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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회용 인생 (수 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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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 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십 이명을 택하라.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우리 인간에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 더 살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없습니다. 야구 경기처럼 인생에서 서비스 볼(Ball)이 허용만 된다면 모두 다 멋진 제2의 생을 살고, 죽은 후에 지옥에 다녀온 사람은 더욱 확실하게 바로 예수를 믿어 천국은 맡아 놓고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4절에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번 뿐인 인생이기에 긴 것 같지만 일회용 인생이라 정의 하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1회용 용기나 면도기 처럼 가볍게, 쉽게 버리거나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인생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떤 분은 우리 인생을 "일회용 반창고"라고 비유했고 또 "하루살이"라고 비유하며

성경은 인생은 “풀과 쉽게 시드는 꽃”으로 비유합니다.??시편 103편 15절에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라고 하였으며,??“아침안개”, “구름, “시위를 더난 화살”,“허무한 것과 헛된 것”으로 비유하였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2장 11절에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라고 말씀했는데, 이는 인생이 신속하게 지나가는 짦은 세월이므로 허무하다는 뜻이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이 길을, 평생에 처음 가보는 일회용 처럼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의 일회용 인생 자체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말씀드립니다.

일회용은 사용한 후 다시 사용할 수 없기에 신중하게 사용하는 사ㅏㅁ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무전 여행자와도 같고, 초행길의 등산가와도 같고, 대낮의 장님과도 같다고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일 일을 모르고, 심지어 잠시 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광야와 사막 길을 걸어갔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이 아니고는 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간다는 것은 영적으로는 바로 [믿음]을 따라 사는 신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인생길을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서 구원받은 성도로 구별되이 예수님을 통해 얻은 구원을 상실하지 아니하고, 천국까지 잘 갈 수 있겠습니까? 그 비결을 본문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13, 16절)

4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 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이전에 너희가 이 길을 지나보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잘 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3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명령이 바로 “그 뒤를 좇으라.”는 말씀입니다. 즉, 순종하는 신앙이 되라는 것입니다.

13절에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이 약속대로 순종하였더니 16절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라고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능력으로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순종하는 신앙은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이 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을 따르라고 했으니 하나님 외에는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2장 11절후반에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말고,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인생길을 어떻게 사는 것이 복된 길인지 잘 알고, 천지의 모든 상황을 알고, 조절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만 따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22장 19절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 외에 다른 단을 쌓음으로 여호와께 패역하지 말며, 우리에게 패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른 잡신도 하나님과 같이 대등하게 두지말라고 명령합니다.

다른 신을 섬길 때 여호수아 23장 16절에는 "만일 너희가 다른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의 명을 어기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하여 너희에게 주실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망하리라."고 했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같이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물질이나 인간이나 권력이나 권세 명예나 그 무엇도 하나님과의 대등한 자리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지만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남아있지 않았고, 몇번의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쉽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마태복음 7:24~25에 보면 주님이 집 짓는 비유를 통해서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그 집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씀했습니다. 바로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반석 되시는 주님의 말씀 위에 나의 신앙이 세워진다면 모질고 거친 시험과 환난과 연단이 홍수처럼 몰아쳐도 절대로 요동하지 않게 됩니다. 말씀 순종과 실천의 신앙으로 좌로 우로 흔들림이 없고, 요동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으나 여호수아 5:6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시리라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하나님이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허락하신 땅을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함으로 보지도 못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을 다 소유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요한복음 6:66∼68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다 물러가고 열 두 제자만 남았을 때 예수님이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 때에 시몬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영생의 말씀을 확신하고,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자신의 중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신앙고백이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고 했을 때, 누가복음 5:5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주님께 고백하기를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때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졌다고 했습니다(눅 5:6).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와 같이 풍성한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멘'하고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으로 받으면 받는 순간에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무슨 일을 하다가 잘 안되고, 염려와 근심이 될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승리할 수 있는 약속과 소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시험 당할 때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고전 10:13).

여호수아 24장 14-18절, 25-26절에서 참 신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기라고 외쳤습니다. 혹시 너희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할찌라도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결단한 의지를 여호수아는 선언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참신이 없습니다. 하나님만 참 신이십니다(사 45:22, 46:9, 49:7 등) 비록 우리 인간이 한 번도 안 가본 곳을 갈찌라도 그곳을 잘 알고 계시는 만유 주 우리 하나님만 따라가면 틀림없이 그 길은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요, 살길이요, 선공과 승리의 길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3절에 언약궤 메는 것을 보면 '너희 곳을 떠나' '언약궤 뒤를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 제일주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꿀을 먹으라는 말씀이 많은데, 피곤할 때나 지칠 때에 꿀을 먹으면 좋습니다. 사무엘과 요나단이 전쟁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에 꿀을 조금 먹고 소생하였으며, 세례요한도 꿀을 먹었다는 말씀이 성경에 나옵니다.

꿀은 몸의 피곤을 가시게 하고, 항생 물질도 포함되어 있어서 장티푸스나 기관지, 폐렴 등에도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칼슘과 마그네슘이 있어서 불면증에 좋고 신경통, 관절염에도 효과가 있으며 비타민C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에 가장 많다고 합니다. 채소는 집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비타민이 많이 파괴되지만, 꿀은 1년 동안 두어도 비타민이 파괴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몸에 좋습니다.

벌은 지혜가 있어서 화학비료를 뿌린 밭을 잘 구별하여 유기질 비료 밭에만 들어가서 꿀을 채취합니다. 꿀 1kg을 만들기 위해서 벌은 수 백 만개 꽃송이와 물 흙, 인분 등에서까지 많은 곳에서 꿀을 채취합니다. 이렇게 많은 곳에서 채취하기에 꿀을 먹는 것은 수만 가지의 좋은 것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꿀은 기억력을 좋게 하고 식욕을 왕성하게 하며, 피부에 젊음을 가져다주고, 눈을 밝게 하고, 위장병에도 좋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좋은 것을 언제나 꿀에 비유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음식 맛이 좋을 때에 꿀맛 같다든지 외국의 경우 아내를 소개할 때도 [하니]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으로 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꿀을 많이 먹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먹으라는 것이고, 꿀이 달다는 것은 말씀이 꿀송이 처럼 달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인스턴트식품이나 조미료, 설탕 등이 잠간은 달지만 부작용이 있듯이 마약과 술취함, 음란함, 열락함, 오락과 사치 그리고 권력을 이용해서 나쁜 것을 하는 것은 잠깐은 달지 몰라도 우리 삶의 건강을 해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단 것은 말씀 속에 있으며 ,모든 치료는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길은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승리의 길, 행복의 길, 건강의 길, 이 모두가 말씀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 가정, 기업, 나라가 든든한 반석위에 집을 지은 것 같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말씀의 빛을 따라 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언약궤를 쫓으라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너희 곳을 떠나라'고 했으니 완전히 나의 생각, 나의 사상은 팽개치고 전능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만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산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 어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100% 그대로 듣지 않고 삭감시켜 듣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할 때 삭감시켜 행하는 자도 있음을 봅니다. 말하자면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들을 것도 듣고 행할 것은 행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행하기 힘든 것은 포기하는 자유주의 신앙을 소유한 어리석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 대로 성경 말씀을 뒤바꾸어 놓고, 행하는 비 진리의 사람이 많습니다. 여기서 이단이니, 사이비 종파가 생깁니다. 이것은 곧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 "다른 진리", "다른 예수"인 것입니다 (고후 11:4).

이것은 곧 자기 마음대로이니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앉는 교만을 범하게 됨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것이요, 자기 위주의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생활의 척도요. 나침판이요. 등대와도 같은데, 이 말씀이 없다면 한번도 안 가본 길을 어찌 올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우주 천지의 질서를 말하고 있는 그 말씀을 이정표로 삼아 따라가면 한 번도 안 가본 인생 길이지만 어떤 장애물이 닥쳐도 요단 강물이 가로막고 있어도 목적에 쉽게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따라가면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 하겠네" 그렇습니다.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는 자는 환난이 올 때 참 하나님만 붙잡고,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 이름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칼빈 목사님은 "수고는 내가 하고 영광은 하나님께"라는 좋은 교훈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영적 힘이 없고, 길도 없고, 목적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며 따르는 귀한 인생길이 되시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 성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5절).

“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요단 강 도하를 앞두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결'(* , 코데쉬)을 명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성결의 구체적인 행위로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성결한 의식 즉,??의복을 빤다든가(출 19:10, 14), 옷을 갈아 입는다는가(창 35:2), 또는 여인을 멀리하는 것(출 35:2)등과 같은 외부적 성결 행위를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로서는 그러한 준비를 할만큼 시간적 여유가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여호수아가 명령한 성결(聖潔)은 심령의 성결, 곧 영적 성결의 자세를 삼가 가다듬으라는 의미로 봄이 좋습니다(Keil & Delitzsch, Vol. . p. 41). 한편 공동번역은 "목욕 재계하여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평생 처음 단 한번 뿐인 이 귀한 인생을 깨끗하게 구별되이 살다가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평생에 처음 걷는 인생길에 거룩하며, 성결케 살지 못하고, 죄 투성이로 살아간다면 이 길 다 간 후에는 쓴 후회와 최후의 심판 받을 때 열매가 없는 쭉정이로 서게 될 것입니다. 더욱 비참한 것은 쭉정이는 불 속에 던져질 것입니다.

요한게시록 19장 8절에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마련한 천국잔치에 의롭고, 개끗하고 성결한 삶을 산 사람만 영적인 세마포 옷을 입은 자들이 되어 잔치에 참여하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콩 심은데 콩이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납니다.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 거짓과 사기와 도둑질을 심으면 무엇을 거두겠습니까?(갈6:7) 우리가 심은 씨는 우리가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내가 성결케 사는 것이 곧 행복이요, 기쁨이요, 평화가 되어야 합니다. 성결함이 나의 영적인 무기가 되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인 다윗은 (시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 했습니다.

성결에는 "깨끗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동시에 더럽혀지지 않은 마음과 점과 흠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처럼 구별되이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결이라고 합니다. 거룩하다의 뜻은 구별되었다는 뜻이 있는 것이고, 그 거룩함을 위하여 애쓰는 신앙의 상태를 성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의 성결은 위선이 없는 순결한 상태요, 더러움이 없는 깨끗한 상태이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소유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더라도 탄로 나지 않으면 이야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은 죄를 고민은 하겠지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적인 체제는 외형을 중요시하므로 사람들을 위선자로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는 <외식하는 자여>라고 말씀 하셨지만, 죄인들에게는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죄인들은 그들의 죄를 숨김없이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는 위선자를 만들고 상황을 악화 시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선행을 하면 높이고, 자신의 행위를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거룩함을 알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다윗의 경우를 살펴보면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은밀한 죄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서 문제를 지적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왕이여, 양떼와 소떼가 많고 돈도 많은 한 부자가 있는데, 그의 이웃에 아주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새끼 양 한마리가 있었는데, 그는 이 양을 아주 애지중지 하며 정성껏 길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에게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부자는 자기 양을 잡지 않고, 가난한 이웃의 하나밖에 없는 새끼 양을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습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나단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내가, 아니 난 이웃의 양을 죽인 적이 없는데?>

<아니오, 양은 죽이지 않았지만, 당신은 밧세바의 남편을 죽였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궁녀들 모두가 당신의 여인이 될 수가 있는 데도, 당신은 이웃의 하나밖에 없는 여인을 도둑질 했습니다> 이와 같이 엄청난 문제를 가진 다윗이 남을 판단했던 것입니다.

자기는 훨씬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교회 안에도 종종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이 남을 비판하는 데는 더욱 열심인 것을 종종 봅니다.


약 4:8절 "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거룩함을 닮습니다.

일본에 예수를 잘 믿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별명이 "감사할머니"였습니다. 언제든지 무든 이야기를 해도 "감사합니다."하며 두 손을 모았습니다. 어떤 집 아이가 병들었다고 해도 "감사합니다." 아기가 입원을 했다고 해도 "감사합니다." 심지어는 그 아이가 죽었다고 해도 "감사합니다." 이래서 얻은 별명이 {감사할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수요일 저녁 교회에서 예배가 끝나고 돌아가는데 갑자기 소방차가 요란하게 지나갔습니다. 할머니는 혹시나 우리 집이 아닌가? 반신반의 하면서 급히 뒤따라 가보니 자기 집 쪽이었습니다. "아이쿠! 우리 집에 불이 났구나! 나무아미타불 !" 하고 주저앉았다고 합니다.

그동안 할머니가 "감사합니다." 할 때에는 여유가 있고, 남의 일이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에 다급한 일에 생기니까 생각도 없이 {나무아미타불}이 나온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아니한 삶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과 상관없는 행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이 되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로다. " (시24:3-5) 고 시편기자가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우리 미스바교회의 성도들의 신앙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결한 삶을 살기위해서는 환경을 초월해야 하며, 물질을 초월해서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성결함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성도의 견인은 주 앞에 설 때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더럽히지 말고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신령한 생활에 힘쓰며, 성결의 씨를 심읍시다. 그리하여 30배, 60배, 100배, 1,00배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게서 우리가운데 행하시는요단강을 갈라주시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3.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너고 [하나님을 높이며][영원히 기념키 위해] 기념비를 세우(수 4:5-7)는 멋있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4장 7절의 이 돌들이...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 어떤 사건들을 기념하는데 있어서 돌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7:26;8:29;창 28:18;35:14;삼상 7:12;삼하 18:17). 경우에 따라 큰 돌 기둥은 증거물로(24:26, 27;삼상 7:12), 혹은 죽은 사람을 위한 기념비로(왕하 23:17; 겔 39:15) 세워졌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돌 혹은 기둥들은 하나님께 기념물로 드려지기도 했고(창 28:18-22;사 19:19), 그 장소에는 종교적 명칭이 붙여지기도 했다(창 35:7). 이런 견지에서 여호수아가 길갈에 세운 본문의 돌은 기념비적인 성격을 띤 한 예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돌을 메지 않고 물쌀이 강한 요단강에 들어갔다면 그들은 떠내려 가거나 넘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을 메고 갔더니 무사히 건널수 있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이라고 하는 십자가, 직분이라는 무거운 돌을 메게 하십니다. 그 귀한 직임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 때문에 사실 자기 영광 나타나고, 이름 날리는 사람 많습니다. 바울과 실라에게 헤메와 쓰쓰라는 이름이 주어질지라도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야 함이 마땅한데, 요즈음은 그런 사람이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까가 문제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배를 채우고, 내 생각 내 뜻을 관찰시켜 볼까하는 주의와 사상은 곧 하나님의 지위를 모욕함이요,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를 도적질하는 악덕의 행위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헤롯이 신의 목소리라고 칭송하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게 여오강르 돌리지 안니하자 충으로 치므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듯이, 우리 또한 하나님이 높여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높임이 곧 내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잠시라도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전을 벗어나서 이 땅에 절대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쓰임 받을 때 악한 마귀는 역사하지 못합니다. 하나니ㅐㅁ을 위한 수고와 헌신이 요구됩니다.

영어에 "이해"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under + stand =understand 곧 "밑에 선다"란 뜻이 있습니다. 내가 밑에 서는 것은, 곧 남을 높여 드림은 내가 낮아짐입니다. 내가 땅바닥까지 낮아질 때 우리 하나님은 영광을 최고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를 더 살겠습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말씀합니다.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길을 내 마음대로 살아 일회용 용기처럼 폐기처분하는 인생이 된다면 얼마나 불쌍한 인생입니까? 한번 밖에 살지 못하는 귀한 인생길 더욱 신중하게 후회가 없도록 아름다운 이력서를 남기며 살아야 합니다.

드라마에 간혹 상대방을 배신하거나 고통을 주다가 결국 자신이 같은 신세로 전락될 때에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말하거나 부모가 내 자식 잘못키웠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확실히 예언하는데 이 자리에 오신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100년 안에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나무코트를 입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마지막 날이 이르기 전에 주님 오시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이 악한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과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바로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금년에 이제 겨우 3개월도 제대로 남지 않은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은사와 직분을 가지고, 하나님 제일주의로 삽시다.

오늘 본문 말씁을 통해 권고해 주신 것처럼 말씀 제일주의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며, 배우고 알고 있는 말씀을 최선을 다하여 실천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성결 제일주의로 날마나 거룩하게 삽시다. 하나님의 영광 제일주의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올바른 선택으로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복 빌어 드립니다. (황 영복 목사)

내 평생 일회용 처럼 한 번만 살 수 있는 귀한 인생을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도록 말씀 순종과 성결의 삶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과 충성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좋은 신앙의 열매, 영적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어 금년 한해의 결산을 할 때에, 인생을 결산하시는 하나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러움 당하지 않고, 구원을 상실해 버린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면류관을 받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 받는 사명 자의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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