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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교] 탁류에서도 살아있는 물고기는 썩지 않습니다. (행 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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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 복음을 전하다 처음으로 순교하신 분은 토마스 목사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에는 1832년 귀츨라프 목사님이 고대도와 서해안을 다녀갔습니다. 그 후 선교사가 오지 않다가 33년이 지나서 영국인 토마스목사가 1865년에 첫 방문을 하였습니다. 토마스선교사님은 아버님이 목사님이었습니다. 런던대학의 뉴칼리지를 졸업하고 23살 때 아내와 함께 선교사로 중국 상해에 왔지만 아내 캐롤라인이 병으로 먼저 천국에 갔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한 때 낙심하여 선교회를 떠나 청나라 세관에서 통역 연수관으로 근무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한국인 두 명을 만나 한국말을 배우며 한국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865년 9월 5일에 중국을 떠나 10월 9일에 황해도 자라도에 도착하여 전도지, 성경 16권과 달력을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일이 있은 후 2달 반 동안 백령도를 비롯한 섬에서 전도를 하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대원군에게 전도를 시도하려다 2번이나 폭풍을 만나서 중국으로 되돌아 가게되었답니다. 그러나 토마스 목사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을 올라가다 평양감사 박규수에 의해 배는 불에 타버렸고 토마스 선교사는 잡히기까지 성경을 주민에게 나누어주다가 포박되어 26세 젊은 나이로 모래사장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지 2년 6개월만에 자신도 한국 땅의 최초의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 아들이 이런 길을 간다면 보내겠습니까? 작년에도 카자크스탄에서 우리나라 선교사님 한 분이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런 순교지에 자녀를 보내겠습니까? 왜 토마스 선교사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미개한 나라에 와서 그 젊은 나이에 순교를 했을까요? 미개한 나라에 오면 고난이 있고 순교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안락한 삶을 다 마다하고 그 고생을 감당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을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사명 때문입니다. 사명을 붙들고 가는 사람들은 자신 앞에 어려움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이 주님이 가는 길이고 그 길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오해받고 때로는 음모가 기다리고 있고 때로는 부모가 싫어하고 동료들이 반대하지만 그 길이 사명의 길이기 때문에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되고 고난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순교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적극 만류를 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지만 행 21:11을 다시 보십시오. 선지자 아가보가 예언을 합니다.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행 21:11)"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강권합니다. 그 때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 21:13)" 바울은 결국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이미 바울은 자신 앞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20장 23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행 20:23)" 이 때도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미 예측한대로 바울은 예루살렘에 와서 결박되었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밤에 나타나시어 담대하라 로마에도 갈 것이라"고 말씀해 주셔서 많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아침이 되었는데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40여명이 금식을 하면서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다행이 마음씨 좋은 천부장에 의해 목숨은 건졌지만 다시 아주 악한 벨릭스 총독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집요하게 하이에나처럼 바울을 죽이기 위해 덤벼들었습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좋은 것 같지만 탁류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있으면 떠내려 갈 수 있지만 살아 있기 때문에 그 탁류 같은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물이 오염된다 할지라도 탁류에서도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물고기는 썩지 않습니다. 우리는 썩지 말아야 합니다. 물은 흐르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맑은 물도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옆 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탁류에서도 살아있는 동안 물고기는 썩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탁류 속에서도 살아있어야 하겠습니까?

1. 세상이 탁류처럼 더럽다해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주어진 것으로 주님을 대적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쓰임 받아야 하겠습니다.(1-9) 탁류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지만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세상과 등지고 수도원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학교 다니고 정부 조직에서 일을 하게 되고 정치인이 되기도 하고 법률가가 되기도 하고 회사 직원이 되어 치열한 생존 경쟁의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조직에서 때로는 회장도 되고, 과장도 되고, 변호사도 되고, 선생님도 되고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패한 조직은 신앙인이 바르게 사는데 무척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학생들을 향하여 그것을 진압하러 간 장교가 신앙인 일지라도 상부에서 총을 쏘라고 하면 자신의 직분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회사의 경리가 되었는데 이중 장부가 법에 저촉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회장의 지시에 따라 탈세를 목적으로 이중장부를 쓰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그런 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종교 권력의 중심지였습니다. 역사와 전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는 막강한 정치 권력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 정복과 조직을 통해 정치권력을 유지했습니다.

1)대제사장과 장로, 변사 더둘로와 백성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통해 바울을 죽이는데 사용합니다. 탁류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종교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 권력을 가지고 무엇을 합니까? 1절 보십시오. 바울을 고소합니다.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임무가 무엇입니까? 화해와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입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집례하며, 인간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화해를 도모하는 중보직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본분을 망각하고 동족의 한 사람을 총독에게 고소하여 죽이기 위해 온 것입니다. 사실 그들도 바울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23:9). 그러나 정치인들이 늘 그렇듯 상대를 죽여야 자신이 사는 것입니다. 바리새파인 그리고 자신들이 죽인 예수를 증거하는 자를 죽여야 자신들의 자존심이 서고 종교 권력을 유지하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잘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교의 순수성을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죽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장로들과 변사 더둘로를 동원합니다.
변사는 더둘로는 훈련받고 경험이 많은 전문 법률가입니다. 더둘로는 로마 총독에게 아첨을 합니다. 그가 자기 민족에게 평안과 개선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감사의 대상이 아니라 혐오의 대상입니다. 목적을 위해 권력에 아부하는 것입니다. 권력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도 총독 벨릭스가 평화의 수호자가 아니라 불화의 조성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올려야할 감사 기도 이방인 폭군에게 올리고 있습니다. 많은 학문이며 다재다능한 재능을 가지고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데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배운 지식을 가지고 바울을 죽이기 위해 기소합니다. 기소의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정치적 죄목입니다. 유대인을 소요케 한 자라고 합니다. 유대의 평안을 위협하는 자, 질서를 파괴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로마는 식민지에서 폭동 사건이 철저히 탄압하였기 때문에 바울에게 어떤 죄를 뒤집어 씌워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둘째는 메시아 운동을 하는 나사렛 당의 괴수라는 것입니다. 메시아 운동은 결국 로마 정부의 전복을 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전을 더럽힌 자라는 말입니다. 에베소 사람인 드로비모를 금지된 경내까지 데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사형에 처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유대인 대중들이 동조를 합니다(9). 무지한 백성들이 선동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매스컴의 조작에 부화뇌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할 때도 그랬던 것처럼 권력자들은 백성들의 여론을 힘입어 바울을 처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대부분의 범죄는 어리석은 대중들이 참여함으로 성사되는 것입니다. 더둘로의 말이 거짓인 것은 유대인이면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종교인(1상), 돈에 팔린 직업인(1하-8), 어리석은 대중(9)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2) 세상이 탁류처럼 더럽다해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통해 주님을 위해 쓰임 받아야 하겠습니다. 결코 탁류를 만드는 주인공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권력도 지식도 명예로 부도 무엇을 위해 쓰임 받는 것이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들은 역사 속에서 다 살아졌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수치스런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좋은 권력과 부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되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들도 하나님을 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도 아이들을 보면 처음에는 부모님 말씀 잘 듣습니다. 자라면 자신의 뜻 관철하려 합니다. 자신의 뜻 관철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정 사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직통이 아니라 가장을 통해 가정 전체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장이 되고 이사가 되면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직장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직장의 총 경영자 회장의 계획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불행해 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 보다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탁류를 만드는 주인공이 되어 지고 맙니다. 바울은 그가 가진 지식, 그가 가진 건강, 그가 가진 물질, 그가 가진 신분으로 하나님나라를 위해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님 젊은 나이에 순교를 당하였지만 그가 가진 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으니까 얼마나 많은 결실이 맺혔습니까?

올해는 우리 나라 해방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와 세상이 바뀌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인은 해방당시 30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1955년 60만, 1965년 120만, 1975년 350만, 1985년 800만, 1995년 1000만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동안 우리 기독교는 한국 땅에 많은 사회적 기여를 했습니다. 일제 시대 수난 시대 때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민족 지도자가 되어 신사참배 거부하고, 학교와 병원, 교회를 세워 민족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정신적 근대화와 윤리 가치 고양하고 인권과 민주적 가치 고양하였습니다. 기독교인 가운데 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나왔습니다. 장로였던 이승만, 승동교회 전도사였던 여운영, 김구 등 당시 이름 있는 민족 지도자들이 기독교인이었고 건국 준비위원 지방 위원장들이 대부분이 목사 아니면 장로였습니다. 선교사 1만 3000명을 해외에 파송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선교 대국이 되었습니다. 1955년 4월 최찬영 김광명 선교사 태국에 파송하였습니다. 1961년에는 이화여대 조성자 전재옥 김인자 파키스탄 파송하였습니다. 1988년 1000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선교단체 130개 넘고 선교 대상국 163개국을 넘어섰습니다. 2004년도까지 1만 3000명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이 아무리 탁하다 해도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으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하나님 손에 붙들려 쓰임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가치가 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 목동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쓰임받으면 홍해를 가르는 도구가 되고 다윗의 물매 짐승을 쫓기 위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쓰이면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더둘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 복음은 마치 전염병처럼 맹열한 속도로 퍼지고 지배력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전염병은 사람을 죽이지만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을 장악하고 생활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한 것처럼 보잘것 없는 작은 시골 동내 나사렛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그 발생지역을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불교와 유교는 동양권을 벗어나지 못했고 회교는 중동지역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지역에 묶어 놓았던 기독교는 세계인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로마와 예루살렘의 권력이 합한 막강한 세력도 지배해 버리는 것입니다.

2. 아무리 거세게 탁류가 몰아쳐 절박한 상황에 빠진다 하여도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핵심 가치인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여야 하겠습니다.(10-21) 아무리 세상이 탁류여도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1)바울은 거대한 세력 앞에서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합니다.
얼마나 위협적인 상황입니까? 얼마나 거대한 세력입니까? 바울은 얼마나 초라합니까? 아무도 자신을 변호할 사람이 없습니다. 종교 최고 지도자가 있습니다. 백성들의 여론은 자신을 등졌습니다. 총독은 악한 사람입니다. 더둘로는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당당합니다. 담대합니다. 총독에게 예의를 갖춘 후 담대하게 더둘로의 선동에 논리적으로 대응하였습니다.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첫째 자신은 소요를 일으킨 사람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이는 염병과 같은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11-13)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요를 일으킬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12일 체류하였는데 그 기간은 알리바이가 분명합니다. 쉴라터(Schlatter)의 견해처럼 제1일 : 예루살렘에 도착(21:17), 제2일 : 야고보를 비롯한 장로들과의 회합(21:18), 제3일-제9일 : 7일간의 정결례(21:27) 및 성전에서의 누명(21:28), 제10일 : 공회에서의 증언(22:30), 제11일 : 바울을 살해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23:12), 제12일 : 가이사랴로의 이송(23:32) 된 것입니다. 더욱이 소요를 일으킨 것을 입증할 만한 증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 고소자들이 여기에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서 그들의 고소가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신은 이단의 괴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14-16) 바울은 이단의 괴수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고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자신은 성전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17-21) 단지 성전에 예배드리기 위해 올라 간 것이고 예루살렘을 방문한 목적은 구제금과 하나님께 바칠 제물을 가지고 갔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성전 모독을 했다면 이미 그들이 고소를 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바리새인은 이미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선포하였고(23:9) 사두개인 역시 부활에 대한 죄만 있다고 생각(21)하였습니다. 모두가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데 홀로 얼마나 당당하게 변론합니까?

2)우리는 아무리 거대하고 절박한 상황일지라도 살아있는 동안 핵심 가치인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여야 하겠습니다.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어떻게 총독 앞에서 최고 종교 지도자 앞에서 많은 백성들 앞에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기회였습니다. 아주 극한 상황이었지만 복음을 증거할 좋은 기회였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있지만 그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전하였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믿음에 관하여 전합니다.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율법의 일부만 믿는 것이 아니라 다 믿는다고 말씀합니다. 소마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믿음 소망이 있기 때문에 선한 양심으로 살았다고 담대하게 자신의 신앙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겸손하면서도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신앙적인 삶을 노출합니다. 우리 삶에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인생의 핵심 가치인 복음 증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거대한 세력은 대단한 것 같지만 그리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교회 다닌다고 가정이 가난하다고, 가진 것이 없고 실력이 없다고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조금 안생겼으면 어떻습니까? 50대가 되면 외모가 평준화된다고 합니다. 조금 알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60대가 되면 많이 배운 사람이나 조금 배운 사람이나 비슷비슷 합니다. 다 쉽게 잃어 버리고 외우지 못합니다. 돈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80대가 되면 돈이 있는 사람과 돈이 없는 사람이 별 차이 없습니다. 돈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입맛없는 것 똑같습니다. 90대가 되면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당당하게 삽시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야말로 가장 값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할 정도로 가치 있는 사람들입니다.

3. 우리는 탁류 속에 휩쓸려 갈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주님께서 그 탁류 속에서 기회를 주었을 때 그 기회를 잘 사용하여 탁류를 깨끗이 정화해야 하겠습니다.(24-27)

1)총독 벨릭스는 기회를 상실하였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교활한 사람이었습니다. 노예 출신으로 총독이 된 사람입니다. 로마의 노예였는데 로마의 황제 글라디우스의 어머니의 환심을 사 그의 형이 팔라스와 함께 자유를 얻게 되었답니다. 그 후 황제의 환심을 사서 총독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아내가 세 명이나 되었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모든 권모술수를 다 사용하라는 마키아벨리즘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내 드루실라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2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다 죽였던 헤롯대왕의 아들 아그립바의 막내딸입니다. 그의 아버지 아그립바는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둔 사람입니다. 이 여자는 아름다운 미모가 뛰어났는데 그 미모로 16살에 에메사의 왕 아시스의 아내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야심이 커 남편을 버리고 벨릭스와 결혼한 것입니다. 역사가는‘벨릭스는 두루실라의 얼굴을 샀고 두루실라는 얼굴을 팔아서 벨릭스의 권력과 돈을 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기회를 준 것입니다. 24절 25절을 보십시오. 예수 믿은 도를 전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의와 절제와 심판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루다가 구원받을 기회를 읽어 버렸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잃어 버렸습니다. 구원받을 기회, 회개할 기회를 미루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미루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임무를 미루어 버립니다.

그는 바울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지금 고소를 당한 것은 부활을 증거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집요하게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도에 대하여 총독이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이미 이 사실을 천부장 루시아가 알려 주었습니다.(23:29) 그러면 바로 판결을 하여 석방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판결을 미룹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두 가지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26절을 보십시오. 바울에게 뇌물 받기 위해서입니다(26). 17절에 보니까 바울이 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그래서 천부장의 조언을 들어야 한다는 구실로 판결을 하지 않습니다.(22) 그 대신 2년 동안 공청회를 열지 않고(27)바울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자유를 허락합니다.(23) 친구들을 자유롭게 만나게 합니다. 치밀한 계산 때문입니다. 친구들이 돈을 가지고 올 수 있거든 이요. 산헤드린공회원들과 불편한 관계를 맺고 싶지도 않았고 죄없는 바울을 처형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정치적인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년이나 바울이 그곳에 잡혀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결례대로 바울을 풀어줄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는 무능했습니다. 그는 우유부단했습니다. 그는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탐하는 탐관오리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영구적으로 총독의 자리에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벨릭스의 무능과 잔인함으로 로마의 백성들이 로마황제에게 고발하여 소환되었다가 그의 형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만 건지고 초라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좋은 지위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여 탁류를 깨끗하게 만들 기회를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그의 아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여자 부도덕하게 살다가 결국 베스비우스(Vesvius) 화산 폭발할 때 용암에 덮여서 죽었다고 합니다.

2)우리는 살아 있는 주님께서 쓰시고자 기회를 주었을 때 그 기회를 상실하지 말아야 합니다. 탁류를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기회의 문은 언제든지 있습니다. 회개할 기회, 구원받을 기회, 쓰임 받을 기회, 직무를 충실히 수행할 기회 언제든지 그 기회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그 기회가 주어졌을 때 주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마지막 순간에도 한 강도는 기회를 포착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오늘 예배에 참여하신 성도님께서 진정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믿지 않으신 분계십니까? 오늘 바로 구원받을 기회인 줄 알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은혜받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용서하고 용서받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 해어진 후에 후회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장례식 가면 잘못을 구하며 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납골당에 가면 사연들을 읽어 볼 때가 있습니다. 별별 사연들이 많이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있을 때 잘 해라"는 유행가도 있지 않습니까?

기도할 기회가 있습니다. 기도할 기회 주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주부터 가을철 특별 새벽기도회가 있습니다. 기회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마 26:45)" 기도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기회를 잃어버리고 시험에 빠지게 되어 다 부인하고 도망갔습니다.
봉사할 기회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 영원토록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있어 가치 있게 쓰임 받을 수 있을 때 그 기회에 봉사하여야 합니다.

탁류에서도 살아있는 동안 물고기는 썩지 않습니다. 세상이 탁류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1. 세상이 탁류처럼 더럽다해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주어진 것으로 주님을 대적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쓰임 받아야 하겠습니다.(1-9)
2. 아무리 거세게 탁류가 몰아쳐 절박한 상황에 빠진다 하여도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핵심 가치인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여야 하겠습니다.(10-21)
3. 우리는 탁류 속에 휩쓸려 갈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주님께서 그 탁류 속에서 기회를 주었을 때 그 기회를 잘 사용하여 탁류를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24-27)
(/ 김 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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