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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이웃이 되라! (잠 3: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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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말

1964년 어느 새벽, 28세의 술집 지배인 키티 제노비스는 퇴근길 뉴욕 퀸스의 아파트로 걸어가다 강간범을 만났습니다. 조용한 주택가 한길에서 그녀는 칼에 여러 차례 찔리고 겁탈 당했습니다. 그녀는 숨지기까지 거듭 “도와 달라”고 외쳤지만 경찰에 신고한 주민조차 없었습니다. 나중에 경찰이 확보한 현장 목격자만 38명에 이르자 미국 전역이 충격에 빠졌었습니다. 사람들은 냉혹한 무관심과 이기심에 놀랐고 정의(正義)가 실종된 미국을 개탄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이웃이 없는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웃 없는 세대에서 진정한 이웃이 되어 줄 자들은 그리스도인들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동시에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는 약한 자도 있고 강한 자도 있습니다. 선한 자도 있고 악한 자도 있습니다.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좋든 싫든 이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들의 이웃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왕에 이웃으로 살바에야 좋은 이웃이 되어야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군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자들과 함께 섞여 살면서 취해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해서 교훈 해 주고 있습니다. 좋은 이웃에게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좋지 못한 이웃에게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1. 연약한 자들에 대한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난방(暖房)하면 난로나 보일러를 연상합니다. 옛 중국에서는 전혀 색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어느 동네에 새 이웃이 오면은 동네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음식을 제공하고 돈과 재물이며 살림 도구를 빌려주고 매매를 도와주는 이웃돕기 풍습을 난방 또는 난옥(暖屋)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웃을 산다는 매린(買隣)이라는 흥정풍습도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집을 살 때 집주인의 덕망이나 인격에 따라 집값이 현저하게 달랐습니다. 곧 천금으로 집을 산다면 만금으로 이웃을 산다할 만큼 집값이 주인의 인격과 인간적임에 좌우되었다고 합니다.

연약한 이웃이란 선한 자를 말합니다. 우리가 도와야 할 이웃은 선을 행하느라 자신의 양식을 마련치 못하는 사람, 혹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느라 자기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는 사람입니다.  연약한 이웃이란 스스로 양식을 공급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홀로 사는 이들(홀아비와 과부)중 자활능력이 없는 연로한 자들, 장애자들, 극빈자들, 부모 없는 고아들, 외국 노동자들 점점 더 그 범위가 넓어지고 있습니다.

1). 최선을 다해서 도와야 합니다.  잠언3:27절은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27 절)라고 말씀했습니다.  연약한 이웃을 돕는 우리의 자세는 최선을 다하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우리가 실컷 쓰고 남은 것을 가지고 남을 도울 것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참된 봉사자의 자세는 희생하는 자세입니다. 나의 것을 쪼개어 그것을 가지고 이웃을 도울 때 바로 그것이 참된 봉사인 것입니다.

2). 자원하는 마음으로 도와야 합니다.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27 절)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독교의 봉사는 또한 자원하는 봉사입니다. 결코 강요나 타의에 의한 봉사가 아닙니다. 그런 봉사, 즉 타율적인 봉사는 진정한 의미의 봉사가 아닙니다.

성경에 노상강도를 만나 다 죽게 된 유대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행인들이 그냥 피해가지만 한 사마리아 사람만이 상처를 싸매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보살핍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강도만난 자는 어쩌면 원수 같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 자기를 개같이 취급해 왔으니까 말입니다.

성어거스틴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네 가지 인간상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❶자기 이웃을 원수같이 여기는 자. 강도나 날 도둑 같은 자들을 말합니다.  ❷자기 이웃을 외국인 또는 나그네로 여기는 자. 이런 자들은 인종간, 계급간, 빈부간, 지역 간의 분열을 조장합니다.  ❸자기 이웃을 옆집 사람으로 보는자. 나름대로 가까이 지내는 자를 말합니다. 별일 없이 잘 지내는 자를 말합니다. ❹이웃을 참 형제로 보는 자. 이런 이웃이 되자면 그리스도의 정신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대부분 선진국이 채택하고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여기서 유래합니다. 자기가 피해를 보지 않는 데도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는 법입니다.  강도만난 자를 피해 사라진 레위인, 제사장은 “착한 사마리아인 법”에 저촉되는 사람들입니다.

3). 즉시 도와야 합니다. 잠언 본문은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28 )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한 즉시 그를 도와주었습니다. 도움은 신속해야 합니다. 머뭇거릴 여가가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볼일을 다 보고 다시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시 자기에게 있는 기름과 포도주로 응급조치를 하고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가서 계속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따지지 않았습니다. 즉각 조치를 취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도우려면 이와 같이 도와야 합니다. “내일오라, 다음에 보자, 나는 도와 줄 형편이 못된다.”는 등등의 핑계를 해서는 안 됩니다. 미루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탈리아의 제노아 교회에는 시바 여왕이 솔로몬에게 선사한 에메랄드 항아리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항아리와 함께 참으로 교훈적인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선물을 받고 그 항아리에 무엇을 넣을까 궁리하다가 연명의 약, 즉 사람이 죽어갈 때 마시면 얼마동안 목숨을 연장할 수 있다는 묘약을 넣어 단단히 봉했습니다. 그 후 솔로몬은 부하들이나 친척들로부터 그 약을 조금만 나누어 달라는 위급한 부탁을 여러 번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얼마 후 자신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병이 깊어지자 솔로몬은 처음으로 항아리를 뜯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목숨을 더 연장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에메랄드로 만든 항아리라해도 오랜 세월이 흐르므로 묘약이 말라붙었다는 겁니다. 아무리 많이 있다해도, 좋은 것이라도 이웃을 위해 나누지 않으면 소모되고, 말라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선한 자들에 대한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피에르 판 파센의 “우리들의 날”에 이런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보우그라는 마을에 “우고린”이라는 본성이 매우 착한 꼽추가 살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우고린은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며 그의 어머니는 술 주정뱅이여서 “소랑케”라는 그의 누이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누이가 어느 날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습니다. 얼마 후 석방되었을 때 불구인 동생이 병들어 눕게 되었습니다. 직장을 얻지 못한 그의 누이가 자기 몸을 팔아 동생의 약값을 대었습니다. 어느 날 “우고린”은 몰지각한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조롱을 당했습니다. 군중들은 그를 넘어뜨리고 그를 중심으로 춤을 추면서 “네 누이의 연인들이 각각 한 프랑씩 지불했다.”고 소리치며 외쳤습니다. 마을의 신부가 말려 주었습니다. 묘멸감에 견디지 못한 우고린은 다음날 물에 투신 잔살했습니다. 그의 누이는 권총으로 자살을 했습니다. 신부는 장례식때 “이 어린 것들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자비가 없는 사회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주일 날 강단에서 신부는“주님께서 심판 날에  네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나는 주님께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세 번째로 나에게 네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들은 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리떼들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라고 울먹였습니다.

1). 선한 자들과 화합하여야 합니다.  선은 악의 공격의 제 1차 표적이 됩니다. 그러므로 선은 끊임없는 악의 집요한 공격에 의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선을 도와야 합니다. 선한 이웃의 힘이 되어 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어야 합니다. 선과 악의 대결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선과 선의 대결은 원리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서는 비일비재합니다. 교인들의 분쟁, 교회의 분쟁, 교단의 분쟁 같은 것은 선과 선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처가 아물어지고 화합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선이 악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2). 이웃의 선을 도와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자칫 잘못하면 선한 이웃은 무시하거나 멸시하고, 비방하거나 짓밟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을 돕는다해서 내가 악해지거나 덜 선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선한 이웃에 대하여 비협조적인 것은 반드시 고쳐 나가야 합니다.

3. 악한 자들에 대한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동네에서 차에 짐을 싣고 어디론가 이사를 가는 자가 있었습니다. 식구들을 다 이끌고 다른 동네로 떠나가 버렸습니다. 떠나면서 “이 동네는 사람 살 곳이 못됩니다. 모두가 무식하고, 가난하고, 예절도 모르고, 욕심도 많고, 싸움질만해서 우리는 생각다 못해 이 동네를 떠나 이사하기로 했습니다.”라고 하면서 멀리 훌쩍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날 같은 시간에 한 가정이 그 집으로 이사를 해왔습니다. 그는 “나는 이 동네 사람들이 가난하고, 무식하고, 병들고, 불행하게 산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 볼까하여 이 동네로 와서 살기로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악한 이웃, 어려운 이웃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기 전에 먼저 그들을 험담하고, 비방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잡담의 이웃사촌은 비방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잡담은 게으름이나 경망스러운 수다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비방은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의도적으로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신구약의 중간기대의 사람들은 비방하는 혀를 “제3의 혀”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비방하는 사람, 비방을 듣는 사람, 비방을 받는 사람에게 공히 치명적인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잡담과 비방은 서로 물고 먹는 사회적, 도덕적 식인종이 되고 맙니다. 비방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잡아먹는 행위가 되고 맙니다.  비방을 좋아하는 자여 “네 이웃을 사랑하라”가 아니라 “네 이웃을 잡아먹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악한 이웃이라고 우리도 같이 악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악한 이웃밖에 될 수 없습니다. 악한 이웃에게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는 자들은 원리적으로 그리스도인들 밖에 없습니다.

1).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잠언은 “포악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31)라고 말씀했습니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우리의 발걸음을 죄악으로 옮기는 자극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한 이웃을 대할 때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악에 대하여 호기심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부러운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악에서 멀리 떠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만큼 우리는 더욱 선과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말씀했습니다..

2). 악한 자를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 본문은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잠3:31)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악인의 행적을 알게 되더라도 그들의 행적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그들의 행적을 따르기만 하면 부자가 되고 출세를 하고, 높은 권세를 누리게 되더라도 그들의 행적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적은 불의한 행적이기 때문입니다. 온당치 못한 삶의 방법이요, 남을 불행하게 만드는 삶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미워하시며, 결국은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라고 노래하였습니다.

3). 악한 자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악한 자들에게 허물을 보이지 않고,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산상 보훈의 가름침을 이해해야 합니다.

산상 보훈은 악한 자들에게 적극적인 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악인들에게 악으로 대하는 것은 웬만한 용기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악인들에게 적극적인 선을 베푸는 것은 순교의 정신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5:39),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마5:40),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5:41),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세리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에게만 문안한다면 불신자들이나 이방 종교인들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불신자들이나, 세상의 종교가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것이 기독교인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을 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처럼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말씀하셨습니다.

끝맺는 말

“좋은 이웃이 되라”는 말씀은 참 좋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처럼 온전해 져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온전해져야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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