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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강에서 헤엄치라 (겔 4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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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지금으로부터 2600년전 일입니다. 에스겔은 희망의 예언자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침략해 왔습니다. 1만명의 젊은이들은 포로로 끌려 갔습니다. 그 포로 가운데 25세의 젊은이 에스겔이 함께 갔습니다. 에스겔이 그발강가 데루빕이라는 포로수용서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얼마나 자기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도했는지, 어느 날 하나님이 저에게 놀라운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절망적이었으나 에스겔이 본 환상은 대단히 희망적이었습니다. 그 환상을 중심해서 기록한 내용이 에스겔서입니다.

그런데 더욱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또 다시 예루살렘을 침공해 성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당시 임금 시드기야를 잡아 두 눈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손발을 묶고 말에 매달아 끌고 다녀 죽였습니다. 바벨론 포로들에겐 이제 조국도 없어졌습니다. 돌아갈 땅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울고 또 울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무렵 에스겔의 아내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받은 치유자 에스겔은 소망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포로들은 큰 위로를 받게 됩니다.

이 암울한 상황에서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어떤 이야기를 해서 위로를 주었을까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가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하루는 에스겔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이끌려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성전에서 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성전에 물이 그득히 고이며 한번 걸어보라고. 그래서 걸어갔더니 발목까지 물이 찰랑 찰랑 흘러 넘쳤습니다. 사방에서 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한번 걸어보라고. 물이 무릎까지 차 올랐습니다. 다시 물은 점점 차 올라 허리까지. 오늘 본문에 생략되어 있습니다만 가슴까지. 급기야 물은 성전에 가득하여 헤엄하지 않고서는 능히 건널 수 없는 강물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한바퀴 휘감아 돌더니 사막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사해 바다에 도착하자 죽었던 사해 바다가 살아나 고기들이 펄떡거리며 뛰어 노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사막을 지나 다시 돌아오는데 보니까 사방에 숲이 우거졌습니다.
진귀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분명히 암울한 시대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꿈을 버리지 않으면 회복을 가지고 오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우리)에게 은혜가 온다는 메시지요 고난받는 이스라엘에게 희망이 온다는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이 모든 환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사 그들을 살리려고 대가 없이 주시는 은혜의 강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의 강물의 시작은 성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교회)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흐르기 시작하는 보혈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물론 모든 만민이 살기를 원하십니다. 요7:37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십니다. 또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성전이요,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은혜의 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예화>

유태인들이 잡혀있던 아우슈비치 형무소이야기를 잘 알 것입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비누의 원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빅톨 프랭크에 의하면 죽음을 앞에 두고 깨어진 거울로, 먹을 물로 자기를 가꾸던 사람들만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희망을 가진 자들만이 살아남은 것입니다.

본문은 희망을 주는 메시지였습니다. 앞 뒤 막혀있는 곳에서 소망을 주었습니다.
본문은 대단히 상징적인 뜻을 가지고 있었지요.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흘러 강이 되었다고 했는데 실상 예루살렘은 강이 없는 곳입니다 .더구나 성전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그 물이 사막을 통과하고 사해 바다까지 이르러 마침내 죽은 사해 바다를 살렸다고 하니 상징적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1절 - 2절 해석>
1절-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도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2절-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꺽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역으로 성도들의 죄악을 담당하셨으며 친히 자신을 '생수의 강'으로 언급하셨다는 점에서(요 4:10;7:38) 이 '생명수의 강'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다 하겠다.

전 문 - 이는 성전 중앙에 위치한 성소의 문을 가리킨다.

*** 강물과 근원/물의 의미/생수의 강의 의미

인간에게 있어서 물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지구 조차도 71%가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류 최초 문명의 발생지는 모두 강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나일강의 애굽문명, 유브라데스 강의 바벨론 문명, 인더스강의 인도문명, 황하강의 중국문명이 그것들입니다. 우리 사람의 몸도 물로 이루어졌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ꡒ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물과 성령으로 너희들이 거듭나야 하리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리라.ꡓ

그렇다면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흘러 사막까지 새롭게 하는 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한 은혜요
예수님의 크신 보혈이요
성령님의 충만한 강림하심입니다.

주님 외치셨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요 7:37-39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생수의 강의 의미는? 성령의 물에 감동 되어 예수님의 보혈의 은총에 적셔진 죄인들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에는 자유가 임했습니다.
보혈이 흐르는 곳에는 죄사함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님이 강림하심에는 큰 부흥이 일어나 새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리고 어디든 민족과 시대를 살리는 묘약은 이 생수 외에는 없었습니다.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특별히 물이 성전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기에,
교회야말로 모든 은혜와 권능과 부흥의 근원지하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소중한 생명 샘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보혈의 은총이, 성령의 생수가 제단에서부터 흘러온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은 교회를 어머니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수가 흐르기 때문에, 구원의 보혈이 흘러 넘치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칼빈은 주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제단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쉽게 생각하는 자리가 아니라 구원의 물이 흐르고 있는 구원의 자리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큰 생수의 강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달라지고, 바꿔지고, 변화되는 축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강물이 흐르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 살리는 역사! 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이 생수의 강은 복음을 말씀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말씀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힘있게 역사함으로 우리의 심령을 사로잡고 왕성하게 우리의 가정으로, 일터로, 이웃에까지 만족하게 흘러 넘침으로 진정한 부흥의 역사, 다시 일어나고, 살리는 역사를 맛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생수의 강이 어디서부터 나옵니까?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는데. 예루살렘에는 강이 없어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신령한 은혜의 강을 의미합니다.

주님 주실 좋은 결말을 바라보며 날마다, 더 깊은 은혜의 세계로, 기도와 말씀의 세계로, 사랑의 세계로, 순종과 헌신의 세계로, 축복의 세계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생수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생수는 치료하는 능력, 변화시키고 소성케 하는 능력으로 다시 살리는 생명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9절, 10절, 12절을 보면 생수의 강은 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생수가 아라바 황무지에 흘러 내리니 박토가 변하여서 옥토가 되고 바다물이 소생하고 만물이 새로워집니다.

사해가 어떤 곳입니까?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묻혀있는 곳입니다. 어두운 역사가 있는 곳, 절망의 자리, 죽음의 장소, 어떤 생물도 살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식물이 급성장하고 많은 수확이 있고 약효가 뛰어난 나무들이 그 강물이 닿는 곳에 쑥쑥 자라나고 저주받은 사해의 짠물에 고기떼가 가득 차게 됩니다. 우선순위가 바로 되면 영 육이 함께 살아나고 재기하는 역사를 보게 됩니다. 은혜의 강물줄기가 닿는 곳마다 회복의 역사, 치료의 역사, 축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생수의 강의 역사가 오늘도 복된 자리에 나와 말씀을 듣는 여러분의 심령과 생활에 체험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전(교회)의 의미>

이성의 눈으로 교회를 본다면 초라합니다.
웅장한 것도 없고, 화려한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얕잡아 보고 말살정책도 펼쳤습니다만,
세상이 무너지면 무너졌지 교회는 망하질 않습니다.

이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교회의 생명력을 공급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교회가 초라하고,
비록 교회가 잘못하고,
비록 교회가 가난해도,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방주이기에
칼빈의 말대로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는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엄성입니다.

마 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큰 교회도 좋습니다.
작은 교회도 좋습니다.
시골교회든, 다락방 교회든 상관치 않습니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오직 교회만이 치료하시고 꽃피우는 생수의 근원이 됩니다.

성전(교회)은 하나님의 임재 처소로서, 구약시대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곧 성전이라고 하셨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친다고 하셨다. 이처럼 진정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백성들은 영생을 누리며, 한량없는 희락과 평화를 맛보게 된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이 우주 공간에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하나님의 편재성>이라고 합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크고 넓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항상 당신의 이름으로 일컫는 장소에 머물러 계시고, 당신을 믿고 경외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왕상9:3-"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라(중요)"

즉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머물러 있는 곳이 성전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지켜보시고, 임재하여 계신 곳이 성전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상8:37-39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온역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무론하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갚으시옵소서"

그러므로 성전(교회)은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상달되고, 예배가 응답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7:37,38-"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4:14-"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흐르는 물을 내 전답으로 끌어들여야 내 논밭의 곡식과 채소가 싱싱하게 자랄 수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에서 흐르는 물을 다른 곳이 아니라 내 배로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마시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생수를 마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생수를 만나는 것이고, 설교를 듣는 것은 생수를 마시는 것이고, 찬송을 부르는 것은 생수를 마신 기쁨과 감격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생명수가 넉넉한 교회가 되고, 주시는 생명수를 흡족히 마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 해석>
3절-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 우리(나)의 신앙은? ***

1. 발목 신앙(발목을 잠근 사람들-3절)

성전에서 흐르기 시작한 물은 점점 불어나게 되었는데, 에스겔은 하나님의 사자를 따라서 거룩한 산에서 물을 따라 일천 척(약 500미터)을 내려온 후 건넜는데 물의 깊이가 발목까지 이른 것입니다.

발목만 잠그는 신앙이 있습니다.
발목에 물을 잠근다는 것은 신앙의 초보상태입니다. 왔다 갔다 족입니다. 발목에만 물차있
으니 아직 체험도 없고 감격도 모자라고 그냥 주일이 되면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년수는 오래 되었는데 직분은 고급인데도 여전히 발목신앙이 있습니다.
말씀의 지식이 작습니다.
은혜의 감격이 적습니다.
비밀의 체험이 얕습니다.
헌신의 힘이 허약합니다.
겨우 발목만 적신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유감된 것은 발목만 잠겼기에 언제든지 발을 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상과 주를 더불어 섬기기도 합니다.

<예화-유머>
어느 집사님은 TV사극을 즐겨보았습니다.
요즘 같으면 장희빈을 녹화해서 두세 편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이 집사님은 당시 한명회를 녹화해서 토요일 저녁 늦게까지 보았답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 중에 기도 담당이 되었는데
'하나님 아버지! 성은이 망극하나이다'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결혼식이나 친구 모임에는 열심히 참석하면서 주일날 예배 참석하는 일에 게으른 자는 "하나님, 내 발목에 은혜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느 날부터 예배에 참석하는 일에 힘이 생길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물론 11절에 나오는 진펄과 개펄신앙은 낫지만, 이 신앙은 여전히 세상과 자기 중심적 신앙입니다.

<4절 해석>
4절-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 우리(나)의 신앙은? ***

2. 무릎 신앙

다시 물이 흘러가는 동쪽으로 안내자를 따라 일천 척을 내려오니 물이 계속 불어서 무릎까지 차게되었습니다. 무릎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는 기도의 은혜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차 은혜를 받고 나면 발목에 힘이 오므로 출석하는 열심이 생긴다면 2차 은혜를 받고 나면 무릎의 은혜, 곧 기도하는 열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기들이 성장과정에서 처음에는 걸음마를 시작하더니 어느 날부터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열심히 예배에 출석하던 사람이 점점 더 은혜를 받더니 기도에 열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도 은혜를 받아야 열심이 생기고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기도의 맛을 잘 모르는 분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게 무릎의 은혜를 주옵소서."라고 해보십시오. 어느 날부터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기도에는 열심이 있어야 응답을 받습니다. 잠8:17 "나를 간절히 찾는 자는 나를 만날 것이니라"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라 했습니다.

종전에는 문제 앞에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아니면 최선의 노력이라는 것이 사방으로 뛰어 다니는 것이 최상책이었다면, 이제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기다리는 성숙함이 있는 것입니다.

눈물이 무릎에 떨어지기 시작하는 때요
은혜의 강물이 그 무릎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비로소 간증할 수 있고, 비로소 영혼으로 찬양할 수 있는 동기가 심겨진 신앙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안심할 수 없습니다.
무릎이라도 절반이기에 안정감이 없습니다.
물은 더욱 차 올라야 합니다.

<예>
옛날 중국 영화를 보면 제자를 훈련 시킬 때 어떻게 하였습니까? 양쪽 물통에 물을 길
러 오게 하면서 물을 반쯕 채웁니다. 그리고 빨리오게 하죠. 그러다 보면 물이 다 튀어 나
갑니다. 반통만 채우면 물이 출렁거려서 걷지를 못하고
물은 물대로 다 없어집니다. 차라리 가득 채우는 것이 물도 긷고 걷기도 편합니다.

물이 가득차야 합니다. 그래야 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릎까지 오면 무엇인가 신앙 생활은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안정감이 없습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롬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기도 예화>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때는 무더운 여름이었습니다. 어린 딸이 중병에 걸린 선교사인 자기 어머니를 위해 의사를 모시고 왔더니 의사는 진찰한 후 "애야, 지금 어머니는 몸이 불덩어리 같구나. 어머니를 구하려면 얼음이 있어야 하는데"라고 말했습니다. 여름에 어디서 얼음을 구합니까? 당시는 그곳에 냉장고가 없었습니다. 어린 딸은 의사에게 외치기를 "선생님, 엄마가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것은 구하면 반드시 주신다고 약속하셨어요.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한 후 골방에 들어가 불타는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도는 그 날 오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후 늦게 시커먼 구름이 피어오르고 가벼운 비가 내리면서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딸은 우박을 모아다가 어머니의 환부에 얼음찜질한 결과 어머니의 생명을 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무릎의 은혜를 받아서 그 주신 열심으로 간절히 구함으로 여러분의 문제가 해결 받는 역사를 만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발목에서 차 오르면 어느덧 무릎 신앙이 됩니다.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 바지를 걷어붙이는 정도가 된 것입니다.
헌신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또한 당면하는 여러 문제와 위기 앞에서 무릎을 끓을 줄도 압니다.

종전에는 문제 앞에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아니면 최선의 노력이라는 것이 사방으로 뛰어 다니는 것이 최상책이었다면,
이제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기다리는 성숙함이 있는 것입니다.

눈물이 무릎에 떨어지기 시작하는 때요
은혜의 강물이 그 무릎에 스며들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비로소 간증할 수 있고,
비로소 영혼으로 찬양할 수 있는 동기가 심겨진 신앙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안심할 수 없습니다.
무릎이라도 절반이기에 안정감이 없습니다.
물은 더욱 차 올라야 합니다.

어릴 때 물지게를 져 보았습니다.
힘들다고 반통만 채우면 물이 출렁거려서 걷지를 못하고 물은 물대로 다 없어집니다.
차라리 힘들어도 가득 채우는 것이 물도 긷고 걷기도 편합니다.

롬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 우리(나)의 신앙은? ***

3. 허리 신앙

허리는 중심부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중심이 잡히는 시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냥 성경이 옛날 얘기인 줄 알았는데 언젠가부터 성경이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연애편지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옛날 역사책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달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재미있으라고 하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저 설교가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갑자기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눈물이 핑돌며 감격이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허리까지 물이 차 오르고 있는 단계입니다.

<예>

예배에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눈이 빨개져서 나가야 합니다.

어떤 남편이 그러더라 는 것 아닙니까? 예배를 드리고 나가면서 하도 울면서 눈이 벌개서 일어서니까 자기 아내
에게 그러더랍니다. "이놈의 교회에 체류탄 뿌렸냐?"

감동이 있게 되면 물이 허리에 차 오르고 있는 것임을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안전무장이 나옵니다. 그때 우리 허리에 진리 허리띠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중심이 잡혀있는 신앙 말입니다.

이때부터는 사람들이 자기를 공격하는 것을 껴앉을 수 있습니다. 객관화 시켜 영적으로 보게됩니다. 부부, 친구, 세상의 관계들에 대해서 객관화시키는 경험을 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허리에 힘이 있으면 웬만한 유혹이나 시험에는 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허리의 은혜란 힘써 충성하는 은혜를 말합니다. 허리는 힘을 쓰는 곳입니다. 아무리 힘이 센 강한 운동선수라도 허리를 다치면 아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열심히 기도만 하고 주님을 위해서 몸으로 아무 충성을 못한다면 아직도 어린 아이 단계일 뿐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걸음마를 하고 말을 하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부터 심부름을 하기 시작한다면 소년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요, 어느날부터 큰 짐도 어깨에 번쩍 메고 다닌다면 이제 청소년의 단계에 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충성의 은혜를 주셨음에도 오늘 바쁘다고 내일, 내년으로 미루면 허리의 힘, 충성의 열심도 점점 약해져서 나중에 막상 충성하려고 해도 의욕도, 열심도 미약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내일, 내년으로 자꾸 연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니라 마귀가 좋아할 일입니다.

<예화>
과거에 한국을 다녀간 중국인 목사 조세광 박사는 하나님의 달력에는 '오늘'이라는 말이 적혀 있고 마귀의 카렌다에는 '내일'이라는 말이 가득 차 있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자꾸 '내일 하라'고 유혹합니다. '기도도 내일 하라, 봉사도 내일 하라, 예수도 천천히 60살이나 70살을 지나서 믿어라, 열심도 천천히 하면서 서둘지 말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주의 성령은 재촉하십니다.

'지금 봉사하라, 지금 믿으라, 지금 충성하라, 지금 열심을 내라,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재촉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허리의 은혜, 충성의 은혜를 주실 때 열심히 땀흘려 충성하십시오. 일하는 팔에 점점 힘이 오듯이 충성도 하면 할 수록 충성할 수 있는 열심이 붙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적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 일, 큰 달란트를 맡기시는 것입니다.

허리의 신앙은 달리 얘기하면 가슴까지의 신앙입니다.

목사로 표현하면
입이나 손이 아닌 가슴으로 설교하는
가슴으로 목회 하는 경우입니다.
성도들 역시 귀로 듣지 않고 가슴으로 듣고
가슴으로 예배하는 모습입니다.

이때는 주님을 감격시키고자 합니다.
그리고 작은 주의 은혜에 「감사」가 넘칩니다.

◆ 성경책이 단순한 이스라엘 삼국지 인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요 내게 향하신 사랑의 편지로 받아 드리고 됩니다.

◆ 교회에 가면 언제나 사람들의 위선이 보였는데,
이제는 그 위선 된 사람 속에 있는 주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찬송가를 불러도 아쉽고,
예배를 드려도 부족하고,
그저 감사 감격이 충만합니다.

장부의 신앙모습입니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고 가슴은 뜨겁기에
웬만한 시험에도 넘어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주님 원하신다면,
삯바느질을 하고 피를 팔아서라도 한 몫을 드립니다.
사르밧 과부, 오병이어의 소년, 나귀를 드린 주인, 300데나리온의 마리아 등...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여느 신앙과 본질이 다릅니다.
무당신앙은 기원은 있으나 감사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은혜가 있기에 감사 감격이 넘치는 것입니다.

또한 성장하고 성숙하기에 그 정도에 따라 달리 지적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가슴이 은혜의 물에 잠기지 아니하고 신앙생활의 연조만 깊어지다 보면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습니다.
자칫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기가 쉽상이지요.

습관에는 원래 감격이 없는 겁니다.

<찔림 예화>
아침에 일어나 이빨을 닦으면서 아~ 이빨이 닦여진다. 은혜가 된다. 그리고 아침에 세수하면서 아~ 세수하는구나. 눈물이 핑돌면서 감격스럽다.

그러면서 세수 하시는분 계십니까? 빨리 해치우는 겁니다. 예배 한시간을 드려도 하나님 앞에 기도 한번을 하더라도 찬송 한번을 하더래도 찬송 한번을 불러도 습관적으로 부르는 사람은 감격이 없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가슴이 물에 잠기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기도하면서도 기쁨이 없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감격이 없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나 감사가 없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감사가 없는 기도는 자기 독백에 그치고 맙니다. 감격이 없는 찬송은 진실하지 못합니다.

<5절 해석>
5절-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4. 헤엄치는 신앙=>헤엄할 물(은혜의 강에서 헤엄치는 신앙)

<유머 예화>

어떤 나라에 임금이 공주를 시집보내야 되겠는데 어떤 사람에게 보낼까? 생각하다가 이 나라에서 가장 용기가 있는 젊은이에게 시집을 보내야 되겠다 생각을 하고 용맹하다는 젊은이들을 다 불러 모아서 연못가에 둘러서게 했습니다. 거기에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하품하듯이 입을 벌렸다 오무렸다 하는 악어떼가 우굴 우굴 있었어요. ꡒ누구든지 악어떼가 있는 이 연못을 가로질러서 헤엄쳐 달려오면 공주와 결혼을 시켜 주겠다.ꡓ 그런데 공주와 결혼하겠다는 욕심 때문에 뛰어들어 갔다간 악어의 밥이 될텐데 누가 들어가겠습니까? 용감한 한 젊은이가 뛰어가더니 그냥 잽싸게 수영해서 뛰쳐나왔습니다.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ꡒ당신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왔느냐?ꡓ 그랬더니 그 젊은이가 뒤를 두리번 거리더니 ꡒ어떤 놈이 밀었어!ꡓ

우리가 은혜의 강물에서 헤엄치는 사람이 있고 허우적 거리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얕은 물가에서 땅을 깊고 헤엄치는 단계를 지나서 몸을 담그고 물을 끼얹는 단계를 지나 깊은 물에서 헤엄치는 신앙의 차원이 있습니다. 깊은 물에 몸을 맡기고 나면 저절로 뜨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예>
강물이 있습니다. 이 강물에서 즐거이 노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밖은 더운데 수영 못한다고 괴로워하는 분도 계십니다. 같은 강물인데 말입니다. 들어와 보지도 않고 덥다고 짜증만 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강물에 있는 사람은 시원합니다.

그리고 물에 뜨게 됩니다. 몸을 맡기면 뜨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의 생활이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억지로 믿어야지.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믿어지는 은혜의 단계가 있습니다. 축복이란, 내가 노력한대로 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에 은혜의 단계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망설이지 마십시오. 뛰어드십시오, 그리고 물위에 뜨십시오,

시간의 우선 순위, 내가 철저하게 계획해서 살아가면 그것이 반듯한 삶이겠지만 그러나 그 보다 더 깊은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쫓기듯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주님 앞에 우리 인생을 맡기고 살아가십시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이런 한 구절이 나옵니다.
'십자가를 지되 억지로 지지 말아라. 이왕 십자가를 지려면 기꺼이 지거라. 그러면 십자가가 너희를 짊어져 줄 것이니라.'

<예화 - 은혜>
존 번연이 쓴「천로역정」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독도가 한번은 어느 방에 들어갔더니 먼지가 한 30센티미터 정도나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 한 소년이 빗자루를 들고 들어와서 쓸으니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 온 방안에 자욱하더니 도로 바닥에 갈아 앉습니다. 안내자에게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율법이라'고 대답합니다. 다음 방에 들어갔더니 똑같이 먼지가 쌓였는데 이번에는 한 소녀가 들어와서 물로 깨끗이 씻어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은혜라'고 안내자는 대답해 줍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리 죄를 없애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죄의 먼지 속에 매여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물,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모든 죄가 씻음 받고 정결하게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노력으로 인생을 살려고 애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려는 자입니다.

<6절 해석>
6절-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나를 인도하여 강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 여기서 '강가로'(* - , 알쉐파트 하나할)를 혹자는 '뚝을 따라'로 해석해 선지자가 뚝을 따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다는 의미로 이해하여 세 번째 측량 때까지 선지자가 직접 물을 건넌 사실을 배격한다(Delitzsch).

그러나 이 말은 생수의 강의 가장자리 곧 '뚝 위로'란 뜻으로서 선지자가 그 물 속에서 세 번째 측량때까지 따라 내려갔다가 그 물 속에서 네 번째 측량을 목격하고 다시 뚝 위로 올라온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잔연스럽다(Schroder, Hengstenberg).

<7절 해석>
7절-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8절 해석>
8절-까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바다 - 혹자의 견해대로 '지중해'를 가리킨다기보다는(Rosenmuller, Ewald) '사해' (死海)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 이 사해는 성경에서 '염해'(창 14:3; 민 34:3;신 3:17;수 3:16;12:3 등), '동해'(18절;욜 2:20;슥 14:8), '아라바 바다'(신 3:17;수 3:16;왕하 14:25), '바다'(암 8:12;미 7:12) 등 다양하게 불리워졌다.

<9절 해석>
9절-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것이며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으로 상징된( 요 2:19)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발원하기 시작한 복음의 생수의 강이 온 세상을 살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세상에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죽어가던 그들에게 살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발원했지만 예루살렘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도도한 흐름을 이루고 주위의 사마리아을 변화시켰으며, 또 소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흘러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10절 해석>
10절-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어부'는 곧 구원을 선포하는 복음의 사역자들로 이해할 수 있다(마 4:19, 20;눅 5:11, Hitzig).

<11절 해석>
11절- 그 진펄과 개펄을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 진펄과 개펄의 신앙 ***
오늘 본문 11절에 말하는 진펄과 개펄 신앙이 있기도 합니다. 이들은 교회 냄새만 맡았을 뿐입니다. 물도 적셔 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들어와도 구경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더 강력한 경고를 합니다.
11절입니다. ꡒ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다.ꡓ 예수님의 보혈에 그 영혼이 적셔지지 못한 사람, 구원의 강물에 뛰어들지 못한 사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사람은 버림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 곁에도 늘 역사를 체험하고 능력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곳곳마다 그곳에 함께 있으면서도 늘 구경만 하며 방관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때를 따라, 시간 따라 역사 하시는데 안타깝게도 은혜의 현장에 있으면서도 은혜 받지 못하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채 여전히 병든 자리, 죽음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2절 해석>
12절-강 좌우 가에는 각족 먹으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이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 생수가 위에 언급된 영원한 생명과 풍요의 원천이 되는 이유를 재삼 강조하여 밝히고 있다. 즉, 그 물이 모든 생명의 주관자가 되시며 번성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거처, 곧 성소에서 직접 발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Hitzig).

생수를 통해 자란 생명나무는 그 구원과 영생의 은혜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뿐 아니라 다른 이방인들에게까지도 나누어 주게 된다.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 '약 재료'(* , 리트루파)는 원어상 '고치다'란 뜻의 '라파'(* )에서 파생된 말로서 병들고 썩은 것을 고치는 의학적인 효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약 재료가 병들고 썩어진 세속적인 이방 세계에 작용함으
로써 그 세계가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 사역을 통해 치유받고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계 22:2).

* 새 실과를 맺으려면 생명 강가에 뿌리를 내리고 생수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렘 17:8)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계 22:1)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결론>
발목 은혜 때에는 여전히 내가 살아서 나를 주장하기 바빴고,
무릎 은혜 때에도 기도할 때는 충만하다가 세상에 나가면 여전히 근심 걱정에 싸였던 우리이었습니다.

또한 허리 은혜 때에는 많은 충성을 할 때에 남들이 칭찬하면 우쭐거리고 알아주는 이 없으면 공연히 교회를 향해 불만을 일으키던 우리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강 속에 잠기어 헤엄칠 때는 세상도 간 곳 없고, 나도 간 곳이 없어집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만 보이므로 감사만이 가득 찬 저와 여러분들이 다들 됩시다.

<예화>
기독교 방송 드라마에 맹인인 윤인수 목사의 간증 드라마가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중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어린 소년 시절에 그는 길거리에 나가 신문을 팔고 구두닦이를 시작했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년으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열심히 일을 해서 번 돈을 기뻐하며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그 돈을 내놓았습니다. 돈을 받아 든 어머니는 그의 등을 두들겨주며 "십일조를 먼저 떼자"고 하자 그는 버럭 화를 냈습니다.

"십일조는 무슨 놈의 십일조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단 말입니까. 나의 눈은 멀게 했고. 엄마는 병들게 했고. 공산당에게 쫓겨 피난민 신세가 되게 했고. 재산도 다 빼앗기게 한 그런 하나님께 무슨 놈의 십일조를 내라는 것입니까?"하며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을 꼭 쥔 다음 "인수야 고향 잃어버린 것도 한스럽고. 집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건강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뭐가 남겠느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귀한 신앙의 모습입니까? 그 어려운 역경 중에도 감사하는 그 어머니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 소년을 마침내 목사까지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맹인 소년의 가정보다 엄청난 감사조건 속에 살면서도 감사를 잊고 삽니까? 우리는 여전히 욕심 가운데 빠져 살기 때문입니다.

90%의 받은바 감사의 조건은 보지 않고, 받지 못한 10%의 불만의 조건을 보기 때문입니다.

아니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강에 깊이 잠기어 헤엄을 치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도 은혜를 발견하고, 저기서도 은혜를 발견하면서 온통 감사할 것 투성인 줄 알게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엄청난 은혜를 주시므로 온통 감사할 것 투성인 우리가 감사는커녕 이루지 못한 욕심 때문에 불평과 불만으로 매여 산다는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감사하지 않다가 그 감사할 것들을 빼앗기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예배 출석에 게으른 자는 발목에 은혜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아직도 기도에 열심이 없는 자들은 무릎에 은혜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아직도 충성에 열심이 없는 자들은 허리에 은혜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더 나가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강에 나를 모두 잠기어 버리고 헤엄침으로 범사에 감사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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