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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을 구원하는 교회 (창 6:9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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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참으로 뜻깊은 날입니다. 이 좋은 날! 옆에 계신 분들과 인사하겠습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성도가 됩시다!”

  1955년 10월 첫 주일, 방재항 목사님을 비롯한 10여명의 성도가 현 장소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림으로 구원의 방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우리 교회! 영신교회 입니다. 그 날로 꼭 오늘까지 5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50’이라는 숫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구약에서는 50년이 되는 해를 ‘희년’이라고 불렀습니다. 레위기 25장 8절 이하에 보면,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찌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라고 했는데 이 희년은, 일곱 번의 안식년이 지나고 그 다음해 오십년 째를 부르는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명령 중에는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제 7일째는 쉬라고 했습니다. 또 육년 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제 7년은 이 모든 경작지를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면 49년, 그 일곱 번째 안식년 다음 해를 50년 희년이라고 합니다.
  그 날은 제사장들이 숫양의 뿔나팔을 불면서 희년이 선포됩니다. 희년이 선포되면 모든 얽매였던 것이 다 풀리게 됩니다. 남의 종살이하던 사람은 자유의 몸이 되어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남의 땅을 저당 잡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 땅을 원래 주인에게 다 돌려줘야 합니다. 모든 것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희년이었습니다. 바로 자유와 해방과 은총의 해가 희년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남에게 빚을 지고 있다가도 50년째에는 그 빚이 탕감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빚 갚기 싫으시면 50년을 기다리시면 됩니다.^^ 이 은총의 해가 바로 희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희년, 창립 50주년인 올해는 참 축복의 해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가 참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감히 상상도 못했던 성전 건축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서 12월 25일 입당을 앞두고 있지 않습니까! 이 희년의 해, 이 축복의 해에 이런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된 것이 그저 감사하기만 합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 가운데 놀라운 부흥의 시기도 있었지만, 더불어 어려운 침체와 정체의 시기도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성장을 방해하고 얽어매던 요인들이 이 희년의 해에 다 풀어져서 영신교회가 부흥과 성숙의 새 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0년 동안 하나님은 우리 영신교회를 지켜주셨습니다. 그 50년 동안 왜 어려운 일이 없었겠습니까? 50년 동안 어찌 위기와 고비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그 때마다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제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며 51년을 향해 나아가는 영신교회가 놀라운 축복의 인도를 통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축복의 땅을 향해 나아갈 줄로 믿습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복음을 전했던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는 두개의 좌우명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에벤에셀의 하나님, 즉 “여기까지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셨다”란 고백이었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그저 감사한 것 밖에 없었기에 나온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미래를 바라보면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고백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미래를 준비하신다는 신앙을 갖고 살아간 그의 모습이 오늘 창립주일을 맞이하는 우리 영신교회에 주시는 감사와 비젼의 고백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 여기까지 지키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영신교회의 미래, 앞 날을 여호와 이레로 준비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 복된 역사 가운데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또한 우리를 축복과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게 하신 하나님께 다함께 영광 돌리는 박수를 드립시다!

  오늘은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교회의 존재 목적에 대해 다시금 되새겨 보는 시간으로 삼고자 합니다.

  1912년 4월 14일 자정 무렵 부터 새벽까지 이 지구상에 아주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타이타닉’이라는 거대한 초호화 유람선이 수많은 생명들을 차가운 바다 속에 수장시킨 희대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배의 크기가 어찌나 컸던지 4만 6천 톤에 이르렀습니다. 길이만 해도 272m에 이르렀습니다. 그 길이는 비행기 중에서 가장 큰 보잉 747기를 네 개를 연결해 놓은 길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배를 가리켜 ‘떠다니는 궁전’, ‘떠다니는 섬’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이 배가 영국을 출발해서 뉴욕으로 향하던 첫 출항 중, 빙산에 부딪쳐서 침몰 당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결국 승객 2224명 중 1512명이 차가운 바다 속에 수장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곤 했습니다. 타이타닉호는 과학적이고 조직적인 배이기에 절대적으로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배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배는 어이없는 결과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진정 우리가 꼭 타야 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영원한 항구로 인도하실, 주님이 예비하신 아름다운 방주에 대해 읽었습니다.

  세상이 부패하고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이 부패한 세상을 정리하시고자 하나의 심판을 계획하셨습니다. 그것은 홍수를 통한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홍수 가운데 구원해낼 영혼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들은 당대의 의인이었고 경건했던 노아의 가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건조하라고 명령하셨고, 노아는 120년 동안 묵묵히 방주를 건조했습니다. 그 방주가 완성되던 날, 노아의 가족 7명과 암 수 한쌍 씩의 짐승들이 방주에 탔고 그 이후 40일 주야로 비가 내렸습니다. 마치 하늘에 문이 열린 것처럼 물이 쏟아져서, 온 지구상이 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높은 산도 물에 침수되고 오직 방주에 탄 사람과 짐승들만이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타이타닉호는 침몰했지만 노아의 방주는 370여일을 물에서 견디다가 물이 다 빠졌을 때 드디어 새로운 대지에 노아의 가족과 많은 짐승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방주는 당시 유일한 구원의 도구였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어떻게 방주를 설계하셨는지 성경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4절부터 16절까지 입니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찌니라” 아멘.

  하나님이 방주를 설계하셨습니다. 재료는 잣나무를 썼습니다. 안팎으로 역청을 칠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곤 몇 층을 건조하라고 했습니까? 3층입니다. 1층, 2층은 짐승을 두는 방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고, 3층은 노아의 가족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이 방주의 크기까지 하나님이 다 결정해주셨습니다. 길이는 300규빗, 1규빗은 손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입니다. 약 50cm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300규빗은 약 150미터의 길이입니다. 높이가 30규빗, 그것은 125m의 높이입니다. 넓이가 50규빗, 25미터의 넓이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150m의 길이에 높이가 15미터 넓이가 25미터는 보통 보는 배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 모습은 앞 뒤가 길고 폭이 긴 유조선과 비슷합니다. 현대 과학자들의 의견을 빌리면 이 하나님이 내 주신 방주의 치수가 현재로서도 가장 안정감 있는 치수라고 합니다. 바로 이런 모습의 배가 바다에서 가장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 배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 배에는 기관실이 없습니다. 발전실도 없고, 안테나도 없고 기관사도 없었습니다. 오직 누가!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노아는 정성스레 이 배를 준비했고 이 배를 통해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 보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그대로 준행하고 순종했습니다. 22절에 보니,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노아가 하는 일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데 방주를 준비하는 것을, 또 바닷가가 아닌 산꼭대기에 배를 만드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견고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해서 120년에 걸친 세월동안 묵묵히 그 배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방주는 오늘날 교회의 모델입니다. 교회는 세상 바다 위에 떠 있는 방주와 같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방주 안에 들어오는 영혼마다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들어오는 영혼들 마다 보호받고 안전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는 “생명을 보존케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9절, 20절 말씀입니다.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아멘.

  18절에 보니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로 들어가고”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방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방주로 들어가야만 생명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는 길은 하나님이 설계하신 방주로 들어가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노아의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어디 홍수가 나냐, 어디 심판이 있냐’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노아를 조롱하고 비판하다 홍수 가운데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7절 이하에 주님은 무엇이라고 경고하고 계십니까?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아멘.

  따라해 보겠습니다. “깨닫지 못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오늘 홍수가 나서 멸망당하기까지 심판이 있음을 깨닫지 못한 것,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꼭 교회에 가야 되느냐고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세상에 심판이 어디 있고, 어디 구원이 있고, 도대체 어디에 천국이 있다고 맨날 예배하고, 기도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도 심판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생활은 다가오는 심판의 때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구원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장가 가고, 시집 가고, 소를 팔고, 집을 사는 것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상적인 일에 너무 몰입되어서 이 땅에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심판을 준비하는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죄악의 물결 가운데서 떠내려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코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19:10에 보니까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빌딩을 짓고, 돈을 벌고, 다른 일에 관심을 갖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 받는 영적 공동체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 오늘 표어의 모델이 되는 방주의 특성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방주는 어떤 특성이 있을까요?

  첫째, 방주는 하나님이 직접 설계하신 것입니다.

  방주는 노아가 생각해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고자, 이 홍수 속에 죄악된 인간들을 심판하고 그 중에 경고하는 자들을 구원하고자 방주를 직접 준비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인간의 계획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설계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바로 주님의 교회로, 주님께서 세우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간이 건물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배당에 불과합니다. 오늘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영적인 공동체,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하나님이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을 구원하도록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 바로 교회요, 그 교회는 바로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나오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종합 대학교가 얼마나 건물이 웅장합니까? 서울 시청 건물이 얼마나 웅장합니까? 그러나 그런 건물 가지고도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시골의 다 무너져가는 오두막집 교회라도 그 교회를 통해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가 귀한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직접 설계하셨고, 만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도록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방주는 안전한 처소가 됩니다.

  13절에 보니까 “잣나무로 만들되 역청으로 안팎에 칠하라”고 했습니다. 왜 역청을 칠하라고 했을까요? 뭐가 새지 않도록이요? 물이 새지 않도록 입니다. 이 역청은 방수의 역할을 합니다.
  성경의 사건을 기억해 보십시오. 출애굽기 2장에 보면 어린 모세를 낳아서 석 달 동안 기르다가 더 이상 기를 수가 없으니까 어머니가 그 아이를 어떻게 합니까? 갈대상자를 만들고 거기에 역청을 발랐습니다. 그리곤 그 상자 안에 모세를 잘 넣어서 떠내려 보냈더니 그것이 목욕하던 바로 공주에 의해 발견됩니다. 역청이라는 것은 이처럼 방수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역청으로 칠해진 방주 안에는 물이 들어오지 않으니 얼마나 아늑했겠습니까. 거기서 1년 동안 노아의 가족은 편안히 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세상의 피난처요, 우리의 지친 영혼의 쉼을 얻을 수 있는 곳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영원히 거할, 마지막 영원한 천국의 처소를 우리에게 예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방주입니다.

  또 역청은 붉은 색깔을 띄기 때문에 예수님의 보혈을 종종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발리움 받은 방주, 교회는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새롭게 건짐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란 무엇입니까? 예수의 피로 값 주고 산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죄가 틈 탈 수 없습니다. 악한 자가 이 교회를 해칠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의 보혈이 발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마지막 날, 10번째 재앙이 바로 장자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명령해서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기둥에 다 바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양의 피를 바른 집에는 죽음의 사자가 그냥 Pass over, 유월절,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그리고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굽인들의 집의 장자는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수의 피, 예수의 보혈은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발리운 영적인 공동체입니다. 이 시대의 영적인 피난처입니다. 세상의 심판에서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28에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아멘.
  이 방주 안에 들어오면 안전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우리의 구원은 결코 취소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번 받은 구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방주 안에 거한다는 것이 큰 축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 계신 자리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자리인지 모릅니다. 그 축복의 자리를 양보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또 그 자리만 앉으라는 애기는 아니고 이 공동체 속에 늘 거하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방주는 교회의 모델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모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안전할 것이다.”아멘. 이렇듯 방주는 안전한 처소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방주는 단 하나의 문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16절 말씀을 한 번 더 읽어볼까요?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중하 삼 층으로 할찌니라”아멘. 층은 1,2,3층 이지만 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왜 문이 하나밖에 없을까요? 일단은 오랫동안 항해하려면 아무래도 방수를 위해서도 문이 많은 것이 좋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방주에는 창문이 위를 향해서 하나 나 있고, 들어가는 출입문은 단 하나만 옆으로 나 있었습니다.

  여러분, 구원의 문은 여러 개 입니까? 하나입니까? 맞습니다. 하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구원의 문이 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9에 보면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신,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구원받을 수 있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문 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다원주의를 주장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은 꼭 기독교만이 아니라 부처를 믿어도 되고, 유교를 믿어도 되고, 다른 이단 종교를 믿어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닙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오직 유일한 계시!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을 통해서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12에 보니까 “천하인간의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 외에는 우리에게 구원을 줄 이름이 없는 것입니다.

  방주에는 단 하나의 문이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은 교회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미국 뉴저지에서 큰 산불이 난 적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대개 산동네에 사는 분들은 부유한 분들보다는 좀 가난한 분들이 많지요. 미국은 거꾸로 입니다. 미국은 돈 많은 부자들은 산꼭대기 경치 좋은데, 맑은 공기 있는 곳에 집을 짓고 삽니다. 뉴저지의 한 부유한 저택들이 있던 산마을의 아래에서 불이 났습니다. 바람을 타고 불길이 산 정상을 향해서 마구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내려갈 길이 없었습니다. 길이 다 불로 막혀버렸습니다. 그 때에 그들을 구조하러 온 헬리콥터에서 이렇게 방송했습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산 정상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계곡이 하나 있습니다. 그 계곡물을 타고 내려가시면 안전하실 수 있습니다.”그래서 그들은 불이 미치지 못하는 계곡을 따라서 내려갈 때에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죄악의 물결가운데 다가오는 심판가운데 우리가 보호받고 안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렇게 오늘 날, 방주와 같은 교회를 통해서 신앙의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한 가지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교회는 다 착한 사람만 있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교회는 나쁜 사람도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교회에 다 착하고 의롭고 인격자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는 인격적으로 조금 부족한 분들도 계시고, 남을 잘 헐뜯는 분들도 계시고, 비판을 잘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목회하다 보면 우리교회에는 그런 분이 없는데, ‘저 분 좀 안 나가나’싶은 분들이 계십니다. 교회 나와선 사람들 상처 주고, 불평 많고, 아주 불편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더 열심히 나옵니다. 죽자사자 생명걸고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구원의 길인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 공동체 속에는 의로운 사람도 있고, 좀 부족한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도 정말 신기합니다. 방주를 보십시오. 성경을 정확히 보면, 7:2에 기록되어 있기를 방주에 짐승들을 넣는데, 정결한 것들은 암수 7쌍씩, 부정한 것들은 암수 2쌍씩을 넣었습니다. 정결한 것들을 왜 더 많이 넣었겠습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에는 정결한 동물들로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부정한 것들은 넣지 말지, 왜 넣었을까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부정한 것들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정결하고 믿음 좋은 분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부정한 짐승들처럼 좀 부족한 분들도 교회 공동체 속에는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통해서 서로를 포용하고 이해하고 끌어안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요? 우리가 소원의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영원한 천국에 영신교회라는 방주가 안착할 때까지 우리는 배 안에 서로 사이좋게 잘 지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들 때문에 시험들지 말기를 바랍니다.  좀 부족하면 내가 더 용서하고 사랑하고 끌어안고 이해하라는 것이지, 배척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들 드리겠습니다. “내가 방주 안에 있는가? 방주 밖에 있는가?”입니다. 방주 밖에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착한 일을 하고 구제를 많이 해도 그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좀 부족하고 인격적으로 흠이 있는 사람이라도 방주 안에만 들어오면 다 구원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50년 동안 하나님이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 영신교회를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51년을 앞에 둘 우리 영신교회! 세계의 비젼을 향해서 나아가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됩니다. 우리들은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아직도 방주 안에 들어오지 못한 무수한 영혼들을 향해서 “여러분! 방주 안으로 들어오세요. 방주 안으로 들어와야 구원이 있습니다”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아름다운 천국을 향해서 오늘도 믿음의 항해를 계속 하시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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