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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받아야 할 세 가지 (고후 12: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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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은 모두 세 차례였는데 제2차 전도 여행에서 바울은 고린도 항구를 방문하였다. 바울은 거기서 1년 반 동안 머물며 회심서를 강론하였고 에베소로 떠나갔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을 머물며 교회의 실상을 파악하였고 문제의 해답으로 지침서같은 편지를 써서 보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변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서 교회의 치리를 요구한다. 그러나 교회는 변화되지 않았고 사람들의 신앙생활도 오만과 영적 갈등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래서 디모데의 뒤를 이어 디도를 보낸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의 교훈을 따르며 순종하고 삶을 고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래서 두 번째 고린도후서를 쓰고 추후 세 번째 고린도를 방문할 것을 알리게 된다.
이는 바울의 목회적 태도를 보여준다.

첫째, 바울은 교회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고후12:14을 보면 에베소에서 고린도를 향해 세 번째 나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육지로의 길이 아니고 뱃길로 가는 바닷길이었으니 바람과 파도의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고린도교회로의 방문 계획을 세 번째로 실천하고 준비한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고 성도들이 새로워진 좋은 소식도 있었지만 아직도 고치지 아니한 나쁜 삶의 자세가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고후13:1을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터이니..." 가서 바울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1. 고린도 교인들이 믿음에 있는가 점검하기 위해서이다. (고후13:5)
2. 악을 행하지 않도록 구하기 위해서이다. (고후13:7)
3. 말씀의 진리를 따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고후13:8)
4. 고린도 교인들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이다. (고후13:9)
5. 주님께 매 맞지 않고 세우려 하심이라. (고후13:10)

그러므로 바울은 교인들의 신앙 생활을 고치는데 목적을 두고 고린도 교회로 가고자 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고린도전서 16장, 고린도후서 13장 그리고 그 중간에 음행을 경고하는 지침으로의 편지 세 번을 보내었으니 얼마나 뜨거운 관심인가? 결국 바울은 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올바른 목자로서의 열정 때문에 세 번째 방문을 예고하는 것이다.

고후11:23을 보면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고후11:26을 보면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위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고" 위험을 당한 일이 연속 연속으로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뱃길의 위험을 개의치 않는 열정의 사람이 분명하다. 복음을 위한 수고에는 그 무엇도 장애로 생각지 않는 바울이다.

고전4:16 바울은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권면한다. 이 시간 구원 얻은 우리 성도들은 무엇을 본받아야 할까? 그것은 바로 열정이다. 열정이란 영어 단어의 의미는 하나님 안에 있다는 뜻이다. 패티김, 조영남 이 가수들을 우리는 열정의 가수라고 부른다. 그러나 시드는 인생을 위해, 시드는 사랑과 세상 꿈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저희들이 아무리 열정의 가수가 되어 노래를 부른다 할지라도 그 세상 열정이 거룩한 삶을 빚어 내지 못한다. 우리 교인들은 썩어져 가는 육체를 위해 열정을 쏟는 자가 아니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위해 영원한 예루살렘인 하늘의 도성을 위해 열정을 품자. 육체는 소멸되고 영혼은 소멸되지 않는 참된 생명을 위해 혼신을 쏟아 붓는 열정의 일꾼이 되자. 복음을 외치면 움츠리고 숨어버리는 인생은 열정의 인생이 아니다. 복음, 예수, 구원을 외치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밥 먹다가도 화답하는 복음의 사람이 되자.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안에 있는 자요, 참 열정의 일꾼이다.

둘째, 바울은 교회의 오해를 풀고 사랑의 목자임을 알리고자 한다.

고후12:14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하는 것은 폐를 끼치고자 함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재물의 이를 구함도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는 이유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거짓된 루머를 퍼뜨렸다. 고후11:4 이하를 보면 다른 복음을 전하여 바울이 전한 복음의 영광을 가리우려는 사람도 있었다.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고 바울에게서 배운 것조차도 부정하려 드는 불충한 사람들도 있었다. 또 그 중의 어떤 이들은 바울의 방문 목적을 왜곡시켰다. 고후12:16을 보라. 어떤 자들이 바울을 일컬어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고후12:17 부터는 오해를 풀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고후12:18 디도도 이를 취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바울이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 전령으로 보낸 사람까지 모두 동일한 성령으로, 동일한 보조로 행하지 않더냐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 방문의 목적이 거짓된 소문과 무관하며 오직 너희를 구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후12:14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바울은 자식을 만나고 자식을 돌보는 부모의 마음, 자식을 사랑하는 아비의 마음이 있기에 고린도 교회, 교인을 방문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바울은 실로 사랑의 목자이다. 고전4:1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은 이미 아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자식을 낳은 영적 출산모였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성도들을 만나고 싶지 않겠는가? 어찌 그 성도들이 바르게 자라고 주님 기뻐하는 교회 구성원이 될 것을 구하지 않겠는가? 낳고 기른 자로서의 사랑이 고린도 교회를 세 번째 방문하게 하는 것이다.

목사에게 중요한 것은 성도들 그 자체이다. 성도를 기쁨으로 여기는 것이다. 기도를 해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지 여러분이 가져다주는 재물이나 선물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성도들도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람을 기르기 위해 살아가는 일꾼이 되어야 하겠다. 아이를 기르는 어미의 사랑, 그 넉넉하고 풍성한 사랑의 일꾼이 되기를 기도하자.

케냐에 계시는 안찬호 선교사가 한국에 왔을 때 오목천 마심바 교회가 부흥되고 있다고 얘기하고 교회 대항 성가 대회에서 1등을 했다고 한다. 나를 보고 오목천이 건축 헌금을 보내 지은 교회이니 봉헌식에 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였는데 그냥 알아서 하라고 전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길이 멀고 불편하고 마심바 교인들도 잘 모르니 결국 내게 열정과 사랑이 부족한 것을 생각해 본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 중요하다. 흑인이든, 맛사이 부족이든 사람의 영혼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사랑이다. 젖먹이는 사랑, 기저귀를 갈아주는 사랑, 걷게 하고 좋은 습관을 가지게 하는 사랑, 사랑이 있어야 영혼이 살아나고 건강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9월 25일 새 생명 축제를 지켰다. 새 가족에게 양보하고 내가 먼저를 포기하고 새 가족을 앞세우는 교회 생활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을 구하는 참사랑이다.

셋째, 영혼을 기뻐하여 희생으로 섬기는 삶을 선언한다.

고후12: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바울의 열정과 영혼에 대한 사랑은 일방적 수고가 아니다. 하다가 힘이 빠지는 기진맥진하는 일도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한 사람 한 사람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한다.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는 것이, 사랑하고 양육하는 것이 바울에겐 기쁨의 일이다. 그러므로 기쁨 충만한 바울은 영혼을 위해 영혼의 구원받는 때를 위해 영혼의 은혜 받는 때를 위해 재물을 허비한다. 재물을 허비하는 것,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영혼을 위하여 자기 자신까지도 섬기는 삶에 허비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위대하다. 한 사람을 위해 자기가 소모품으로 재가 되어도 좋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삶을 기쁨으로 본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의 삶 자체의 본보기가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바울을 사랑하셨기에 바울을 구원했기에 예수님이 영혼을 구원하시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셨기에 바울의 삶은 주님이 빚어주신 목자의 삶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바울을 꼭 닮아야 한다.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의 자세이다.

금번 새 생명 축제에 우리는 많은 땀과 물질을 허비하였다. 그러나 작은 예산을 드려서 교회 방문자 카드에 이름이 적힌 사람이 350명이 되었다. 교회 3부 예배에는 새로 지은 예배당이 약간의 빈자리가 있었고 가득히 채워지는 집회가 이루어졌다.

우리는 다시 한번 바울의 자세를 본받아 영혼의 사역을 위해 모든 것, 나 자신의 삶 전체를 섬김에 드리는 희생 정신을 가져야 하겠다. 우리에게 희생 없이 이기적으로 다른 길로 가고자 한다면 사이비이다. 유사품이다. 재물도 허비하고 자기 자신도 허비하면서 영혼을 위해서라면 크게 기뻐하는 삶, 오직 이런 삶이야말로 은혜 충만한 전도자의 삶의 모습이다. 영혼을 위해 일하는 사도 바울의 삶의 비밀이요 일꾼된 크리스챤의 삶의 비밀이다.

능력은 여기서 온다. 구원의 기적은 여기서 온다. 허비하고 허비하여 영혼을 위해 육체가 다 닳아 쇠하여져도 그것이 기쁨이 되는 삶, 그것이 자랑이 되는 삶,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 번째 방문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 번 시도하고 그만 두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열정을 가지고 시도하고 변화와 구원이 주어질 때까지 사랑하자. 너무 빨리 포기하고 너무 빨리 판단하고 너무 빨리 틀린 사람이라고 단정짓지 말자. 삶의 전체를 소모한다 하더라도 허비하듯 섬기자. 교회의 영혼을 위하여 바울은 세 번째 방문을 준비한다. 우리도 목자의 마음, 선교사의 마음, 참된 사역자의 마음을 품자. 열정을 품고 사랑을 품고 희생적인 섬김을 품고 시작하자. 사랑을 전해 줄 사람을 찾아가자. 돌보자. 양육하자. 10번, 20번, 30번씩이라도 시도하자. (김 철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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