 자신에게 필요한 생명의 양식을 알지도 먹지 못하고 썩을 양식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이다.

어떤 여행객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영국의 한 해변을 찾았습니다. 그는 휴가철을 넘긴 후라 한적하고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즐길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여행객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완전 딴판이었습니다. 수많은 갈매기들이 모래사장 위에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여행객은 죽은 갈매기들을 치우고 있는 사람에게 갈매기들이 죽은 원인을 물었습니다. 갈매기를 치우던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여행객들이 던져준 과자와 사탕들 때문이지요. 갈매기들은 그 달콤한 먹이들을 받아먹다가 그만 자연먹이에 대한 식욕을 잃어버리게 됐고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긴 후에도 여행객들의 달콤한 먹이만 기다리다가 굶어죽은 겁니다.”

우리도 때때로 주위로부터 달콤한 유혹을 경험한다. 그러나 기억하시라. 그 달콤함에 탐닉하는 것이 때로는 우리에게 영혼의 배고픔을 채울 수 있는 좋은 양식들을 잊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위의 예화를 통해 보듯이 세상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살다보니 정작 영적인 입맛을 잃고 허기진 배를 움켜잡으며 굶어 죽어가는 갈매기의 신세가 되지 말아야 한다.

미장원에서  한 여자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예전에 시골에서 교회 다닐 때 학습도 받고 세례도 받았고 성가대에서 찬양도 하였는데 지금은 교회를 안 다닌다고 하였다. 이 동네에서 한번은 전도를 받고 총동원주일 때 한 번 교회에 나가 봤는데 아무런 느낌도 없고 생각도 없이 앉아서 천장에 있는 등을 세어보다가 나왔다고 웃으며 이야기 하길래 제가 물었습니다. 그래, 전등은 몇 개든가요?  고3짜리 아들은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밥먹을 때 기도도 잘 한다는데 본인은 신앙에 대한 갈증도 관심도 전혀 없는 세상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은 세상에서 마귀가 주는 달콤한 음식에 영적인 입맛을 완전히 잃어 영적기아로 죽어가는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세상의 줄을 끊고 주님의 말씀으로 입맛을 회복해야 살 수 있다.

바울은 육신을 위한 삶과 영을 위한 삶을 비교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육신을 쫒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8:5-8)

둘째, 영적인 인생을 말한다(창25:31).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을 받은 야곱은 종용한 사람으로 장막에 거하였고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기질적으로 여성적이고 가정적이며 순종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에서와 확연히 다른 영적인 기질이 있다고 여겨진다. 야곱의 성품과 행동이 에서에 비해 결코 낫지는 않지만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붙드는 근성과 승리에 대한 집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성도에게는 야곱과 같은 영적인 기질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붙들고 놓지 않는 끊질긴 근성과 하나님의 축복과 응답을 반드시 받겠다는 승리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또한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뺏앗는다(마11:12)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일에 양보하고 체면차리기 보다는 거룩한 욕심과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한다.

마19:30절과 20:16절에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말씀이 나온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혈통이나 서열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에서가 먼저 나오고 받았지만 그 가치와 귀중함을 잃어버리고 세상적으로 살아가면 나중에 나온 자일지라도 영적인 축복과 특권을 사모하고 찾고 구하는 자에게 빼앗기게 된다는 귀중한 교훈이다.
베드로는 한 부자 청년의 실패(재물이 많음으로)를 예수님께로부터 듣고 의기양양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으니 우리가 얻을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에 주님께서는 이같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28-30)
그리고 20장에서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를 통해서 동일한 말씀을 하신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0-16)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았다면 멸망받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천국의 잔치에 초대 받아 구원의 기쁨을 받았음에도 주인에게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고 타인과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린다면 나중 된다는 것이다. 먼저된 자는 에서처럼 나중 되지 말고 나중 된자는 야곱처럼 은혜를 향한 갈급함과 사모함과 뜨거운 열정으로 먼저 되는 축복을 받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팥죽 한 그릇의 일반적 가치는 에서와 야곱에게 똑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담겨진 가치는 서로의 가치관과 관점에 따라 상이할 수 있다. 육적이고 세상적인 사람 에서에게는 보이지 않는 장자의 명분 보다는 자신의 육체의 허기를 채우는 붉은 팥죽이 더 급했던 것이고 야곱에게는 평소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갈급함을 갖고 있었기에 팥죽 한 그릇은 자신의 영적인 거룩한 욕심을 채우는 방편으로 사용된 것이다.
팥죽 한 그릇 때문에 더 좋은 것을 바꾸는 에서의 어리석은 인생보다 장자의 명분을 위해서라면 배고픔도 참고 팥죽을 파는 야곱과 같은 지혜롭고 축복된 인생이 되어야 한다.(양지교회 이제성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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