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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찬식의 기원과 목적 (눅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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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2: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자신의 최후의 만찬으로 지키셨으며 이를 그대로 행하여 기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기념하라'(아남네시스)는 '기억' 또는 '기념물'을 뜻합니다. 이것을 행하면서 예수님의 전체적인 삶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빵을 떼는 데서 상징적으로 묘사된 바처럼 예수님의 삶과 희생을 생생하게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우리를 대속하신 그 은혜를 감사하고 그 성만찬에 임재하시는 예수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찬식의 기원과 목적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성찬식은 나를 기념하라하신 예수님에게서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만찬 도중에 떡과 포도주를 가지사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시고 자신의 재림시까지 이를 기념토록 명하신 것은 성만찬 예식의 기원이 됩니다.

바울 사도께서도 이 사실을 증언하며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고전11:23)라 합니다.

성찬은 바울사도께서 마음대로 알린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직접 제자로 예수님의 만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마음대로 하는 성찬이 아님을 명백히 합니다. 바울사도는 간접체험을 통하여 교리를 알리고 신앙전통과 성례를 알린 사람입니다. 성찬식은 예수님께서 친히 만드신 제도입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성찬식의 원형입니다.

(고전 11:24-26)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합니다.

이는 복음서의 기록을 인용한 것입니다.

(마 26:26-28)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막 14:22-24)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유월절 전날 밤에 열두 제자와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서 떡과 포도주를 베풀어주면서 자신의 살과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함으로서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부터 나올 때 양을 잡아 그 피를 인방과 설주에 뿌려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 죽음을 면하고 해방된 기쁨을 함께 하는 축제입니다. 이 유월절 만찬을 마지막 잡수시면서 성찬의 제도를 주셨으니 유월절이야말로 성만찬의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온 인류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을 예표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유월절 양의 희생이 이스라엘을 살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려 희생함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희생은 감동과 생명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어느 해 성탄절을 하루 앞둔 날 인천 시립화장터에서는 물에 빠진 어린이를 구하고 대신 익사한 정광욱 씨(22. 안양 대림전문대 1년 휴학)의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정씨는 가족과 친구 등 4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귀한 희생정신을 남기고 한줌의 재로 사라졌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정씨는 복학을 앞두고 서울의 한 정신과의원에서 자원봉사 중이었습니다. 이날도 정신 장애인들의 사회 적응 훈련을 돕기 위해 환자 8명, 자원 봉사자 7명 등과 함께 양평으로 캠프를 갔습니다. 양평에 도착한 정씨등은 장애인들을 데리고 신내천 변에서 산책을 했습니다. 산책 도중 정씨는 얼음이 언 신내천 안에서 놀던 한 어린이(6)가 얼음이 깨지면서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정씨는 동료 이현우씨(22)와 함께 곧바로 강안으로 뛰어갔습니다. 이들이 얼음 구덩이에 도착해 손을 내밀려는 순간 얼음이 또 다시 깨지면서 이들도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이씨는 어린이를 구해 밖으로 나왔으나 정씨는 힘에 부쳐 끝내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정씨의 선배 백모씨(25,여)는 "지난 14일 정신지체 장애인들과 함께했던 음악회에도 자원봉사를 나왔던 광욱이가 '보람을 느꼈다. 앞으로 정신지체 장애인 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다'며 캠프에도 앞장서서 참가했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희생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피 흘리신 희생은 인간의 죄 용서와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 값비싼 사랑의 희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희생은 끊임없이 우리를 위한 구원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영국 빈민가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며 사는 한 유대인 크리스천이 있습니다. 바로 그 분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습니까?" 그랬더니 이 여인이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유대인이 예수를 믿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 아닙니까? 그런데 말이죠, 2차 대전 때, 자기가 블란서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독일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이 죽임을 당했습니까.

자기에게도 그 죽음의 위협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비밀경찰이 찾아와서 숨어있는 자기를 잡아가려고 하는 순간에 이웃집에 사는 한 미망인 크리스천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당신 신분증을 나에게 주고 당신은 빨리 피신하시오"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물었다는 겁니다. "어째서 당신은 나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 생각을 했습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하는 말이 "나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 주님은 더 큰 사랑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 사랑에 비하면 나는 아주 작은 사랑일 뿐입니다." 그 말 한마디 했답니다. 그래서 그 유대인의 신분증을 가지고 그 크리스천 여인은 붙잡혀가 수용소에서 6개월 동안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한 사람이 증거 한 예수님의 사랑의 증거를 듣고 그는 가만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믿게 되고 그는 일생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의미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성찬은 우리의 생을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성찬식을 행하는 것은 성경에서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냥 의식 하나 보기 좋게 만들어서 시행하는 게 아닙니다. 안 해도 되는 걸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숭고한 맘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성찬을 바로 알고 바로 참여하여 복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찬식의 목적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전도에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예수의 일을 기억하여 전도에 힘써야 한다는 마땅한 의무를 갖는 것입니다. 성찬의 떡을 먹고 성찬의 잔을 마실 때마다 굳게 다짐할 것이 있습니다. 짧은 생을 살면서 과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를 십자가에 희생하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찬의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무엇을 해야 한다고 합니까?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안에 들어 있는 준엄한 명령이 있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의 생명은 보통 값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생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대신 죽으신 예수를 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떡을 떼면서 나를 위하여 죽어 주신 주님을 바라보고, 잔을 바라보면서 나를 위하여 한 방울의 피도 물도 남김없이 다 쏟아 주신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짧은 생애에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대신 죽어 주신 그 주님을 자랑할 것밖에 없습니다. 이 예수님을 전하는 것밖에 더 없습니다.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각오와 결심을 새롭게 하면서 참예하는 성도가 합당하게 참예하는 성도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자녀 양육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자랑하는 자녀가 되도록 가르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직업을 주님을 자랑하고 주님을 높이는데 활용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높이는 일과는 전혀 무관하고 주님을 전하는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그저 돈 버는 데에만 목적이 있었다면 이제 부터라도 주님을 전하는 일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공을 했다고 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 특별히 나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을 높이고 자랑하는 일에 쓰임을 받도록 하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 구원받은 목숨입니까, 누구 때문에 죄 용서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가고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그러므로 삶, 직업, 성공, 이 모든 것을 통 털어서,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 주님을 높이는 것과 연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을 대할 때 나는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인 전도를 마음에 두고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반성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시간 나의 재물 나의 직업 나의 건강 나의 생명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한 사람에게라도 더 많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어야 할 것인가를 항상 생각 하셔야 합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주님은 나의 구주다' '주님은 나의 생명이다' 하는 고백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고백이라고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어떻게 해서 살게 된 사람들인데 인생을 되는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세상에서 있다가 없어질 세상 것을 놓고 중요한 것처럼 착각을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나를 위하여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높이는 것과, 예수님을 전하는 것과 교회의 부흥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는 삶을 통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목사님이 이스라엘에 갔을 때 그곳에서 한 유대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답니다. 그에게 “왜 당신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유대인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인간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라며 강한 어투로 대답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대답을 통해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낮고 낮은 이 세상에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친히 인간의 몸으로 오셨음을 믿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유대교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더욱 실감했답니다. 그 유대인은 결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실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답니다. “그런데 전 세계에는 당신들이 믿지 않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그 수가 늘어나고 있는 반면에 유대교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잖아요? 기독교는 열심히 전도하니까 그렇게 믿는 수가 증가할 수밖에요. 그러나 우리는 전도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만 믿으면 되지 다른 민족까지 믿을 필요가 뭐 있습니까?” 그 때 다시 한번 유대교는 기독교와 전혀 다른 그들만의 하나님을 믿고 있음을 알았답니다. 그리고 왜 그들이 복음으로 인해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지체이며 한 가족인 사실을 외면하면서 배타적이 되는지를 깨닫게 되었답니다.(짧은 이야기 긴 감동 / 이동원)

  박해를 받을 때에 성도는 목숨을 걸고 성만찬을 하려 합니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프랑스 의회에 의해 종교는 폐기되었고 주일은 사라져 버렸으며, 성직자는 숲속으로 내쫓겼고 그리하여 아무도 죽음의 형벌을 초래할 예배를 드리거나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은총의 수단이 없이 지냈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심부름꾼이 비밀 암호를 가지고 집집마다 뛰어다녔습니다. 그는 "검은 습지요."라고 말하고는 인사나 작별도 고하지 않고 사라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었습니다. 자정 직후에 남자와 여자들은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고 동네 아래에 있는 검은 습지 옆에 은밀히 모였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조심스럽게 빛을 가린 등불을 비추고 추방당한 목사 중 한 분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신실한 이웃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그들은 경보가 울리기 전에 어느 때든지 군인들이 자기들을 덮치고 일제 사격을 가하여 자기들이 들판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갈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인간은 그들의 육체를 죽일 수 있을 지 모르나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그들을 일으키시리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시지 않았는가요! (둘로스자료-성만찬의  암호)

  중국의 한 주방장이 미국의 큰 식당에 초청을 받아갔는데 한 달 월급이 2만 불이었답니다. 한 달에 2만 불이면 약 2천 4백만 원이 됩니다. 그런데 중국에 있는 그 주방장의 형이 어떤 실수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답니다. 중국 법은 형제가 대신 사형을 받을 수 있답니다. 형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주방장은 형을 대신해서 자기가 사형을 받기로 했습니다. 자신은 결혼하지 않은 혼자 몸이니 죽어도 괜찮지만 형수와 조카들이 있는 형이 죽으면 일이 복잡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성공한 주방장이 중국으로 돌아가서 형 대신 사형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조금 도와 주는 것도 얼마나 어려워합니까? 남편이 동생을 도와 주려고 하면 아내가 싫어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형을 위해 생명을 대신했으니 그 형이 동생을 얼마나 고마워하겠습니까? 동생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났을 것입니다. 만일 그 동생이 형 대신 죽으면서 “형님, 내가 이 일을 하고 싶었는데 이것을 기억해 주세요.”라고 했다면 형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일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께서 대신 죽으시면서 부탁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죽으심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 20절은 예수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가복음 1장 38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우리 주님께서 제일 중하게 여기시는 것이 복음 전도입니다. 그래서 성찬을 먹을 때마다 ‘나도 전도해야지. 내가 전도해야지.’하며 복음 전도의 불이 타오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찬에 참례하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엄숙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죄인중의 괴수와 같은 나를 살리기 위해 흠도 티도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지신 어린양으로 죽어 주셨다는 것을 고백하며 그 때문에 내가 죄 용서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노라고 고백을 하며 기념하는 시간이 되며 주의 죽으심을 전하라는 말씀 기억하며 내 일생에 이 좋은 예수, 이 고마운 예수를 증거하고 전하는 것이, 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고백하며 다짐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강 성 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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