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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동체의 기억과 기대 (출 2: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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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출 2: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출 2: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1. 사람들의 탄식에 함께 공감하는 사회적인 공동체 형성이 필요하다.

오늘날 사회가 다원화되고 다양화되면서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한 집단의 고통과 탄식이 다른 집단의 마음에는 고통과 탄식으로 다가가지 못합니다. 따라서 그 고통과 탄식에 대한 공통적인 문제 인식이 어려워집니다. 그 문제의 해결 방식도 서로 상충되어집니다. 사람들의 탄식에 함께 공감하는 사회적인 공동체가 형성되지 못할 때 그 공동체는 파멸의 길을 걷습니다. 공동체의 공통 경험이 사라질 때 공감대 형성은 어려워지며 사회는 분열되어집니다.

작게는 한 가정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공통 경험이 무시되거나 사라질 때 가정의 회복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가정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최대한 생일이나 명절 등 가정의 각종 절기들을 이용하여 공통 경험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또한 그러한 공통 경험을 만들기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며 함께 여행도 다니고, 함께 문화생활도 하고, 함께 어떤 사역을 감당하기도 합니다.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가며 최대한 공통 경험을 축적하여, 가족 공동체의 공감대 형성을 위한 기초를 쌓습니다.

한 교회 공동체나 국가와 사회 공동체의 속성도 가정 공동체의 속성과 다르지 않습니다. 평소에 공통 경험을 쌓지 않는 한 어떤 한 순간에 나타나는 사건이나 사물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나 문제 해결은 어려워집니다. 공통 경험 속에서 공감대가 형성되는 공동체는 사건이나 사물을 통하여 더욱 아름답고 견고한 공동체로 성장해 갑니다. 그러나 공통 경험이 빈약하여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하는 공동체는 사건이나 사물을 통하여 갈등이 증폭되며 분열과 싸움 속에서 더욱 큰 신음 속에 빠집니다.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이러한 공동체적 경험의 문제가 쉽게 드러납니다. 애굽은 7년의 대 기근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야곱의 아들 요셉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한 야곱의 모든 집안도 애굽의 그늘 아래서 기근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창 47:27에 보면,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하며 거기서 산업을 얻고 생육하며 번성하였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애굽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은 기근 속에서의 공통 경험을 통하여 아름다운 동행을 하였습니다.

애굽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은 공통 경험을 통한 공감대 속에서 수백 년 동안 공존할 수 있었습니다. 한 공동체 속의 두 집단이지만 공통 경험을 통한 공감대 속에서 모든 문제를 함께 인식하며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며 문제가 생겼습니다. 성경은 그 원인을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출 1:6에서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라고 하십니다. 둘째는 출 1:8에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라고도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도 공통 경험이 사라졌고, 애굽 민족들 속에서도 공통 경험이 사라졌습니다. 두 집단 모두 공통 경험을 소유한다면 아름다운 동행이 가능할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며 어느 한 집단만이라도 그러한 공통 경험을 기억한다면 힘든 싸움 속에서라도 공존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 집단 중 어느 한 집단도 공통 경험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공감대 형성은 어려워집니다. 한 집단의 탄식이 다른 집단의 마음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 대적이 되어질 뿐입니다.

공통 경험을 통한 공감대가 사라진 애굽과 이스라엘의 충돌과 갈등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공감대가 사라진 두 집단의 갈등과 문제를 자신의 지식과 능력과 힘으로 해결하려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 속에 암매장 하는 범죄였습니다. 모세는 그 사실이 세상에 드러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동족들에게조차도 그 사건이 용납되지 못하자 미디안 광야로 도피해야 했습니다.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 공동체 속에서 인간적인 문제의 해결 방식은 오히려 갈등과 싸움을 더 증폭시킵니다. 공동체의 정의를 생각하며 움직이는 사람들은 모세처럼 범죄자가 되어 도피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과 사회 등 각종 공동체마다 모세와 같은 도피자가 양산됩니다. 서로 함께하기는 하지만 서로 도피자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탄식에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인 공동체 형성이 필요합니다.

2. 하나님과 함께하는 공동체 경험이 기억될 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

우리들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며 다양한 조직이나 프로그램을 구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을 통한 공감대 형성 과정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피자로서의 소외를 경험하며 깨어진 공동체 속에서 고통을 당하며 신음합니다. 서로를 공감하지 못하는 공동체 속에서 소외를 경험하며 부르짖는 신음소리가 점점 더 커져가지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며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듭니다. 그렇게 공감하지 못하는 공동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공통 경험 속에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공감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출 2:23은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 해 후에”란 모세가 두 집단의 문제를 인간적으로 해결하려다가 실패하고 도피한 후 40년이 되는 때입니다. 즉 두 집단의 공감대 실패 문제를 인간적으로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가 사라진 때를 의미합니다.

공동체의 공감대가 사라질 때 세상의 약자들은 강자들로부터 일방적인 고난과 핍박을 당합니다. 그 탄식과 신음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커집니다. 그러나 약자들의 탄식 소리가 강자들을 향하여 외쳐지거나 어떤 인간적인 방편을 향하여 외쳐질 때 하나님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의지처를 의지하는 탄식소리의 결과가 자신들에게 더욱 큰 핍박과 학대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알도록 허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약자들이 다른 모든 의지처를 포기하고 외칠 때에야 귀를 기울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고역 속에서 비로서 자신들의 모습을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서 응답을 받았습니다. 출 2:23은 첫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였다”고 증언합니다. “탄식하다(아나흐)”란 한숨쉬며, 신음하는 것입니다. 탄식은 자신들이 놓여진 현실을 바라보며 현실의 비참함을 인정하는 신음소리입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소리입니다. 애굽 민족과 이스라엘 사이의 공감대 상실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에 대한 고백의 소리입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었다”고 증언합니다. “부르짖다(자아크)”란 소리 지르며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애굽도 아니며, 모세와 같은 동족의 지도자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축복을 약속하셨던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수백 년 전에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공통 경험인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자신들의 탄식하는 삶의 현실을 호소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의 절망적인 삶을 인정하며, 그 삶의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만 도움의 요청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의 공통 경험을 근거로 호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자신의 모든 마음과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수백 년 전에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경험하셨던 공통 경험의 통로를 통하여 들려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마음과 귀를 여셨습니다.

세 번째로 출 2:23은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하였다”고 증언합니다. “상달하다(아라)”란 들어 올려진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하는 고통의 신음소리가 하나님께 전달되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며, 하나님께만 구원이 있음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을 향해서만 부르짖는 간구가 상달된 것입니다.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공통 경험을 갖고 계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구가 하나님의 마음에 전달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반응도 공통 경험을 기억하신 것입니다. 탄식하는 상황의 해결이 응답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창 2:24-25는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라고 하며 하나님의 반응을 네 가지 순서로 설명합니다. 그 첫째 반응은 “들으셨다(솨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의 소리를 경청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반응이 “기억하셨다(자카르)”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입니다. 여기서 “그 언약”은 “그의(His) 언약”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하나님의 공통 경험의 핵심인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취하시는 세 번째 반응은 “보셨다(라아)”이며, 네 번째 반응은 “아셨다(야다)”입니다. 관찰하고 발견하여 알고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두 단어를 우리말로는 “권념하셨다”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였습니다.

3. 하나님과의 공동체적 경험의 기억이 사회적인 기대로 나타나야 한다.

자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반응은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보시며, 아시는 순서”로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공통 경험을 근거로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상태를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어김없이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며 들으시고, 우리와 함께하셨던 공통 경험을 기억하시며 우리와의 공감대 속에서 우리를 관찰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모습을 정확히 아시고, 우리를 위해 움직여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하는 상황을 아신 하나님의 움직임의 역사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과 하나님의 반응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현실적인 어떤 행위가 아닙니다. 현실적인 어떤 조치나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과거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유했던 공통 경험의 기억입니다. 이 기억을 통한 공감대 형성이 부르짖음과 응답의 연결고리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공통 경험의 기억을 통한 공감대로부터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기억(자카르)”이란 단어는 단순한 암기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공통 경험을 전제로 하는 공감대를 회복시키는 단어입니다.

“기억(자카르)”이란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가 “사람과 동물의 수컷, 남성(자카르)”이라는 단어입니다. 자음 단어가 동일하며 모음 발음만 약간 차이 나는 단어입니다. 수컷은 제물로 드려지는 동물의 수컷을 의미하며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할례 받은 남성을 강조합니다. 즉 제사나 할례를 통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하나가 된 공동체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남성이나 수컷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과의 공통 경험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과 하나 된 공동체로서 누렸던 경험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영어도 “remember(기억)”라고 번역됩니다. remember란 “re(다시)”와 “member(회원)”의 합성어로서 다시 회원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는 공통 경험이 사라졌지만 과거에 하나님과 한 회원으로 지내었던 공동체의 때로 돌아가는 것이 기억입니다. 우리는 이 기억을 근거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며, 하나님은 이 기억 때문에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공동체의 기억을 근거로 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공동체적 경험의 기억이 우리들로 하여금 미래를 향한 기대를 품게 합니다. 공감대를 형성하는 공동체적 공통 경험의 기억이 없이는 미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과거의 공통 경험을 소유한 백성으로서 축복 받은 백성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세상 속에서 공통 경험이 사라져서 탄식하는 때를 맞이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공통 경험을 기억하며, 그 기억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서 탄식의 때를 벗어나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공동체가 공통 경험의 상실로 인해 탄식하는 때를 맞이하였다 할지라도 우리들은 하나님과 공통 경험을 소유한 자들로서 미래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게 하셨고, 우리들은 그 십자가를 의지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공통 경험을 소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속자로 보내 주셨고,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영접하여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한 공동체로 지내온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언제나 그 첫 사랑의 때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고역과 탄식의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며 나갈 수 있습니다. 첫 사랑의 공통 경험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탄식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며, 우리와 함께하셨던 첫 사랑의 때와, 우리에게 주셨던 구원의 약속을 기억하시며, 우리를 자세히 살피시고 알아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같은 공통체 회원이었던 우리들의 탄식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공동체적 공통 경험의 기억은 하나님을 향한 기대를 품게 하는 유일한 공감대입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기억이 없이는 미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미래를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공동체적 공통 경험의 기억이 없는 기대는 헛된 기대이며 공허한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이든 공통 경험을 기억하지 못할 때 그 공동체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깨어진 공동체 속에서 한 그룹이 탄식할지라도 공통 경험이 없이는 공감대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공통 경험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속에서 다양한 공통 경험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가정 속에서도 모든 가족들과 공통 경험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국가와 사회 속에서도 공통 경험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 공통 경험의 기억을 통한 공감대 형성만이 통합과 회복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공통 경험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공통 경험이 되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공통 경험의 기억이 모든 공동체 회복의 유일한 기대입니다. (김 종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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