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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낮아짐의 은혜(약 1: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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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야고보서 1장 9절~11절까지
설교제목 : 낮아짐의 은혜
서  론(하나님은 당신이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요? 당신은 이 세상에서 낮은 자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높은 자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10명중에 10명은 다 높은 자로서 살기를 원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더 편하게, 다른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며 살아가는 것을 아주 뿌듯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굴복당하는 위치에 있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보다 한 단계 더 높고, 더 멋있고, 더 풍부한 자리, 즉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을 사람들은 원하며 살아갑니다.

  한 때 제가 중,고등부 설교를 하는 가운데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너희들 왜 공부를 하지?라고 하니까? 우리 청소년들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남보다 잘 살기 위해서 공부한다”는 것입니다. 또, 좋은 집에서 살기 위해서 공부한다는 것입니다. 돈 많이 벌고 싶어서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쁜 자매와 결혼하기 위해서 공부한다고 하는 대답도 있었습니다.

  젊은 청소년들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을 맛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부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들의 대답이 틀린 대답이라고 할 수 있나요? 우리들이 이 청소년들의 대답을 들으면서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 중에서는 참 기가 막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실상 이 아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세상을 향한 높은 자리에 대한 욕심들이 가득 차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것보다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표현만 하지 않을 뿐이지 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자신이 낮아지는 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 중에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 앞에서 굽신거려야 하는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삶의 모습을 가지게 될 때 “내가 왜 이것 밖에 되지 않을까?”되지 않을까 하면서 자신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안타까워 합니까? 바로 높은 자리에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된 우리들의 마음 속에는 믿지 않는 자들과 별반 차이 없는 그런 마음을 발견할 때면 역시 나도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성도님들 중에서는 자신에게 물질이 없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는 이도 있습니다. 또, 자신이 있는 직장에서 진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가끔 있습니다. 심지어 믿지 않는 다른 이들보다 더 적은 수입을 받거나, 더 적은 아파트 평수에서 살고 있으면 괜히 기 죽어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자신이 아주 축복을 많이 받지 못하는 낮은 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생각들은 아주 잘못된 생각들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물질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건강하고 그렇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지금 눈에 보이는 것으로 높은 자리에 있고 없는 것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곡해한 생각임을 우리들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들이 높은 자리에 있거나 낮은 자리에 있거나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임을 우리가 인식하고 어느 때에든지 주님만 생각하여 감사하는 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성도의 모습일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가만히 보게 되면 성도에게 있어서 낮아짐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무조건 높은 것만이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인생살이에서도 마치 높아짐과 낮아짐이 순환되어 돌아가듯 때로는 높아지는 그런 삶도 주어지고, 마치 인생의 밑바닥을 살아가는 듯한 낮아지는 삶도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그론 가운데 속에서도 우리가 기억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통하여 볼 때 우리가 누구 때문에 낮아져야 할지? 그리고 그 낮아짐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1. 우리는 주님 때문에 낮아져야 합니다.
  여러분! 9절을 다같이 한번 읽어 보도록 합시다.
  9절에서는 “낮은 형제”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성경을 보니 9절에 가장 먼저 시작되어지는 단어가 “그러나”라는 단어로 시작되어져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다. ‘그러나’라는 식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9절에 “낮은 형제”라는 것은 1-8절까지의 내용 사이에 어떠한 상황에 의해서 그들은 지금 낮아진 상태로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이 자의에 의하든 타의에 의하여 흩어져 있든지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이 백성들이 흩어짐을 당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들이 섬기는 주님 때문이었습니다. 
  2-4절의 내용을 보면 이들에게는 “믿음의 시련”이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시련은 그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으로부터는 어떤 높은 지위에 있거나, 어떤 높은 명예를 가지는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세상적인 지위와 명예를 얻기 위해서는 주님을 떠나야지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명예와 지위를 차지하는 것보다는 주님을 선택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흩어져서 살아갔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흩어져 정착하려고 하는 지역에서도 이방인들의 매몰찬 냉대와 아픔을 경험하는 자리에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때문에 이들은 육적으로 아주 힘든 상태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흩어져 있는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낮은 형제”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낮은’이라는 이 단어, 헬라어로는 ‘호 타페이노스’라고 하는데 원 뜻은 ‘땅 위에서 멀지 않은 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밑바닥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70인역에서는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가난한 상태에 놓여져 있는 상태로 설명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낮은 형제’란 말은 경제적으로 가난할 뿐만 아니라 배운 것도 없고 내세울 지위나 직업도 없는 그래서 당시에는 노예 정도에 해당하는 그야말로 밑바닥 인생을 가리키던 용어였습니다.
  이들이 왜 이런 노예와 같은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까? 이들에게도 잘 살아보고 싶은 욕심이 없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고 싶은 욕심이 없었겠습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마음 속에 다른 이들을 지배하고 싶은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들이 뻔히 이것 때문에 낮아지고 아픔의 자리에 있을 것을 알면서도 이들은 그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이었습니다. 할렐루야...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자신들이 주님 붙들면 분명 세상에서 낮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 세상에서주님 때문에 목숨을 잃어 버린 자들도 있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주님 때문에 그의 목숨을 내어 놓아야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주님 때문에 그가 가진 명예와 권력 등을 다 포기해야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도, 손양원 목사님도,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도 주님 때문에 목숨도, 재물도, 명예도 다 포기하고 살았던 분들이 한, 두 분들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과연 주님 때문에 우리의 것을 포기할 수 있으십니까? 주님 때문에 물질도 포기하고, 명예도 포기하고, 권력도 포기하고, 그리고 심지어 건강도 포기할 수 있는지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하고 또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는 아주 미련한 자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14장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나는 주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것이 주님을 것을 포기한다는 것을 세상의 것을 취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일성수를 하는데 돈과 주님을 저울질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 봉사를 하는데 이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과 저울질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먼저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울질 하는 것이요, 주님을 가장 우선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 때문에 세상에서 낮아지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회피하려고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축복이 여러분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낮아짐을 통하여 영적인 높음을 자랑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9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도록 합시다.
  어쩌면 이 원리는 세상적인 원리와는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비천한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에게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하셨으니 전혀 논리에 맞지 않는 말씀으로 생각되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영적이며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인 관심에서 보면 그 어떤 것도 내세우거나 자랑할 것이 없는 성도라고 하더라도 영적이고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보면 자랑할 것이 무궁무진하므로 그것들을 보며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목수로 일하시고 정규교육도 받지 못했으며 그 어떤 권력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실로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가장 밑바닥 인생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그 누구 앞에서도 위축되거나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오히려 당시 가장 학식이 높다고 하는 랍비나 서기관들, 또 최고 권력자들인 대제사장이나 산헤드린, 심지어 왕이나 로마의 총독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이심으로 그들을 두렵게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놀라운 신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자부심은 오직 예수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후사가 된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로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은혜와 자랑거리가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의인들이요(롬3:24) 동시에 하늘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입니다(빌3:20). 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세상이 받지 못하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으며(요14:17), 천사들도 사모하는 복음의 진리가 있고(벧전1:12), 천지만물이 무릎 꿇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으며(요16:23,24),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녀된 특권이 있고(갈4:6) 장차 천사들도 우리를 흠모하는 귀한 은혜로운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외에도 말로 다할 수 없는 천국 영광에 대한 약속과 소망 등 자랑거리가 한이 없을 정도로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재 세상적으로 아무 가진 것이 없고 내세우거나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불평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영적이고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진 자랑거리들과 약속들은 이 세상의 썩어질 자랑거리보다 더 값진 것이며 그 자랑거리가 우리에게 수도 없이 많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도된 우리들은 이 세상 어떤 곳에서도 언제나 당당해야 합니다. 성도로서의 프라이드, 자부심을 잃어 버리지 않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때문에 어떠한 것을 포기하게 될 때도 마지못해 포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함으로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기에 이것을 포기한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는 우리를 가르켜서 좋은 것, 좋은 자리를 포기한다고 하여 손가락질을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들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크신 팔로 우리의 모든 것을 안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 테네시 주 동쪽 한 작은 마을에 벤 후퍼라는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체구가 작았는데,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어머니가 창녀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체구도 작은 벤 후퍼는 언제나 외톨박이였습니다. 아이들은 그를 놀려대고 비웃고 멸시하였습니다. 그가 제일 괴로웠던 것은 “네 아버지가 누구냐?”고 남들이 물을 때였습니다. 12살이 되었을때 그는 처음으로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만나는 것이 괴로워서 예배가 시작된 다음에 살그머니 들어가 뒤편 구석에 앉았다가 예배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도망치듯이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다니며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배를 마치고 막 돌아 나오는데 누가 어깨를 탁 치기에 돌아보니 목사님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손을 잡으면서 “네가 누구 아들이더라?”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자 목사님은 다시 “네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가장 아픈데를 찌른 것입니다. 순간 그는 눈물이 쏟아지려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 네 얼굴을 자세히 보니 네 아버지가 누구신지 알겠다. 너는 네 아버지를 꼭 빼 닮았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당황하여 빠져나가는 벤 후퍼의 등을 향해서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답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때부터 그는 용기를 내기 시작했습니다.‘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남이 손가락질을 하든 조롱을 하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야!’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 결과 훗날 그는 테네시 주의 주지사를 두 번이나 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경건한 정치가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 때문에 아주 낮은 자의 자리에 있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 때로 예수님 때문에 낮은 자리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주님 때문에 높은 자리, 멋진 자리를 포기하는 것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른 것을 선택한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10절, 11절에는 부한 형제는 그의 낮아짐을 자랑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물질적으로 부요하거나 어려움을 당해 보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세상적인 것들을 자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세상적인 것들은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처럼 그럴 수 있음으로 부한 자리에 있을 수록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려분!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도, 영예도, 권력도, 인기도, 젊음도, 건강도 잠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풀과 같고 꽃과 같은 것인데 인간들은 마치 그것이 영원한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이 때로는 주님 때문에 부하게도 될 수 있고 가난하게도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선택으로 세상적으로 존경 받고 인정 받을 수 있는 자리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을 높일 수 있는 것, 주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것이 된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시험을 만나셨습니까? 이 세상에서 마치 낮은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안에 역사하고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볼 수 있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낮아짐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낮아짐을 통해서 우리를 높이고자 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어떤 자리에,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만 바라보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며, 자랑할 것은 자랑하며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멋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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