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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새 옷 (골 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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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새 옷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마치 더러운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듯이 말입니다. 12절의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와 함께 새로운 신분에 걸맞은 옷을 입으라는 겁니다.

1. 긍휼
긍휼"이란 말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심"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시인은 하나님을 긍휼하신 분으로 부릅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시 25:60). 그러기에 인생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으로 고백합니다.
긍휼을 생각하려면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떼 같음을 인해서 마음이 민망해지셨다는 표현을 떠올리면 됩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하여 놓아준 어떤 임금을 기억해 보십시오. 강도 만난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긴 사마리아 사람의 심정을 떠올려 보십시오. 돌아온 탕자를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던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새 사람이 입어야 할 첫 번째의 옷은 긍휼의 옷입니다. 우리 같은 인생을 향한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마음입니다. 긍휼은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 뭉클해지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2. 자비
이 덕목 역시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친절한 행동으로 구체화하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이 친절한 행동을 자비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워낙 불교에서 강조해서 자비하면 불교적인 용어로 생각하지만 쉬운 말로 바꾸면 친절한 행동이 여기서 말하는 자비입니다. 안됐다는 생각이 들면 친절한 행동을 해야 정상입니다. "참 안됐어"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행동을 본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불쌍하다는 마음을 가진 것이 여러분을 결코 의롭게 하지 못합니다. 지나가던 레위인도, 제사장도 강도 만나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보고 불쌍하다는 마음조차 갖지 아니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불쌍히 여겨 다가선 사마리아 사람을 우리가 본 받을 모델로 제시합니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권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불쌍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으로 위안을 받고 때로는 자부심을 갖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심판 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신 것은 거기에 따라서 행동하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입니다. 마음만 먹고 지나쳐서는 결코 우리의 유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새 사람을 입은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구체적 상황에서 바로 친절한 행동으로 구체화합니다.

3. 겸손
자비와 연달아 소개되는 덕목으로 겸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일으키시는 역사입니다. 거만한 자를 낮추시고 비천한 자를 높여주시는 역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당신을 소개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주님을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야 하며 서로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권면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을 말하며 남의 유익을 먼저 구하라고 권면합니다.

4. 온유
남을 불쌍히 여기고 남에게 친절을 베풀면서도 자신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겸손한 마음이라면 온유란 무엇입니까?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마음은 겸손한 마음이라면 남이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겨도 그것을 받아드리는 마음이 온유한 마음입니다. 뭐라고 남들이 입방아를 찧어도 "나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형편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실로 온유한 사람입니다.
온유라고 하는 말은 구약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곤 했습니다. "여호와여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시편86:1)" 곤고하고 궁핍한 자들을 성경은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땅을 소유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의 착취의 대상이고 아무런 권리 주장도 못하고 사람들의 보호도 받지 못한 계층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권리를 회복시키는 분이십니다. 절대 절명의 순간에 하나님만 바라고 부르짖는 자들이 온유한 자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주님을 닮은 자들입니다. 주님은 통치자로 오셨으나 군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말 대신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강압대신 온유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오신 그리스도야말로 온유하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온유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서로 서로 짐을 나누어 짊으로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할 뿐 아니라 외인을 향해서도 온유함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온유함은 유약함이 아닙니다. 다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의 권리를 기꺼이 양보하는 마음입니다.

5, 오래 참음
우리가 살다 보면 화가 날 때 있습니다. 그러면 끌어 오르는 화를 잘 참는 경우도 있지만 화를 잘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화를 내고 하는 말은 "내가 한 두 번 참았나"입니다. 물론 한 두 번은 참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래 참는다는 것은 한 두 번 참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오래 참고 다른 사람이 화를 나게 할 때에도 끝까지 보복하거나 분노를 터뜨리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얼굴 생김새만큼이나 서로 다른 사람들, 혹은 동료 성도들과 더불어 지낼 때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이것은 공동체를 세워 가는 귀한 덕목입니다.
여기 나오는 다섯 가지 덕목은 모두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특히 동료 신자들과 더불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에도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을 때 필요한 덕목도 있습니다.

6. 용서
13절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여기 개역 성경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하는 표현을 개역 개정판은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표준 새 번역은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거든"이라고 알아듣기 쉽게 번역합니다.
살다보면 어찌 문제가 없겠습니까? 서로 함께 사는 공동체를 이루다보면 거기에는 불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불평할 일도 있기 마련이고 때로는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있을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첫 걸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임에서조차도 서로에게 못마땅한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불만과 불평할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서로 용납하여 주고 피차(서로)용서하라는 겁니다. 여기 용납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제하고 용납하는 것을 말합니다. 용서는 은혜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용서를 하되 어떻게 하라고 하나요.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어떻게 용서받았나요?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즉 내가 주님의 은혜로 용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서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용서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에 대하여 분을 내거나 복수하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며, 오히려 은혜를 베푸는 것이 참된 용서입니다.

7. 사랑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입어야 할 겉옷을 살펴봅시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묶는 띠니라" 사랑은 마지막 장식을 하는 왕관과 같습니다. 모든 의관을 다 차려입고 마지막으로 관을 씀으로 끝맺음을 하듯이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본문은 권합니다. 긍휼이 가장 안에 입는 속옷이었다면 사랑은 마지막에 걸치는 옷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의 참 모습은 하나님 안에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랑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다른 사람에게 그런 사랑을 나타내라고 가르치십니다. 사랑은 느낌이 아니고 행위입니다. 사랑은 대가를 전혀 바라지 않고 내 편에서 남에게 주는 겁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왜 실패합니까? 심지어 부부의 사랑이 왜 실패합니까? 우리들 자신을 주기보다는 무엇을 받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참사랑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배후에 있는 능력입니다. 이 사랑의 능력이 있어야 교회 안에서 관대함과 용서를 베풀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 모든 덕성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띠입니다. 사랑에서 모든 덕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 중 첫자리를 차지하며 이에 따른 덕목, 희락과 평강, 오래 참음과 자비와 온유가 따릅니다. 사랑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때 사랑은 모든 다른 영적 덕목들을 합하여 영적 성숙의 증거인 아름다움과 조화를 낳습니다. 그리스! 도인도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 조화와 성숙은 우리의 삶이 계속적으로 균형을 이루며 성장해 가도록 만듭니다. (임윤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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