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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또 하나의 잃어버린 아들 (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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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월(指月)이란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의 품속에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런데 아들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손가락 끝만 쳐다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오늘 본체, 진실, 속, 알맹이, 핵심은 잃어버린 채 껍데기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예수님께서 가리킨 달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무엇일까? 그런데 혹시 우리는 그 손가락 너머가 지시하는 진리를 보지 않은 채 우리 눈앞에 있는 손가락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월이라는 그 우화 속에 나오는 어리석은 아들은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오늘 예수님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이요, 언제 무엇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신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소원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을 나도 하는 것이다. 이제는 나의 소원과 나의 만족을 버리고 하나님 그 분께서 원하시는 일을 나도 행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나도 하면서 기쁨으로 충만케 되는 일이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의 마음은 3가지의 비유 속에 잘 나타난다.

첫 번째 비유는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비유이다. 둘 째 비유는 잃은 드라크마(동전)을 찾은 여인의 비유이고, 세 번째 비유는 잃은 아들을 다시 찾은 아버지의 비유이다.

이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모두 다 무엇인가를 잃었다가 다시 찾는다는 것이요, 찾았을 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이 비유들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비유들이다. 하나님이 가장 가슴아파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품에 있어야할 영혼들이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그 잃어버렸던 영혼들이 다시 돌아와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괌에서 비행기 사고가 일어났었다. 그 사고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사고로 우리는 장래가 촉망되는 한 정치인을 잃었다. 신기하 의원이었다. 그 분은 정치에 문외한 이었던 저에게도 매우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가슴을 더 아프게 한 것은 그 일이 있은 다음에 있었다. 그 신기하 의원의 늙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 날부터 이 노모는 가슴을 치며 슬퍼하고 괴로워하다가 곡기를 끊은 지 50일 만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그 분에게는 아들딸도 많고 손자도 많았다. 그 아들이 죽었다고 해서 당장 외로움에 사무치는 것도 아니고, 생명을 버릴 만큼 슬퍼할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머니의 마음에는 먼저 간 아들 밖에 없었다.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이라면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기에 결국 그 분도 아들의 뒤를 따르고 말았다. 어쩌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이와 같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마음은 교회 밖에 더 많이 가있음을 본다. 이상하고 희한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우리 생각에는 예수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찬양하는 교회에 하나님의 마음이 더 있지 않을까, 또 그런 교회를 보시면서 하나님은 기뻐하며 즐거워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다. 하나님의 마음은 믿는 이들에게 와 있고,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고 어둠 속에서 헤매며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고 계신다. 그들을 보면서 오늘도 매우 안타깝게 여기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목자처럼 험한 산길을 헤매며, 길거리를 헤매며, 유흥가를 헤매며, 빈민가를 헤매며, 불쌍한 사람들이 눈물짓고 있는 곳을 헤매면서 잃은 양과 잃은 동전과 잃은 아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잃은 영혼들을 찾기 위해서는 결코 그 발걸음을 포기하시지 아니하신다.   

세 가지 비유의 결론은 각각 7절과 10절과 24절이라고 볼 수 있다. 각각의 상황과 내용은 다르지만 결론은 이것이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찾았을 때 너무 기뻐서 그 주인과 아버지는 잔치를 벌인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 세 번째 비유는 사실상 24절에서 끝나도 된다. 오히려 24절에서 끝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25절에서 비유 속에 또 하나의 비유를 삽입한다. 맏아들에 대한 비유이다. 이 맏아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이 세 가지 비유를 누구와 이야기할 때 나누었던 비유인가를 보아야 한다.

(눅 15:1-3)에 보면 세리와 죄인들과 늘 함께 계셨던 예수님을 향해서 “죄인들을 영접하고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비방했던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은 제 1차적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혹시 우리들은 맏아들에게 해당되지 않을까? 여러분은 고민해 보셨는가? 진지하게 나의 모습을 이 맏아들 속에서 투영시켜 보았는가?

  무서운 질병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질병이다. 피부에 상처가 나고 팔이 부러지면 고치기는 쉽다. 그것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치기 어려운 질병이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어있는 질병이다. 그래서 암이 무서운 질병이다. 그것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엑스레이를 찍어도, 씨티를 찍어도 때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꼭꼭 숨어 있다. 그래서 무섭고 고치기도 어렵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서운 것은 숨어있는 영적인 질병이다. 겉으로 깨끗하게 드러나면 아무리 심해도 고칠 수 있는데 숨어있는 영적인 질병은 고치기 어렵다. 내면에 깊이 감추인 내적인 질병은 고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집을 나간 탕자보다 집 안에 있었던 맏아들의 질병이 더 고치기 어렵다. 우리는 맏아들과 같은 내면의 질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과연 맏아들과 같은 사람은 아닌가?

  맏아들은 착실하다. 그는 아버지의 명을 어긴 일이 없고, 지금까지 아버지의 명대로 살아왔다. 그는 동생처럼 아버지를 떠난 적이 없고, 아버지의 집을 떠난 적도 없다. 그는 밭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는 내면의 깊은 질병을 앓고 있었다.

  우리들 대부분 역시 타락한 적이 없다. 교회를 떠나 본 적도 없다. 큰 죄 저지른 것도 없고 오랜 세월 신앙생활 잘 해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해라.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던 이 맏아들에게 오히려 숨겨져 있는, 그래서 더 크고 더 질기고 더 위험한 내면의 질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을.....
 
  맏아들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1) 아버지에게 물어보지 않고 종에게 물어봄(25-26절) -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그가 평상시에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가로막힌 담과 같은)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우리에게 이런 모습은 없는가? 하나님에 대한 불평불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는 없는가?

2) 화를 내며 집안에 들어가기를 거절함(28절)

3) 아들의 대답(29-30절)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① 아버지를 섬겨(섬겼다(헬, 둘류오/ 명사형 둘로스(종) ) ": 자신의 입으로 실토

“내가 그동안 아버지를 섬겨왔는데 나는 그 동안 종으로(노예로) 살아왔다.”

아버지로 섬겨온 것이 아니라 다만 노예로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하며 살아왔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해서 기쁨으로 일하면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다만 종으로서, 이렇게 괴로워하며, 억지로, 차마 못해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가?

※ 오늘 우리에게 이런 모습은 없는가?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는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는가? 종으로서 살아가는가?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은 그 분이 내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요 우리의 구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은 그 분이 나를 구원해 주셨고, 사랑해 주셨기 때문이다. 오직 감사한 마음으로 충성하고 봉사할 뿐이다. 여러 해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일한다고 해도 우리는 부족하고 송구할 따름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가? 큰 아들처럼 종살이하듯 억지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② “내게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신 일이 없다”고 불평

“나는 의롭고 수고도 많이 했는데 받은 것이 없다”는 불평이다. 받은 것이 전혀 없다고 한다. 은혜의 눈으로 보면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받지 못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은혜를 잃어버린 자는 나만 소외된 것 같고, 나만 버림받은 것 같지만 은혜 안에 들어가면 나만큼 축복받은 사람도 없고, 나만큼 많이 받은 사람도 없다. 이대로가 다 하나님의 은혜요, 이대로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맏아들의 입장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모든 것이 다 자기의 것이다. 아버지도 말한다. “나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그런데 아무 것도 안 주었다니, 내가 아무 것도 받은 것이 없다니 무슨 말인가?

※ 오늘 나는 이런 모습은 없는가? 내가 종으로 살아가면 나는 아무 것도 받은 것이 없다. 그러나 아들로 살아가면 그 분의 모든 것은 다 나의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종이 아니라 아들로서(자녀로서)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풍성한 복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③ 끝까지 ‘동생’이라고 부르기를 거절한다. 종도 동생이라고, 아버지도 동생이라고 부르지만 그는 끝내 동생이라고 부르기를 거절하고 "이 아들"이라고 부른다.

나는 너와의 더 이상의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네가 돌아왔지만 나는 더 이상 기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여러분은 한 명의 새 신자가 왔을 때 얼마나 기뻐하는가? 그 사람이 전혀 예수님을 모르다가 우리교회에 처음 나오게 되었을 때 여러분에게는 얼마만큼의 기쁨이 있는가? ‘한 명이 또 왔나보다’ 이렇게 생각하고, 목사님의 선창에 따라 의미 없는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우리가 한 영혼이 돌아왔을 때 기뻐하고, 잔치를 베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쩌면 그 집을 나간 탕자보다 더 철저한 탕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집 밖에 있는 탕자보다 집 안에 있는 탕자가 더 심각한 탕자였다. 집을 나가 방탕하고 깨지고, 무너진 탕자보다 집 안에서 견고하고 버티고 있었던 탕자가 더 질기고 심각한 내면의 질병을 앓고 있었던 탕자였음을 우리는 본다. 이제 우리는 내가 집 안에 있었던 또 하나의 탕자였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일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일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먼저 믿은 우리들을 통해서 그 잃은 양과 잃은 동전과 잃어버린 자녀들을 찾기를 원하신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 성령은 우리에게 임하자마자 우리로 예수님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들을 찾고 계신 여러분! 하나님은 무엇으로 기뻐하실까? 많은 헌금, 불같은 헌신, 대가 없는 헌신, 경건한 예배....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기뻐하시지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따로 있다.

  신기하 의원의 노모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일이란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오는 일인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은 전도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원한다면 전도하라.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이상하게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다. 신앙생활 하면서도 나밖에 모르고, 내 이익 밖에 모른다. 더 불행한 것은 그런 사람일수록 신앙생활을 더 잘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고, 또 우리는 그런 사람의 신앙이 좋다고 생각한다는데 있다. 집안에 예수 믿지 않은 사람이 있어도 일 년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전도하지 않는다면, 그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심한 이기주의인가?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기뻐하실 수가 없다.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아버지의 애타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찾아나서는 간절함이 없다면 우리는 또 다른 탕자이다. 잃어버린 영혼이 주님께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심정과 같이 기쁨으로 응답하지 않고, 또 우리 안에서 그 영혼구원의 기쁨을 늘 새롭게 창조해내지 못한 다면 우리는 집 안에 웅크리고 있는 또 하나님의 탕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기쁨 되기 원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 속에서 왜 그토록 아버지가 기뻐하시는지 기쁨의 이유와 기쁨의 정도와 기쁨의 가치를 바라보라.

그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모두 탕자일 뿐이다.     
(이양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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