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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인생의 1 번 (마 8: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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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 면접을 봅니다. 면접관은 사람의 됨됨이를 보기위해 저것을 묻습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신세대들이 면접 이전에 서류 심사에서 떨어집니다. 이유는 자기소개서 때문입니다. 자기소개서에 외래어와 컴퓨터에서 쓰는 채팅용어를 남발하여 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뽑아주세염’, ‘ㅋㅋㅋㅋ’. ‘했슴돠’, ‘임니당’ 같이 친구끼리 쓰는 표현입니다. 또 비표준어나 맞춤법이 틀린 글들도 많다고 합니다. 이런 서류들은 인사담당자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줍니다.

사람을 뽑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몇 가지 정보로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임자를 뽑으려면 마땅한 사람을 찾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땅한 사람을 직접 고르셨습니다. 그런데 제자가 되고 싶어 주님을 찾아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그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시면서 인기를 얻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쌌습니다. 몰려든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께서 각종 병을 고쳐주심을 바라고 온 것입니다. 또 귀신을 쫓으시는 것을 보고 왔습니다.

무질서하게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면 일을 하지 못합니다. 인기 연예인들이 공연장을 빠져나오려면 보디가드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옷자락을 붙들고 심지어 머리털까지 뽑아 갑니다.

지난 월요일에 상주 축제 공연장에서 압사 사고가 있었습니다. 선착순 입장으로 자리를 차지하려고 몰려든 사람들이 넘어지면서 대형 사고나 났습니다. 줄서는 문화가 아쉬웠던 순간입니다. 무질서는 아주 위험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려고 하셨습니다. 18 절입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이 건너가란 말씀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12 명입니다. 이 12 명의 명단은 마태복음 10 장에 나옵니다. 본문은 제자의 명단을 발표하기 전입니다. 마태복음 4 장에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9 장에서 마태가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사건은 아직 제자 12 명이 확정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제자를 모집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마음속으로 적합한 제자를 고르고 계신 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주님의 의중을 파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입니다. 본문에는 두 명의 제자 후보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자원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이미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먼저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좇아 제자가 되길 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그의 직업은 서기관입니다. 서기관은 모세의 율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서기관 정도 되려면 구약 성경을 줄줄 외울 정도는 됩니다. 서기관이 주로 하는 일은 성경을 옮겨 적는 일입니다. 당시에는 인쇄술이 나오기 전입니다. 그래서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적어서 옮겨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맞게 적었는지 틀리게 적었는지 맞춰봅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이 모두 몇 글자인지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맞게 적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옮겨 적은 사본의 글자를 세는 것입니다. 서기관을 히브리어로 ‘소프림(Sophrim)이라고 합니다. ‘숫자를 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기관은 5 살부터 13살까지 율법 교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30세가 되면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기도 했지만, 송사를 해결하고 재판하는 일도 했습니다. 법을 다루는 판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기관을 랍비(선생) 혹은 율법사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리고 인정을 받으면 공의회의 의원도 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나 서기관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 전체에 서기관이 6,000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은 그가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나섰다는 인상을 줍니다. 예수님은 그가 제자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회적으로 그의 청을 거절하고 계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나를 따르는 길은 고된 길이다. 여우도 저녁이면 굴을 찾아 들고, 새도 자기 거처가 있다. 하지만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 즉 베개를 베고 편한 잠을 자지도 못한다. 그런데 넌 그것을 알고 나를 따른다는 것이냐? 하고 되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뒤에서 심부름만 해도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직업상 구약 성경을 다뤘는데, 예수님은 성경에 능통한 분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다가 구약을 꿰뚫고 계신 그 해박한 지식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가 제자로 자원한 것은 단지 성경을 더 깊이 깨우치겠다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이 서기관이 제자 되겠다는 불순한 동기를 알아채셨을까요? 그의 말 한마디만 듣고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한 말은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입니다.

‘선생님이여’ 한 말은 아람어로 ‘랍오니’입니다. 헬라어로는 ‘디다스카레’입니다. 서기관이 성경을 가르칠 때는 이 ‘랍오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이 호칭은 바로 자기가 평소에 듣는 호칭입니다. 이 서기관은 예수님을 회당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훌륭한 랍비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기 전공 분야에서 뛰어난 지존을 만난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은 제자의 도리와는 별개의 동기가 숨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풀어 해석하는 랍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메시아, 즉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이 사람의 호칭을 교정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대답 속에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인자 호칭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호칭입니다. 이 대답 속에는 나는 랍비가 아니라 인자라는 바른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면 예수님에 대한 바른 고백이 먼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세계 3 대 성인 가운데 한 분이라고 알고 계십니까?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칩니다. 석가, 마호멧과 함께 예수님을 3 대 성인이라고 가르칩니다. 세상 사람들은 배운 대로 예수님을 그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주님은 저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저는 은혜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바로 창조주 주님이신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모든 판단과 결정권이 내게 있지 않고 주님께 돌려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헌신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주님은 저를 제자로 받아주셨습니다. 그 후 주님은 저에게 제자의 도리를 훈련시키셨습니다. 말씀과 영성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어 복음을 전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결코 주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어디로 가시든지 좇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결코 지키지 못할 약속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 고난이 함께 따른다는 것을 계산에 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을 따르는 여정이 정처 없는 나그네 길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순교까지 각오해야 함을 몰랐습니다. 그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예수님의 인기만 봤습니다.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은 목사가 되기 위해 거치는 곳입니다. 목사 지망생이 너무 많아서 경쟁이 말도 못하게 치열합니다. 한국 교회 목사님이 되면 미래가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목사가 안정된 직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착각입니다.

저는 신학교에 멋도 모르고 들어갔습니다. 그저 성경을 원어로 배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지원했습니다. 돌이켜보니 오늘 본문의 서기관과 똑같은 동기를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대학 시절은 군부 독재로 연일 데모의 연속이었습니다. 시대의 아픔 속에서 저의 경건은 참 제자로의 부름이었습니다. 그 때는 강단에서 예언서만 봉독해도 붙들려가는 살벌한 시기였습니다. 저는 감옥살이를 각오하는 심정으로 목회의 길을 결단해야 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고 목회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직업과 전공 분야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제자입니다. 꼭 선교사가 되어 해외에 나가는 것이 부름에 응답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녀에게 신앙교육을 잘해서 좋은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도 선교입니다. 직장동료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선교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제자가 된다고 현재의 직업을 버리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다니기에 불리한 여건이라고 그 직업을 포기하는 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믿음 생활이 어려운 환경을 바꾸어 가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가야할 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본문에 두 번째 제자가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이미 제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부친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부친상을 당했으니 당연히 허락을 받아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 허락을 구했습니다. 21 절입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그러면 주님은 당연히 “안됐구나. 어서 가서 장례를 잘 치르거라.” 하셔야 합니다. 또 조의금을 주시면서 위로해 주셔야 합니다. 이것은 상식이고 기본 도리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우선하는 인간의 도리는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도입니다. 효도 가운데 가장 으뜸 도리는 부모의 장례입니다. 전쟁을 하다가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부친의 장례는 만 가지 일을 제치고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제자에게 아주 충격적인 대답을 하십니다. 한 마디로 딱 잘라서 거절입니다. 22 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이 세상의 가장 큰 절대 가치와 주님을 따르는 일과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부친 장례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은 미국이나 아프리카 토인들이나 어디나 다 똑같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부친의 장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 부친의 장례는 세계적으로 통일된 문화적 가치입니다. 부친의 마지막 가는 길에 자식이 반드시 해야 할 도리입니다.

더구나 예수님도 부친상을 당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맏아들로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제자가 겪는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런데 어찌 거절하실 수가 있습니까?

정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의 가장 큰 일보다 더 중요하고 크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제자의 도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세상은 다릅니다. 죽은 자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입니다. 다시 이쪽으로 건너 올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장례라는 것이 인간의 도리임에는 틀림없지만, 부모 돌아가신 후 장례 효도야 말로 덧없는 일입니다. 산자의 자리에서 보면 죽은 자의 일보다 산자의 일이 훨씬 중요합니다.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죽은 자가 죽은 자의 장례를 맡아 합니까? 이 명령은 불가능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억지를 부리시는 겁니다. 그만큼 주님을 따르는 일이 부친 장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법입니다.

이것은 우선순위에 대한 말씀입니다. 만약 기독교가 부친의 장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버리면 심각해집니다. 우선 목사인 저부터 심각한 회의에 빠질지 모릅니다. 인륜을 저버린 종교라면 그것은 사이비 이단이 분명합니다. 본문은 부친의 장례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제자의 도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많은 희생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영화를 잃어버려야 합니다. 가족도 재물도 버릴 각오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에 이 제자의 도리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6-27>

여러분! 신앙은 하나님을 언제나 1 번에 놓는 것입니다. 부친의 장례라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2 번입니다. 자식도 2 번입니다. 가족도 2 번입니다. 재물도 2 번입니다. 심지어 내 목숨도 2 번입니다. 하나님을 1 번으로 놓을 줄 알아야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자! 하나님을 1 번으로 놓았습니다. 그래서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 목숨을 잃어 버릴 위기에 처해졌다고 합시다. 그것으로 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일 번의 영광을 받으시면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8:29-30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금세에 여러 배로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믿으십시오.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금세에 여러 배로 갚아 주십니다. 그리고 내세에 영생의 선물을 주십니다. 영육 간에 복을 보장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결코 인륜을 저버리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너무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사랑하는 아들 독자를 모리아 산에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대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갔습니다. 이삭을 묶고 칼을 들어 목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다급하게 그 칼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테스트. 아브라함이 1 번에 하나님을 두고 사는지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아들을 제물로 받지 않습니다. 그런 제물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아브라함의 우선순위를 테스트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1 번에 두는 훈련이 되어야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에 하나님을 1 번으로 두기 어려운 상황이 너무 많습니다. 모두 우리들의 시험거리들입니다. 이 테스트에 잘 통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일에 1 번을 두다가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해와 미움을 살 수도 있습니다. 생각하지도 못한 손해와 고난을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1 번은 변함없이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자 어려운 문제입니다. 제가 잘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교회의 일은 약간 다릅니다. 교회 봉사라고 해서 언제나 1 번 하나님의 일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분간하시기 바랍니다. 그 시간에 내가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면 교회의 일도 1 번입니다. 그러나 조정할 수 있으면 2 번, 3 번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영역은 크게 교회, 가정, 직장, 지역사회입니다. 이 중에서 1 번은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교회일이 가정보다 중요하지 않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 일이 직장보다 중요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교회 일을 조정할 수 있으면 서로 의논해서 피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일예배는 교회 일이 아닙니다. 주일예배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주일예배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본 교회 예배를 지키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주일에 사정이 생겨서 다른 지역에 있게 되어도 근처의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수주일은 1 번,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 생활도 1 번입니다. 1 번을 지키는 신앙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2 번에 두면서 복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선교도 1 번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 가운데에서도 최우선 순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 자리를 제일 많이 빼앗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는 너무 관대해서 하나님보다 더 나를 사랑하게 됩니다. 조금만 게으르고 방심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나 다음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부터 신앙생활의 불행이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아이러니합니다. 그만큼 역설적입니다. 그러나 참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따르는 길은 험합니다.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선택하는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자가 되었으면 언제나 하나님을 1 번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2 번입니다.
(황 금 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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