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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행 1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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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바울은 자기 당대에 전 세계를 복음화하려는 열정을 가지고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대륙을 횡단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고린도에서 선교하는 바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두 번째로 세계를 복음화하려고 여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럽으로 건너가서 먼저 빌립보교회를 개척하였고, 이어 데살로니가교회와 베뢰아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일어나 바울 일행을 핍박하는 바람에 교회를 설립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머물게 하고는 아덴으로 떠났습니다. 

  아덴에서는 아레오바고라는 광장에서 스토익학자와 에피큐러스 학파의 학자들과 토론하면서 전도하였지만, 교회가 설립될 정도로 개종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덴이라는 도시는 각종 우상으로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신'이란 이름의 제단이 있었습니다.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라는 말씀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을 향한 의분이 일어났습니다.  분노가 일어나서 전도하다보니 복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토론을 벌였습니다.  한마디로 철학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였다는 말입니다.  분한 마음이 일어나 쟁론을 벌인 결과 도시의 지식인들이 바울에게 붙여준 별명이 있었는데, "말쟁이"였습니다.  말쟁이란 말은 "말로 쪼아대는 참새"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17:16이하 마지막 절까지가 아덴의 전도를 기록하는데, 복음을 전했다는 말은 없고, 철학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쟁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베뢰아교회를 설립할 때에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고 주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뜨거운 열정은 사라지고 그동안 갈고 닦은 지식을 가지고 충돌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을 보았다고 하면서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하였는데, 그런 접근이 잘못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의 접촉점을 잘못 잡았습니다.  인간의 유한성과 복음의 영원성을 강조하여야 합니다.

  알지 못하는 신이란 유일신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신을 다 섬기다가 혹시라도 어떤 신을 빼놓았거나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면 다칠 것으로 생각하여 "알지 못하는 신"이란 제단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신인데, 이름도 붙여드리지 못하였거나 미처 제물을 드리지 못하였으니 노여움을 풀라는 뜻으로 두루두루 모아서 붙인 제단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립묘지에 보면 무명용사탑이 있습니다.  전사자의 이름을 새겨드리고, 위패라도 모시지 못하고 어느 산하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용사들을 다함께 기리는 것이 무명용사탑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창조주 하나님,,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내세우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하는데 도입이 잘못되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을 알게 해준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하였으니,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아덴 설교를 읽어보고 자세히 연구해보면 맥빠진 설교였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증거할 때는 확실하게 한 가지만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는 복음을 제시해야 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단순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어떤 철학적인 방법과, 논리적인 연구나 심리학적인 방법, 사회학적인 접근, 이런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멀리하게 됩니다.  사람들과 토론하고 쟁론하다보니 예수 십자가의 복음은 멀리 사라지고 마는 것을 봅니다.  사도바울은 딤전6:20에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변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변론을 피하라, 아는 척 하지 말아라. 철학적으로 강의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복음만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바울은 아덴을 떠났습니다.  아덴에서 몇 사람이 바울을 가까이하여 믿었는데, 아레오바고의 관리 디오누시오, 다마리라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덴이란 도시에 교회를 세웠다는 말은 없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도 치욕적인 결과였다고 봅니다.  그가 어디를 가든지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였는데, 아덴에서는 실패하였습니다.

  고린도란 도시는 그리스 발칸 반도의 남부지방을 아가야라고 불렀는데 아가야 지방의 수도와 같은 대도시였습니다.  고린도는 테에베, 아덴, 스팔타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중에 맹주였습니다.  그러던 도시가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페허가 되어 방치되었다가 옥타비아누스 황제에 이르러 아가야의 수도가 되면서 재건되어 인구 60만명이 사는 대도시가 되었습니다. 

  이곳 고린도에도 올림픽 경기와 비슷한 이스므스 경기가 있었고, 로마의 검투 경기를 받아들인 도시였습니다.  당시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지만, 고린도의 정신계는 암울하였고, 무질서하였습니다.  이 곳은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졌으며, 도시 전체가 음란하였고, 타락하여 방종하였습니다.  고린도 산에는 사랑의 여신이라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에 1천명의 여사제들이 있어 그들은 종교를 가장하고 합법적인 창녀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도시에 도착한 바울은 심히 약하고 두려워 떨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3-4)고 했습니다.

  사도는 자기의 지식이나 철학적인 입장이나, 지혜로운 말로 전도하지 않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였습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을 드러내고, 지식을 의지합니다.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시고 돌아오신 목사님들을 강단에 세우면 한 분도 예외 없이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사람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도 마찬가지로 자기가 유학 다녀왔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고, 그의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모든 것을 버리고, 새 사람이 되고, 과거의 삶을 벗어버렸다고 하지만, 사실은 잠시 눌러놓은 것이지요, 불쑥불쑥 옛사람이 살아나고 자기 자랑을 늘어놓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이 원하신 방법대로 해야하지 인간적인 수단방법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다는 사람이 "말쟁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전도의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내려왔을 때에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좋은 교인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역 중에 목회라든지, 선교나 전도에 있어 성공하려면 좋은 동역자를 얻어야 합니다.  동역자라고 하니 같은 교역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목사님들과 동역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사에 있어 좋은 일꾼이었다고 두고두고 기억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참으로 아름답게 기억되고,  좋은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동역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목사가 일생의 목회를 마치고 자서전을 기록할 때에 참으로 힘이 되어주었고, 힘과 위로가 되어주었다고 꾸밈없이 말할 수 있는 동역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내가 죽고 나면 성목사가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우리 하나님앞에 가서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 아굴라와 부리스길라는 참으로 귀한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아굴라는 본도 지방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는데 그는 로마의 여성인 부리스길라와 결혼하였고, 그녀는 유대교로 개종하였습니다.  이들 부부가 로마에 살고 있었는데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유대인들은 로마에서 떠나라는 명을 받아, 고린도로 이사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부부의 직업이 천막을 만들고 천막을 수리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마침 바울과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어, 서로 어울리면서 고린도교회를 개척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들 중에 공부를 많이 하신 학자였지만, 그는 수공업 기술자이기도 했습니다.  천막을 제조하고 수리하는 천막업자였습니다. 

  유대인의 장점의 하나는 자식들에게 지식과 재산을 물려주기도 하지만 자녀들에게 직업교육을 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고, 단순한 돈을 물려주지 않고 돈버는 기술과 함께 물려주었습니다.  지금도 올바른 사고를 가진 부모라고 하면 돈을 벌고 돈을 모으는 기술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굴라와 부리스길라는 어디를 가든지 그의 집을 교회로 제공하였습니다.  롬16:3-4을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들 부부는 후에 사도바울을 따라 에배소에 갔었고, 후에는 로마로 돌아가 그의 집을 교회로 제공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에 갇혀 있을 때에 도움을 주었고, 시중을 들다가 그들도 순교하였으며, 초대교회로부터 성자의 칭호를 얻었습니다. 

  바울은 안식일마다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강론하면서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때에 베뢰아에 머물고 있던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내려와서 바울과 합류하면서 바울은 더욱 힘을 얻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언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이곳 고린도에도 유대인들은 바울을 비방하고 대적하였습니다.  그 때에 바울은 그의 옷을 털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나와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파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유대교로 개종하였다는 말인데, 그는 개종자였던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교회를 시작하였는데, 그 집은 회당의 옆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회당장의 한 사람이었던 '그리스보'라는 사람이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고린도에서 한참 전도하고 있을 때에 밤에 주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얼마나 큰 힘과 위로를 받을 것입니까?    주님은 복음 전도자들과 함께 하시고 능력을 주시고 위로를 주십니다.  바울은 아가야 지방의 수도요, 대도시인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고린도교회를 일으켰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증언한 말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겠습니다.  5절 말씀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라고 했습니다.  "붙잡혔다"는 말은 그리스어 '쉬네코'라고 하는데 결합하다, 포위하다, 억압하다는 말인데, 쉬운 말로 의역한다면 "사로잡혔다", "포로되었다", "둘러 쌓였다"는 말입니다.  "붙잡혔다"는 말도 아주 좋은 번역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붙잡혀야 인생을 잘 살고 열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에 포로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성에 붙잡힌 사람, 물질에 붙잡힌 사람, 학문에 붙잡힌 사람이 있지만, 우리는 예수님에게 붙잡힌 사람이요, 말씀에 포로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울이 사는 이유는 복음이 있었고,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사는 이유요, 죽은 이유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빌3:12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잡혀진 사람들이요, 이제는 우리가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지금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습니다.  말씀의 기계로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말씀에 고용된 일꾼에 불과하였습니다. 

  여러분, 포로가 된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지난 9월 초에 있었던 시무권사회 수련회 첫 날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기념관으로 잘 꾸미고 가꾸어 거제도를 찾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볼만한 곳이 되었습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란 곳은 그래도 자유가 있었습니다.  남한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북한으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삼국으로 갈 것이냐 몇 개의 선택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 포로가 되었다는 말은 자유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소유도 없다는 말이 됩니다.  붙들렸다는 말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생명을 내어놓고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사로잡힌 사람이요, 말씀에 붙잡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환상 중에 나타나신 주님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합니다.  깊이 새겨두고 기억해야 합니다.  '나같이 믿음이 없고, 난 혼자 겨우 믿는 사람인데, 누구에게 가서 예수 믿으라고 전할 수 있는가, 좋은 행위로 본을 보이면서 살기가 하자'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엄청난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거룩하고 진실하게 살아서 나를 보고 예수 믿을 사람이 생기겠습니까?  여러분, 나의 거룩한 행실을 보고 예수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교만하고 바르지 못한 자세입니다.  나 같이 부족하고 모자라는 사람도 예수 믿어 구원받았다고 말해야 다른 사람도 믿을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난 후로 정말 거룩하고 진실하고 좋은 인격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내 행실을 보고 믿으라고 한다면 평생 예수 믿으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침묵하고 있으면 어떤 사람이 예수 믿을 것입니까?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격려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그런데도 잠잠할 것입니까?  우리가 나가서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전하기만 돌아올 사람들, 구원받도록 예비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하면 됩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려고 미사여구를 쓸 것도 아닙니다.  고상하고 재치 있는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입니다"라고 전파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를 바랍니다.
(성 홍 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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