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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련함에서 일어나십시요 (삼하 24: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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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평안의교회가 전교인을 초청하며 운동회를 여는 뜻깊은 주일입니다. 1983년도에 무에서 시작케 하셨는데, 개척한지 5년이 지난 1988년도 부터 운동회라고 하는 감격스러운 성도의 교제의 장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벌써 열 일곱번째를 맞이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인도하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처음 운동회를 시작하던 해, "이제 우리교회도 운동회를 하게 되었구나...."하며 감격스러워 눈물짓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잘 될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을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공의 자리에 올라섰을 때도 중요하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에도 주님을 향한 마음은 변함이 없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마치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잊어버려 주님으로부터 호되게 책망을 받은 것처럼, 그러한 실수를 우리의 삶 속에서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말씀 마지막절인 10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행동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미련하게 행동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지혜롭게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론 자신이 가장 지혜롭다고 여기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지혜롭게 사는 양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성도여러분, 왜 다윗의 인구조사가 어리석은 일입니까? 왜 인구조사가 죄악스러운 일입니까? 더 나아가 왜 다윗은 스스로의 고백처럼 인구조사가 미련한 일이었을까요?

우리나라에서 실시하는 인구조사는 흔히 인구센서스라고 합니다만, 정확한 명칭은 통계청 사회통계국에서 실시하는 인구주택총조사입니다. 1925년 이래 매 5년마다 11월1일 0시를 조사 시점으로 하고 있으며, 전국적인 규모의 조사이기에 막대한 예산과 조사인력을 투입하여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사방법에 의해 지역별 인구와 가구 수는 물론 개별 특성까지도 세밀히 조사하는 인구주택총조사는 사회, 경제 그리고 인구학적 특성까지 종합적으로 분석한 고용정책, 교육정책, 교통정책, 보건정책, 주택정책 등 다양한 국가정책수립의 기초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이러한 행동을 보시고 다시금 진노하셨습니다. 다시 진노하셨다고 하는 것은 삼하 21장에서의 일로서, 사울 시대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에 대한 문제가 마무리 되지 않고 다윗 시대로 넘어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책임을 다윗에게 물으셨을 때 그는 성실히 해결책을 제시하며 감당하였던 사건을 의미합니다. 당시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기업으로 주신 땅에 엄청난 기근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이제 다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셨다는 것은 그와 같은 이유가 지금 또 다시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우리가 이 본문을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무척이나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많은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치시려고 그를 감동시키다니..." 이게 무슨 병 주고 약 주는 것인가?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역대상 21장에 가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저는 이 번역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윗의 마음에 무엇인가 격동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에 무엇인가 충동되어 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부분을 함께 알아가길 원합니다.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그의 마음을 격동시켜 인구를 조사하도록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의문을 주는 단어인 "다윗을 감동시키사..."의 감동시키다라는 말을 현대어 성경 (Modern Language Bible)은 수트 (Sut - 자극하다. 충동질하다)라는 비인격적 동사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말은 어떤 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그들을 대적하도록 자극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야웨 하나님의 책임을 가볍게 하거나 피하는 방편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진노가 하나님의 진노라는 점입니다.

3절에 보면,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왕이여,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십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왕에게 100배나 은혜를 더하실 텐데, 뭐가 부족해서 이런 일을 하십니까? 이런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의 충고는 매우 직설적이고 단호했습니다. 평행구절인 역대상 21장 3절에 보면, 요압이 이렇게 권면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은 어찌하여 이스라엘로 죄가 있게 하시나이까?"

그러나 다윗 왕은 요압장군을 재촉하였고 결국 그는 측근들과 9달 20일간이나 전국을 돌면서 인구를 조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9달 20일이 걸려 조사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칼을 뺄 수 있는 담대한 자가 80만이요, 유다에서 칼을 뺄 수 있는 자가 50만, 도합 130만명이라고 하는 전쟁에 나갈 수 있는 20세 이상의 대상자들이 보고 되었습니다.

21세기인 지금도 100만명이 넘는 군대를 가졌다면 세계 몇 위 안에 들만한 엄청난 숫자의 군대입니다. 남, 북한이 합친 군사력은 세계에서 몇 번째가 될만한 대단히 강력한 군사력이 DMZ를 사이로 대치하고 있지 않슺니까? 통일이 된다면 지금의 남,북한의 군사력을 1/3 수준까지 줄여도 좋을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100만명이 넘는 군사자원을 확인한 다윗 왕은 매우 흐뭇했을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인구조사가 군사력을 정비한다는 의미가 있었지만, 내적으로는 어느 나라도 엿볼 수 없는 강력한 국가로 성장한 이 밑바닥에 바로 나라고 하는존재를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다윗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엿보았던 군대장군 요압은 이 일이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일 것임을 알고 왕에게 간언했지만 다윗이 무시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인구를 조사한 후에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이 어떤 일을 행하고 나서 그 일을 깨닫고 돌이키는 일에 9달 20일이 걸렸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다윗이 자신에 대한 자만심과 자기만족과 허영심에 들떠있었느냐 하면, 자신에 대한 행동에 대해서 잘못된 일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데 거의 10달이나 걸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범하므로 큰 죄를 지었나이다. 자신이 행한 인구조사의 동기가 순수한 동기가 아니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감추어진 이유, 우리에게 감추어졌던 동기까지가 우리는 주님 앞에 내어 놓을 수 있는 정직함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다윗이 인격적인 매력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가 진솔하게 주님 앞에 내어 놓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어놓았을 때에 자신의 위치로 볼 때에 그의 책임과 그의 입장은 무척이라도 난처하고 손상을 입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다고 하는 고백했다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이제 주변의 어떤 상황도 그를 막지 못했습니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 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망각하고, 미련하게 행할 때는 없습니까? 모든 것이 나의 지혜로, 나의 경험으로, 나의 수고의 땀으로,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땀 흘려 수고해서 되었다고 그렇게 자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의 어떤 자리에서도 때로는 골짜기에서도, 때로 정상에서도 주님께 맡기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너의 삶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저가 이루리라. 다윗은 철저하게 주님에게 맡기는 삶이었지만 역대상 21장의 말씀처럼 사단이 다윗을 격동시켜서 무엇인가 다윗에게 충동질을 시켜서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에게 전폭적으로 맡겼던 삶에서 자기가 자기 인생을 가지고 가는 것 같이 그러한 삶으로 바꾸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있어서의 교만함이, 때때로 우리에게 있어서 허영심이, 우리에게 있어서의 인간적인 자랑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맡겼던 우리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바꾸려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여 집사님이 고백을 합니다. 목사님, 제가 로또복권을 샀는데 하나님께서 당첨하게 해 주시면 절반은 꼭 하나님께 드리고, 절반은 저를 위해 쓰겠습니다. 그래도 솔직하지 않습니까? 로또복권을 사가지고 목사님께 와서 기도부탁을 하는 거지요.

목사님, 제가 로또복권을 샀는데, 당첨되면 절반은 꼭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제가 꼭 쓸 일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대답을 하셨답니다. 천만의 말씀이오. 로또복권을 사면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로또 복권이 당첨되면 다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줄을 섰는데, 내가 왜 절반을 주겠다는 너에게 당첨되게 해 주겠냐?’ 로또복권 당첨되면 다 바치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줄을 섰는데, 절반만 드리겠다는 너를 내가 왜 당첨시켜 주겠느냐? 우스개 이야기지요.

그런데 이 여집사님이 그 말을 듣고 목사님에게 이렇게 고백했답니다. 목사님 그 말씀을 듣고보니까 제가 교훈이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전부를 바쳐본 적이 없어요. 로또복권을 반만 드리겠다고 하는 것도 자신의 삶 한 단편을 보여주는 거예요. 무슨 은혜를 하나님이 주셔도 항상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본 적이 없어요.

십일조를 드려도 온전히 드려본 적이 없고, 감사를 드려도 온전히 드려본 적이 없고, 무슨 시간을 드려도 온전히 드려본 적이 없고, 여러분 지난 속회공과가 뭐였어요? 하나님 앞에 포도원에서 일 하라고 하는 큰 아들, 둘째 아들의 권면에 첫째는 가겠다고 하고 가지 않고, 둘째는 안 가겠다고 하고 갔는데, 둘째가 간 이유는 그가 후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갔다는 것이고, 그는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주어진 속회강사님들의 권면이 뭐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실 때 즉시 하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렇게 저렇게 빠져나가다가 나중에 할 수 없어서 겨우 마지 못 해 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자.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시면 정말 기쁨으로 하자. 어쩔 수 없어서 정말 마지못해서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정말 기쁨으로 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면 이왕이면 온전하게 일을 하자. 적당히 눈치껏 시간 때우면서 일을 하지 말자. 정말 온전하게 주님의 일을 하자.

그런 권면을 여러분들은 들으셨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전부를 바쳐 본 적이 없어요. 그는 오히려 목사님의 핀잔 같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서 깨달음을 얻었어요. 내가 이제 하나님께 전부를 드리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다 받았는데 사실은 우리가 그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인색하게 행동하는지 마치 아버지가 사탕봉지 한 봉지를 사 가지고 들어오면 아이들은 부모들이 들어올 때 손을 먼저 보지 않습니까? 손에 무엇이 들려있는가? 아이가 덥썩 받은 그 사탕봉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지요. 부모는 아이를 테스트 해 봅니다. ‘아무개야, 아빠 사탕 하나 줄래?’ 그러면 그 사탕 봉지를 들고서 고민을 하지요. 아빠를 하나 주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결국은 고릅니다.

어떤 아이는 어떻게 골라요? 여기서 제일 조그만 것, 제일 작은 것을 뒤적거리다가 하나 딱 줍니다. 어떤 아이는 큰 것을 골라서 아빠를 주기도 하겠지요. 이미 고를 때에 모습을 보면서 아빠의 마음을 알겠지요. 쟤가 지금 큰 것을 고르고 있는지, 작은 것을 고르고 있는가? 아빠가 봉지 하나를 전부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작은 것 하나를 뒤적거리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아빠는 굉장히 상심할 것입니다. 저 녀석이 봉지 수백개 들은 사탕 봉지를 내가 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 하나 달라고 했을 때 적은 것을 고르고 있는 저 밉살스러운 저 꽤씸한 녀석, 얼마나 아빠에게서 실망스러운 모습이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가정에 일상적인 모습이지만, 실제적으로 우리의 하나님 앞에 우리가 행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 주셨는데, 그 중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실 때 거기서 작은 것을 뒤적거리고 있는 철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한 선원의 이야기입니다. 여객선에서 한 승객이 내리다가 발을 헛디뎌서 바다에 빠졌습니다. 저도 섬에서 오래 살았습니다만은, 섬에서 배가 도착하면 부족하기 때문에 100- 200m 쯤에 큰 배가 도착하면 조그만 배가 가까이 오면 거기서 옮겨타고 부두로 가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가는 일도 어렵지만 큰 배에서 작은 배로 옮기는 것도 무슨 널 뛰는 널판 같은 것 하나 쭈욱 배와 배 사이에 걸쳐 놓는데 배는 물결에 움직이지요. 널빤지로 건너가야 하는데 굉장히 위험합니다.

저희도 강화에서 배를 타고, 교동으로 가는, 교동의 아버님 목회하실 때 우리가 어렸을 때입니다. 한 겨울이었지요. 우리도 그런 어려움을 겪었지요. 그 때는 한 700- 800m 되는 소용돌이 칩니다. 가족들이 건너오고 마지막 누님이 건너고, 아버님이 건너는데, 이 배는 덜컹 거리고, 이 널판같은 판자는 양쪽 배에서 삐그덕 거리는데, 누님이 지나가다가 떨어진 거예요. 떨어지는 것을 아버님이 손을 내밀면서 팔을 잡아서 대롱대롱 매달렸어요.

그 때 아버님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섬에서 목회하다가는 자식 죽이겠구나. 아버님이 그 때 그런 생각을 하셨대요. 그래도 그 분 섬에서 목회 하시면서 대한민국 전 연회가 모인 자리에서 가장 목회를 잘 한 사람 표창 할 때 섬에 가서 목회한 아버님이 목사 중의 목사로 표창을 받은 아름다운 경험을 저는 추억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배에서 배로 가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한 아가씨가 그만 발을 헛디뎌서 빠져버렸습니다. 허우적 거리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인데, 이상하게도 선원들은 그 물에 빠진 아가씨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물에 빠진 아가씨의 가족들이 화가 나서 막 항의를 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빠졌는데, 그렇게 바라만 보고 있습니까?

그랬더니 선원들이 가족들에게 설명을 합니다. 물에 빠졌을 때에는 바로 접근하면 그 때에는 사람이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어느 누가 잡히기만 하면 그 사람도 같이 물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좀 안타깝긴 하지만 물을 조금 먹고, 안간힘을 쓰면서 힘이 조금 빠진 후에 우리가 들어가서 건져야 그도 살고, 우리도 살 수 있습니다. 결국 그가 물을 실컷 먹고, 힘도 다 빠진 후에야 이제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힘도 다 소진된 후에야 선원들이 그 아가씨를 안전하게 구조를 했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우리의 힘만 가지고 살려고 발버둥칠 때 우리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의 자리에 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인구조사를 행한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몇 가지를 결론적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지만, 때로는 맡기다가 어느 시점에 가서는 우리 스스로 우리가 그 삶을 살아 보겠다고 하는 우리의 허영심과 우리의 자기만족이 우리를 격동시키는 그런 경우를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9달20일이라고 하는 귀한 시간을 그는 낭비하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이 때가 악하다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주어진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주님을 위해서 헌신할 시간이 많지 않음을 주님이 말씀하는데, 우리는 어리석은 일로 우리의 시간을 얼마나 많은 세월을 허송하는지 모릅니다. 나의 만족 때문에, 나의 허영심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윗의 이런 모습을 통해서 다시금 우리는 다윗의 인격적인 아름다움에 다시금 다가가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다윗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39권의 구약성경에 결론이 무엇입니까? 여러 다양한 장르로 성경이 고백되어져 있지만 다양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록되어져 있지만 결국 구약성경 전체의 메시지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너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흰 눈 같이, 양 털 같이 희게 해 줄 그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많은 세월을 낭비했고,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그런 일을 행했지만 결국 그는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돌아온 줄로 믿습니다.

주님 내가 미련하게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다윗의 고백은 다시금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의 삶을 붙잡으시고, 인도해 주시는 계기가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삶은 인생의 경주라고 말합니다. 그 마라톤 같은 인생의 경주에서 우리의 자만심과 허영심 때문에 많은 세월을 허송하면서 곁길로 나갔던 우리의 삶의 자리라고 할 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다시금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미련하게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삶을 주님께 맡기고 살기를 원합니다. 고백하는 평안의 성도들 되셔서 이제는 미련함을 버리고 이제는 미련함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는 지혜로운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의 지난 삶 속에 때때로 미련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에 많은 세월을 허송하는 어리석음이 있었으나 깨닫게 하시고, 결단케 하시고, 돌아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 이 귀한 시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시사 다시금 주님과 동행하며 다시금 신앙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믿음의 복원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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