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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의 목적 (시 7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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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존재의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길가의 풀 한포기도 필요 없는 것이 없습니다. 한의사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약제라고 합니다. 땅속에는 지렁이를 비롯한 징그러운 벌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무 쓸모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벌레가 많은 것은 그 땅이 옥토라는 증거입니다. 그것들이 땅을 기름지게 만들고, 그 땅에서 생산되는 곡식이나 체소나 과일로 사람들이 먹고 살아갑니다.

동물들 가운데 가장 징그러운 것은 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외인 경우는 있는 것 같습니다. 외국 어느 가정에는 뱀을 애완용으로 기르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체로 뱀은 싫어합니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죄를 범하도록 한 것이 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사회에는 이 뱀을 즐겨 먹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뱀을 잡는 장사꾼들에 의해 뱀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징그러운 뱀들이 산이나 들에 잘 보이지 않아 좋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천연 카펫인 잔디에 사람들이 안거나 누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들쥐들이 옮기는 페스트라는 무서운 질병 때문입니다. 이 들쥐를 먹이로 잡아먹는 것이 뱀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필요로 하는 곳이 있습니다.

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종이 지하에 굴을 파고 사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토양이 갈리어 통기성을 높인다고 합니다. 많은 양의 먹이를 섭취하므로 배설량이 많아서 생태계에서의 물질순환을 빠르게 하고 토지를 비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쥐류의 제거는 토양의 불모화를 가져 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쥐류는 의학, 치의학, 약학, 생물학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실험동물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겠습니까? 인간은 더욱 분명한 창조의 목적이 있고, 존재의 이유가 있습니다. 목적을 깨닫고 그 목적을 따라 살아갈 때 그 사람의 삶이 아름다워집니다. 보람되게 됩니다. 행복하게 됩니다. 성공하게 됩니다. 이러한 삶의 목적은 사람이 정하지만 그 목적이 그 사람의 생애를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삶의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의 삶의 모습들을 우리에게 거울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물질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가운데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2:16-19에“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복 많은 사람이며 부러운 사람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다고 하셨을까요? 이 사람의 생각 속에는 내세에 대한 계획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누가복음 12:20-21)고 하셨습니다.

물질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없으면 단 하루도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의 허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질이 만능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소중한 것에는 전혀 힘이 없는 것이 물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세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만나면 언제나 반갑습니다. 그래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친구였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만나면 반갑고 친하게 지내긴 했지만 그다지 소중하게 여기는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친구는 친구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반갑게 여기거나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은 왕으로부터 궁궐로 입궁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궁궐에 들어가기가 겁이 났습니다. 혹시나 자기가 모르는 사이에 나쁜 일과 연관되어 벌을 받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길로 곧장 첫 번째 친구에게 찾아가 함께 궁궐에 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친구는 쌀쌀맞게 대답했습니다.“내가 왜 자네와 함께 그곳에 가야 한단 말인가? 다시는 내게 그런 부탁하지 말게.”두 번째 친구 역시 듣고 싶었던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그것 참 안 됐네. 그러나 나도 궁궐에 들어가기가 몹시 겁이 나네. 궁궐문 앞까지는 같이 가줄 수 있네만...”두 친구 모두에게 거절당한 그는 힘없이 세 번째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세 번째 친구는 그의 손을 붙잡고 흔쾌히 승낙 했습니다.“함께 가고말고. 자네는 나쁜 일을 한 게 없으니 두려워 할 것이 없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내가 기꺼이 자네의 결백을 증언해 주겠네.”

이 세 명의 친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첫 번째 친구는“재산”을 의미합니다. 사는 동안 재산을 모으기 위해 무척 애를 쓰지만, 일단 죽은 다음에는 내 것이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두 번째 친구는“친척”을 의미합니다. 친척은 살아있는 동안 서로 친하게 지내고 죽은 다음에도 무덤까지 따라가 줍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땅 속에 묻힌 다음에는 머지않아 그 사람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자기의 삶을 살아갑니다. 마지막 세 번째 친구는“착한 일”을 의미합니다. 평소에 그다지 눈에 띄지 않지만, 그 사람이 죽고 난 후에 그의 선행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상급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선행은 사람들 입에 오랫동안 오르내리며 그 사람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하며 그를 존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누가복음 16:9)하셨습니다. 이 친구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물질이 필요한 경우 그 물질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아끼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강철 왕 카네기는 돈 쓰는 방법을 세 가지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첫째, 유언으로 자손에게 분배하는 방법.
둘째, 사후에 공공사업에 기증하는 방법.
셋째, 생전에 공공사업에 분배하는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신앙인이었던 카네기는 수입의 대부분을 셋째 방법으로 썼다고 합니다. 카네기는 또 하나님께 헌금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만물과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이다.
둘째, 영적 전쟁의 유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동정과 구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넷째, 하늘에 보화를 쌓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기 위해서이다. 라고 했습니다.
물질은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물질은 목적을 이루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목적을 두면 그 사람의 삶은 추해지고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9-10) 라고 하셨습니다.

2. 권세를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그 사람입니다. 구약성경 사무엘상서에 사울 왕에 대한 기사가 지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이 되기 전 사울의 인품은 참으로 고상했습니다. 사무엘상 9:2에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들어 왕을 삼으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에 사울은 겸손하여 말하기를“사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 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사무엘상 9:21)라고 했습니다.

왕이 된 후 사울의 고상했던 인품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본래 준수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세워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만 권력을 자신의 삶의 목적처럼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사울의 인품은 파탄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소년 다윗은 나라를 건지려는 일념으로 생명을 아끼지 않고 나가 골리앗과 싸워 이기고 나라를 건졌습니다. 그러한 소년 다윗을 정적으로 여겨 그를 죽여 없이하고자 온갖 음모를 다 꾸몄습니다.

사울 왕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자, 딸의 순수한 사랑까지 다윗을 죽이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칼을 피하여 놉이라는 지역에서 살고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로 갔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왕의 비밀한 일을 위해 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피곤에 지친 다윗에게 먹을 음식을 주었고, 급히 달려오느라 무기를 가져오지 못했다고 했기에 다윗이 죽이고 빼앗은 골리앗의 칼을 내어 주었습니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울은 당시의 정황을 알아볼 것도 없이, 다윗의 행방을 자기에게 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사장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그때 사울의 칼에 억울하게 죽은 하나님의 제사장 아히멜렉을 비롯하여 85명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이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사울 왕의 모습입니다. 그 앞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마저 사라졌습니다. 잔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울은 끝내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으로 망하고 말았습니다. 자신만 망한 것이 아니라 그의 가문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요즘 텔레비전 방송에 징기스칸에 대해 방영하는 것을 몇 번 본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 역시 잔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어릴 때 의형제를 맺고 서로의 피를 술에 타서 마셨습니다. 그런데 훗날 서로는 경쟁상대가 되었습니다. 그때 징기스칸은 그 의형제를 죽이기 전 하는 말이 “하늘에 태양이 둘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이 몽고 대륙에도 진정한 권력자는 둘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하면서 그의 척추를 꺾어 죽였습니다. 그는 권력을 차지하고 또 유지하기 위해서 무수한 사람을 죽였습니다. 세월이 흐르자 그도 역시 죽었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마지막 남긴 유언은 “내가 죽거든 관 좌 우편에 구멍을 내고 나의 빈손을 관밖에 나오도록 해서 내가 마지막 떠나는 나의 빈손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켜보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빈손으로 떠나는 것이 인생인데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단 말인가! 라는 후회의 표현이었습니다.

권세가 나쁘다거나 권력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두 사람 이상만 되면 조직이 필요하고 그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도자에게 주어지는 권력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권력 역시 목적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 권력으로 이루어야 할 또 다른 경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라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지도자가 아쉽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선진국에는 참된 지도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권력을 자신의 야망성취나, 정적을 해치는 도구나, 부를 축적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 예로 미국의 후버 전 대통령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는 공학도 출신으로 국가의 먼 장래를 바라보고 네바다 주와 애리조나 주 사이에 댐을 건설했습니다. 이 댐을 건설할 당시 야당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후버는 민심을 잃어 대통령재임에 실패했습니다. 그때 이미 댐 공사는 80% 가량 진척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후임 대통령이 그 댐을 완공한 후 물을 가득 체우고 보니 놀라웠습니다. 이것은 댐이 아니라 거대한 바다였습니다. 이 댐의 물로 사막을 옥토로 만들었고, 여기에서 만들어지는 전력으로 3개 주를 밝히게 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된 미 의회 의원들은, 이 댐은 신이 주신 지혜로 만든 것이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후버를 극찬했습니다. 그리고 국민 앞에서 그에 대해 비난했던 것을 사과하고, 그 댐의 이름을 후버의 이름을 따서 “후버댐”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3. 쾌락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쾌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을 받은 도시가 있었는데, 그 곳이 곧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음란에 도취되어 짐승처럼 살아가던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에는 인간답게 살아가는 의인 다섯 명이 없었기에 하나님의 유황불 심판을 받아 이 지구상에서 종적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그 멸망의 흔적들이 지금도 사해근처에서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가 되면 이 지구는 사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날이 가까워 올 때 나타나는 징조가 있는데 그 징조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누가복음 17:26-30)고 하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짓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가운데 노아 때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 심판이 왔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짓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육체의 욕망우선, 세상의 쾌락제일주의에 빠진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멀리 벗어나 있는 타락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또한 말세의 징조에 대해 디모데후서 3:1-4에 말씀하시기를“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하셨습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다고 하셨습니다. 쾌락은 사람을 추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부끄러움과 후회를 낳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사사였던 삼손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하나님을 공경하며 이스라엘 민족들로 하여금 평안한 삶을 살아가도록 지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삼손에게 그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괴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사명을 망각하고 들릴라라는 적국 블레셋 여인에게 눈이 멀었습니다. 이로 인해 삼손의 말로는 처참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힘을 잃은 삼손은 적군에게 붙잡혀 양쪽 눈이 뽑히고 그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쾌락의 말로는 예나 지금이나 대동소이(大同小異)합니다. 인간은 육체의 쾌락을 즐기기 위해 지음 받은 존재가 압니다. 더 높고 고귀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누구에게나 육체의 욕망을 통해 미혹합니다. 육체의 욕망이 어떠한 것들입니까? 갈라디아서 5:19-20에“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5:24의 말씀에는“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하셨습니다.

4. 하나님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인간 창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넘치는 복을 받아 누리며 살아간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아가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120년간 묵묵히 방주를 만들어 홍수의 심판을 면했습니다. 에녹이 그렇습니다. 그는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들림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예, 하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고향과 아비 집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식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에 가서 제물로 드리려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시편 기자도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장수하길 원합니다. 장수하길 바라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오래 살려합니까? 어느 분은 말하기를 “요즘 점점 좋아지는 도로를 보면 오래 살아서 이 좋은 길을 마음껏 달려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장수의 목적이 좋은 도로로 마음껏 달리는 것이라면 그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삶의 목적, 장수의 목적 한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5절에“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6절에도“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17절에도“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18절에도“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과거에도 전했고, 지금도 전하고 있고, 앞으로도 전하고자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다하도록, 늙어 백수가 될 때까지 나를 버리지 말고 지켜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삶의 꿈이 하나님입니다.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의 꿈은 오직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소망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섬기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망은 곧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베드로후서 3:8-10에“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타락한 세상의 종말을 지연시키는 까닭은 아무도 멸망치 않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애타는 심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심정을 깨닫는다면 우리들이 해야 될 삶의 방향, 삶의 목적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므로 멸망을 향해 줄달음질하는 죽어가는 불신 영혼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느 장로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전도 안합니다. 전도해서 뭐합니까? 우리교인이 300명쯤 되는데 적당해서 아주 좋습니다. 가족적인 분위기이고요. 서로 다 알아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괜히 전도해서 사람이 많아지면 목사님이 교인들 이름이나 압니까? 교인들끼리 서로 알기나 합니까? 그게 교회입니까? 단체죠. 교회가 어디 회사입니까? 우리는 그래서 전도하지 않습니다. 300명 정도인 가족적인 분위기의 교회야 말로 정말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아입니까? 우리교회는 성경적인 교회의 모델입니다. 괜히 전도해서 사람만 많아지면 교회가 시장바닥 같고, 말썽만 많아지고 하는데 그게 무슨 교회입니까? 그래서 우리교회는 전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괴변이 명언처럼 들릴 때도 있습니다. 얼른 듣기에는 일리가 있는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아직 교회가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한 증거입니다.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한다면 그런 말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비유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몇 해 전 삼풍백화점이 무너져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생존자를 구하고자 수많은 구조대원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때 만약 어느 구조대원이 “이만하면 됐습니다. 그만 둡시다. 더 구조해내면 병원의 병상도 모자라고, 치료하는데 의사들 고생만 합니다. 다친 사람들은 치료하는 동안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할 것이고, 그러면 시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정도 구조했으면 됐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죽어가는 육신의 생명이 소중하다면, 죽어가는 영혼의 생명은 더욱 소중합니다. 이 생명 구원에는 끝이 없습니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기까지 영혼구원의 노력은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에빌 부르너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불은 타고 있는 동안만 불이지 꺼지면 불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은 타고 있는 동안만 불입니다. 꺼지면 불이 아닙니다. 교회는 전도하는 동안만 교회이지 전도의 불이 꺼진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존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란 단순한 인간단체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22에“교회는 그의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18에는“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27에는“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체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머리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며 명령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누가복음 14:23) 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 4:1-2에는“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어느 여자 권사님은 해마다 50명 이상을 전도해서 교회로 인도해 오는 분입니다. 이 사람은 오후 8시에 퇴근하는데, 퇴근해서 세수하고, 잠깐 저녁 먹고, 8:30-9시 사이에 전도를 한다고 합니다. 하루는 신혼부부가 이사를 왔는데 이 신혼부부에게 전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8:30-9시 사이에 그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집에 들어가면서“아이고, 색시, 교회 좀 나와, 하나님이 이렇게 좋은 가정을 만들어 주셨는데, 교회에 나오면 더 행복하지.”하고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 집은 잠잘 준비를 하는 시간인데 주책없이 매일 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때를 가리지 않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랑이 화가 났습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라야지. 그래서 아내를 향해 “이봐, 또 왔어. 빨리나가서 안 믿는다고 해.”라고 시켰습니다. 짜증이 난 색시가 화를 내면서 “안 믿는다고 그러면 매일 올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신랑이 하는 말이 “에이 썅, 그러면 믿는다고 그래 버려.”그래서 이 사람이 교회를 나와 예수님을 만나고 열심히 예수님을 섬기는 가운데 여전도회 회장이 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벌써 또 가을이 왔습니다. 참으로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까? 무상한 물질이나, 명예나, 세상열락이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삶의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내 삶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면, 그곳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넘치는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삶의 보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부귀를 원하고 명예를 원하고 행복을 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와 같은 것들은 덤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는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 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 3:13)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익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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