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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 (사 5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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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재집사님이 악성 피부병으로 인해 오랫동안 고생을 하고 있다.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 만났고, 좋다는 약도 다 써 보았고 중국까지도 가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아주 용하다는 한의사를 소개 받아서 요즈음엔 약간의 효과를 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신의 질병을 고칠 의사가 있다는 소리 그 자체가 이집사님에게 복된 소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은 그 복을 누리고 있다는 뜻이다.

질병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즐거움을 빼앗아 가버린다. 그래서 건강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다. 누군가 말하기를 돈을 잃은 것은 인생의 한 부분을 잃은 것이지만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다고 했다. 건강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건강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혼보다는 육신을, 내세보다는 현세에 마음을 두고 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사람들은 땅만 바라보지 하늘은 바라보지 않는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구원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그래서 돈에 매여 땅만 바라보는 인생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
딤전6:7-10,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도 중요하지만 돈 보다는 건강이 더 중요하고, 건강보다는 영혼이 더 중요하다. 세상의 소리에만 귀 기울이지 말고 오늘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선포되고 있는 복된 소리 복음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을 때마다 큰 은혜와 충격을 받는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 절마다 반복되는 한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그가”라는 3인칭 단수 남성대명사이다. 무려 20회 이상 언급되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주일학교 어린이라도 어렵지 않게 그 주인공을 찾아 낼 수 있다. 이사야서 53장 속에는 예수님의 모습과 그가 받으신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경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읽는 것처럼 예수님의 생애가 요약적으로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기 전 700년 전에 이미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700년 후에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너무나 정확하게 그려진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치밀하신 계획과 사랑의 열정을 느낄 수가 있다.

어느날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인생의 무상을 깨닫고 도를 닦다가 자신이 메시야라고 선포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 예수를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하시고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명확하게 드러내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지자 이사야가 전하는 구원자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


1.배척당한 종의 모습
53:2-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구세주인 그리스도는 다윗왕보다도 더 강한 힘과 능력을 가진 수퍼맨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치 않고 박대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를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난 빌립이 메시야를 만난 사실을 친구 나다나엘에게 전했다. 그러나 믿지 않았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부정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고향을 방문하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을 때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했다.
마13:55-57,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2)그에게 끌린 만한 특별한 아름다움이나 매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초상화는 잘 생긴 서양 미남형의 모습이지만 이사야선지자가 전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특별한 매력이 있는 분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외모에 잘 끌린다. 잘 생기고 풍채가 좋으면 그 속에 무엇인가가 있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모가 인격까지 뒷받침해 주지는 못한다. 선지자 사무엘도 실수한 적이 있었다.
삼상16:6-7,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3)고통과 세상의 질고를 지게 되기 때문에 배척하였다.
예수님께서 질병을 앓으셨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질고와 가난과 억압당하는 것을 몸으로 느끼셨다. 마치 아이가 아파서 괴로워 하면 부모가 고통스러워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세상의 고통과 질고를 짊어지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마치 나병환자를 보는 것처럼 멸시하고 멀리했던 것이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사람들은 칼을 들고 백마를 탄 왕자와 같은 예수를 기대하였지, 그렇게 볼품 없고 초라하고 병든 것 같이 약한 예수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주목하지 않았고 귀하게 여기지도 아니한 것이다.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우아하고 귀족스럽지 않았다.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셨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다.


2.그가 오신 목적 - 죄를 짊어지는 종(4-6절)
그는 왜 오셨는가? 다음 4-6절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 3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1)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였다.
여기서 “우리”라는 1인칭 복수 대명사는 일차적으로는 선지자 이사야를 포함한 유대인들을 가르키는 것이고, 좀 더 범위를 확대한다면 모든 인류를 가리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멸시 천대 고난당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천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들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눈에 들어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눈에 들어 있는 작은 티는 잘 보는 경향이 있다.

2)실제적인 원인(5절)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선지자가 전하고 있는 5절의 말씀은 십자가 상에서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가 십자가의 극형을 당한 것을 자기의 죄라 했고, 그 죄를 하나님이 심판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그가 찔리심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은 바로 그 유대인들의 죄와 허물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면서 이렇게 증거했다.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유대인들의 죄 뿐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다. 예수님의 희생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죄, 그리고 좁게는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바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5절의 말씀을 다시 고쳐 읽어야 한다.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도다.”

3)우리의 모습(6절)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목자 잃은 양의 모습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생은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죽음의 광야에서 헤메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은 결국 자기의 죄로 인해 죽게 될 것이고 그 죄의 값을 치루게 될 것이다.
롬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무리의 죄악을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나의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예)아프리카선교사의 이야기 - 피라니아라는 물고기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예수께서 대신 달리시고, 내가 찔려야 할 창에 예수께서 대신 찔리신 것이다. 내가 치러야 할 죄 값을 예수께서 대신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3.고난받는 종의 태도(7-9절)
53:7-9,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그가 받은 대우는 전적으로 부당한 것이었으나 그는 저항없이 받아 들였다. 자신의 억울함을 변호하지 않았다.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도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도 자신의 누명에 대하여 변명하려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 종에게 이와 같은 고난을 허락하셨는가?
1)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 영혼구원
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2)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기 위해.
53: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3)궁극적 승리를 얻기 위해서
빌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그리고 죄악된 인간들을 향한 그의 사랑, 그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나신 바 되었다. 그 분이 바로 선지자 이사야에 의해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시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이미 오셔서 그들 가운데 계셨고 그들과 함께 살았던 예수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 영접지 아니했다.

요1:9-12,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오늘날 구원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는 우리의 비통과 슬픔과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인해 당하신 고통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예수께 데려와 그들의 마음의 짐을 다 토로할 수 있도록 도와는 것이다. 내가 그들의 죄를 담당할 수 없다면 하나님 없이 멸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알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 복된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한다. 누구에게 전할 것인가?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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