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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 나는 행복한 사람 (신 33: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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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처럼 덮쳐온 IMF/ 생활의 짐 버거워/ 아내는 어디론가 떠나고/ 덩그머니 남은 딸 하나/ 장모손 딸려 생이별 뒤/ 공공근로에 목숨 부지해/ 날마다 그리는 나의 소원은/ 딸 뽀뽀하고 출근하는 것』이 글씨가 한겨례신문 기획란에 뚜렷하게 쓰여 있어서 저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회사는 문을 닫고 임금과 퇴직금은 제대로 받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공장을 떠났지만 아내는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버티다 버티다 버티지 못한 채 어린 딸을 남기고 집을 나간 32살 청년이 딸을 뽀뽀하고 출근하는 것이 소원이라는 희망의 글이었습니다.

행복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먼 나라의 소설에서나 나오는 타인 같은 느낌이 들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남편의 10억 보험을 타기 위해서 청부살인을 하는 아내가 있는가 하면, 아빠가 실직을 해서 더 이상 고등학교를 보낼 수 없다는 말에 “아빠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고 싶어요” 라는 유서를 남기고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하는 딸의 주검이 있는가 하면, 젖소 새끼 한 마리에 5만원에서 심지어 3만원 한다는 소리에 여의도 광장에 젖소를 버리는 축산농가의 분노...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행복이 산산이 깨어지는 소리였습니다. 

직장은 잃어버리고 아내는 집을 나가버리고 어린 딸은 장모의 손에 딸려 생이별을 해야만 하는 32살 청년은 서투른 글씨로 낡은 수첩에 자신의 희망을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지금 작은 들꽃/ 온갖 비바람을 맞고 서 있다./ 작은 가림막이라도 있었으면/ 저들은 온갖 재주를 피우며 꺽으려 하지만/ 나는 기필코 꽃을 피워 향기를 내리라.』
오늘 우리 가운데는 작은 들꽃처럼 세상의 온갖 비바람을 맞고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작은 가림막이라도 있다면 그곳으로 피하고 싶은 심정으로 교회를 찾고 하나님을 찾은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지금은 모든 것을 잃는다는 느낌이 들지만 내가 잃는 것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과 가정과 직장과 일터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회복시킬 것을 믿기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너의 처소가 되시니
“너는 행복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이 가는 성도도 없지 않아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이 행복한 사람들인가를 27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렇습니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영원하신 하나님을 처소로 삼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IMF 전까지 많은 사람들은 재물이 자신의 안전한 처소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내 직장에서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내 가정만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IMF라고 하는 거대한 공룡 앞에서 경제가 짓밟히고 가정도 깨어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구조조정이라는 사정의 칼날 앞에서 언제 실직과 명퇴와 퇴출을 당할지 모르는 압박과 두려움을 받고 있습니다.

처참한 오늘의 이 시대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이 세상의 것이 아무리 소중하고, 아무리 귀하고, 아무리 의지할 만한 것일지라도 그러한 것들은 영원할 수 없으며 이러한 것들은 우리들의 인생을 행복하게 보장할 수 있는 안전한 처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시편의 시인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16:1),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라”(시91:9-10)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들의 안전한 처소이며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피난처입니다.
『태평양을 항해하는 배 위에서 한 사람이 새장 속의 새를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저 넓은 바다와 하늘을 동경하던 새는 새장을 벗어난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아! 이제는 자유다. 이제는 내 마음대로 하늘을 날 수 있다. 이제는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대로 갈 수 있다” 새는 마음껏 하늘을 날았습니다. 그러나 마음대로 나는 것도 잠시.. 쉴만한 안식처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이라고는 망망한 바다와 금새라도 삼킬 것처럼 덤비는 파도뿐이었습니다. 얼마 후 새는 피곤한 날개를 허우적거리며 전에 갇혔던 새장으로 다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 새에게 가장 안전한 처소는 새장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장 안전한 처소는 어디입니까?
갓난아기의 안전한 처소는 엄마의 품입니다. 병아리의 안전한 처소는 어미의 날개 밑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아기와 같은 우리의 안전한 처소는 하나님의 품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시겠습니까? 그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안전한 처소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영원하신 팔이
27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다. 왜 우리들이 행복한 사람들인가를 다시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팔은 힘과 능력을 나타냅니다. 팔은 안전한 피난처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팔과 우리의 팔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팔은 아내를 지키고, 자녀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의 한계가 있습니다. 내 팔은 일터와 사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이 팔로 노동을 하고, 가정을 지키고, 사랑하는 아내를 안아 주고, 자식들을 안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 팔은 어떻습니까? 이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지 않습니까? 이 현실 앞에서 대처할 능력이 없지 않습니까? 사랑하던 자식이 실직을 했는데 아버지는 가슴만 태울 뿐 그 팔은 도울 힘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직장을 잃었는데 아내는 눈물만 흘릴 뿐 그 팔은 힘이 되어주지 못합니다. 능력과 힘의 한계를 드러내는 자신을 믿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팔 아래에 머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팔은 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팔은 그 힘과 능력이 다하는 법이 없습니다.

시편의 시인은 고백합니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의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운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시91:5-7) 할렐루야!!!

『한 아이의 아빠가 어린 아들과 함께 시내를 걷고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은 아빠에게서 떨어질까 보아 겁이 나서 아빠의 새끼손가락을 꼭 잡고 따라갑니다. 한참을 따라가던 아이는 점점 힘이 들어서 잡고 있던 아빠의 새끼손가락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아빠의 얼굴을 보면서 말합니다.
“아빠, 이제는 아빠가 내 손을 잡아주세요. 저는 더 오래 아빠의 손을 못 잡겠어요.”』
힘이 드십니까? 주님의 손을 잡으십시오.
두렵습니까? 하나님의 팔에 안기십시오.

1.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2.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손은 무엇을 잡고 있습니까? 
주님의 손을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을 때 가장 안전합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우리이지만 그래도 행복한 것은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언제든지 날 붙잡고 안전하게 걸어가시는 주님의 팔이 있기 때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안전히 거하며
그러면 하나님을 자신의 처소로 삼는 백성,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 아래에 머무는 성도는 어떤은혜를 받고 살아갑니까?

2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먼저 안전히 거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오늘의 이 시대를 맞이하기 전에 여러분들은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은행이라고 믿었는데 은행이 퇴출을 당해 문을 닫았습니다. 직장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명퇴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합니다. 경제가 무너집니다. 가정이 무너집니다. 삶의 터전이 무너집니다. 믿었던 것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여러분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2)
『아브라함 링컨이 어려운 문제로 인하여 깊은 고민과 염려에 잠긴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대표자로 보내진 사람이 링컨에게 격려의 말을 합니다.
“링컨씨, 우리는 주님이 우리 편에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예, 나의 진실된 관심사는 주님이 어느 편에 계시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과연 주님의 편에 서 있는가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은 그 삶이 안전합니다. 하나님을 처소로 삼으면 그 가정은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팔에 의지하는 성도는 그 삶이 행복합니다.
다음에는 풍요로운 축복을 보장받습니다.
28절의 말씀을 다시 봅니다.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똑같은 식물도 건강하게 잘 자라나는 식물이 있는가하면 햇볕이 조금만 비춰도 시들시들 말라비틀어져 죽고 마는 식물이 있습니다. 같은 나무여도 늘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싱싱하게 잘 자라나는 나무가 있는데 어떤 나무는 싹도 피워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슨 까닭에 그렇습니까? 그 나무 밑으로 샘물이 흐르면 항상 싱싱합니다. 그 식물주위에 물탱크가 있어서 매일매일 물을 공급하면 마르지 않습니다.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하늘의 이슬이 내리는 곳에 샘이 있고 거기서 농사를 짓고 거기서 포도나무를 심는데 어찌 샘물이 마를 수 있으며, 어찌 수확이 줄 수 있으며, 어찌 나무에 열매가 맺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을 머금고 사는 성도는 사람들보기에 메마르게 보이지만 이른 아침이 되면 언제나 싱싱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3) 할렐루야!!!
이슬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이슬을 가리켜 하늘의 보물이라고 했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매일매일 내리는 성도는 불황에서도 호황을 누릴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성도는 어떠한 구조조정이 있다고 할지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이슬로 적시는 성도는 그 인생이 도산을 당하지 않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가정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29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옆 사람을 보면서 같이 고백합시다.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아멘...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돕는 방패입니다. 우리들의 영광의 칼이십니다. 하나님께서때로는 방패로 우리의 삶을 보호하시고 때로는 영광의 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적을 무찌르십니다. 그런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힘과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뭐라고 해도, 인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소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팔이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이슬을 머금고 새 힘을 얻어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홍 진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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