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랑으로 종노릇 합시다 (갈 5:13)

  • 잡초 잡초
  • 341
  • 0

첨부 1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해의 사랑으로 종 노릇하는 달입니다.

  ‘종이란 불명예스런 칭호가 아니고 구약 성서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들에게 사용한 칭호였습니다(모세, 여호수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욥, 이사야 등이 종이라 불리었습니다). 특히 예언자들에게 이 칭호가 사용되었습니다.

‘종이란 절대 복종, 절대 겸손, 절대 충성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바클레이)고 하며,  ‘인간은 하나님의 참 종이 될 때에 비로써 인간을 바로 사랑할 수 있다’(포티트-Poteat)고 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이란 그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내맡긴 자이며, 그의 모든 삶이 하나님에 의해 또한 하나님을 위해 지배되어지는 자입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다 무엇인가의 종입니다. 자신이나 권력, 돈이나 명예, 또는 쾌락 등에 의해서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종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누구의 혹은 무엇의 종이냐 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율법의 압제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에서 자유케 한다는 것이 윤리적 도덕적 방종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때때로 자유를 악용하여 육체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진정한 자유는 사랑의 종노릇하는 데 있음을 역설하면서 특히 이웃을 위한 봉사에 자유를 선용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성도는 먼저 하나님의 종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웃과 형제를 섬길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는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라고 합니다.

  신구약 성경에 인간의 행위의 법칙에 관하여 "하라" 혹은 "하지말라"라고 한 명령들은 모두 다 율법에 속한 말씀입니다. 이런 명령들이 많지만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온 율법은 이웃 사랑에서 그 완성을 봅니다. 만일 누가 사랑의 동기 없이 율법을 행하였다고 하면, 그것은 율법을 참되이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만일 누가 사랑을 행하면서 율법을 범한다면, 그것은 사랑을 참되이 행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실행은 사랑 없는 기계적 동작이 아니며, 또한 사랑은 법 없는 무질서가 아닙니다. 사랑은 법을 초월하나 법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는 성령의 법아래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자신이 죄인을 사랑하신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사랑의 법을 따라 행함으로써 율법의 모든 요구를 성취할 수 있음을 교훈한 것입니다.

  겸비한 자세로 종노릇 합시다.

(눅 17:7-10)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합니다.

  종은 자기가 잘났다고 우쭐대거나 교만해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겸비한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태도도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 하는 자가 복된 자요 지혜 있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종은 또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자입니다.  바울사도도 스스로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고전 9:19-23)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말씀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의 태도요 종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탈리아 동남쪽 시실리아 섬에 동정녀로서 신앙이 강하고 독실한 아가다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이때에 섬의 총독 아나쓰는 음탕한 마음을 품고 중매쟁이를 보내어 아가다를 유인하여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아가다는 오히려 복음을 전하여 그를 믿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총독은 분노하여 군졸을 보내 아가다를 잡아오게 하였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로마 귀족의 아내 되기를 싫어하고 예수의 종이 되고자 하느냐?" 그때 아가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예수의 발을 씻는 종이 되기를 원할 뿐이오."

그녀의 신앙은 강하고 위대하여 성 아가다라는 칭호를 받기에 족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에도 주께서 우리를 택하여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겸손해 할 줄 아는 신앙을 가져야 그가 참 신앙의 사람이요 더 귀하게 쓰임 받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사람 중에 영국의 처어칠 경을 빼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의 위대한 정치가요 탁월한 지도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가 낙선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크게 낙심을 하고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열심히 벽돌로 담장 쌓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한 장 한 장 쌓아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큰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공을 위하여는 작은 일부터 충성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입니다. 물론 다 아는 내용입니다만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담장 쌓는 일을 할 때입니다. 그는 작은 일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준비하여 상원의 선거에 재도전함으로 마침내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치가가 되어 제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는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종의 도를 명심하여 겸손해 하며, 비록 그것이 비굴해 보이고 연약한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최후의 승리를 위해 훌륭한 자로 인정받을 때 그의 영광은 배가 될 것이며 가장 값진 것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용서와 함께 합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한 지주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금고에 넣어둔 보물을 도둑맞게 되었는데 그는 흥분한 나머지 자기가 거느리고 있던 종을 도둑놈으로 몰게 되었습니다. 그는 시비를 가리는 재판의 절차도 밟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재판하여 종의 손을 잘라 내도록 명령하고 종을 마을 밖으로 추방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이 주인이 사냥을 하다가 밀림 속에서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구하려고 어느 초막으로 들어갔더니 거기에는 바로 자기가 손을 자른 종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복수를 당할까봐 겁을 냈습니다. 그러나 종은 웃으며 그를 맞았습니다. "나는 지금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소. 복수를 할까봐 겁내지 마시오. 나는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훈을 받았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장하는 최고의 상징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우리의 죄를 사함 받을 수 있고 또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고 종노릇 할 수 있습니다.

  이웃의 종노릇 합시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미국 프린스톤신학교의 교장이었던 죤 맥카이(John Mackay, 1889-)박사의 [종의 형체]라는 글에서 사도 바울의 전기 중 가장 감동케 하는 것은 사도행전 28장의 바울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 3차 전도 여행에 있어서,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서 배에 타고 있었는데 난선하여 말타 섬에 표착했습니다. 그는 같은 배에 있던 사람들을 위해 비가 심하게 내리고 있는 한 가운데서 자신도 비에 젖어 지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나무를 거두어다가 불을 피웠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서서 당당하게 설교하고 있는 것보다도, 그가 같은 배의 동선자를 위해 나무를 거두어다가 불 피우는 모습이 훨씬 감동케 했다고 맥카이 박사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인간들이란 두 세 명이 모이면, 누가 위대한가하고 우열을 정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챤은 그것이 아니라 나아가 종의 형체를 취하고 사람을 위해 진력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가정도, 교회도 문제는 없어집니다.

  평생을 아프리카에서 봉사한 '알버트 슈바이처'는 인생의 참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사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 때, 그는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은 언제나 불평과 불만족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해 살려고 하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사람이 위대하다는 것은 학식이나 권세나 돈이 많으냐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남을 위해 살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쓸데없이 교만해지고, 남이 나를 섬겨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섬김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주께서는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까지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서로 종노릇하며 섬기는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요, 그러한 사회가 평화로운 사회가 됩니다. 성도들은 이웃을 향한 종노릇 없이 참된 행복이 기대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노릇 합시다.

(삼하 7:26) 사람으로 영원히 주의 이름을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종 다윗의 집으로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생각에는 한계가 있어서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가장 멋있고 행복할 것같이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 행복이며 보람 있는 일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유를 속박하기 위함이 아니라 참으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달리는 기차가 선로를 따라 달려야 안전하며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자유로우며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인간도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법도 안에 있을 때 안전하며,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명 감당하게 됩니다

  주남선 목사님은 하나님의 종으로 주님만 섬기겠다는 일념으로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투옥되었다. 해방 후 석방되어 그가 살았던 거창으로 돌아오자, 거창에서는 대대적으로 환영하며 그를 애국자로 대접하였습니다. 그 이후 그 지방의 소위 정치인들은 수시로 주 목사를 찾아와서는 의원직을 맡아 정치에 참여해 줄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주 목사는 묵묵히 거절할 뿐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가장 귀중한 일은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50년 6.25가 터지자 거창은 공산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마을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요구하던 공산당원들이 어느 날 주 목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거창 성경학원의 건물을 관공서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과, 주 목사 자신도 인민 공화국을 위해 일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주 목사의 답변은 거절이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공산당원은 협박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잠시 후 주 목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잘 들으시오. 내가 할 일은 단 한가지오.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 일이 내 본분인데, 어찌 정치에까지 관여할 수 있겠소. 내가 특별히 공산당이 싫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오. 해방 후 내게 의원직을 맡아 정치하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소. 하지만 나는 그때도 거절했었소. 그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오. 나는 누가 정치를 하든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거룩하신 그분의 일만을 할 것이오." 주 목사의 깊은 뜻을 알아차린 공산당원들은 고개를 숙여 정중히 절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주남선 목사는 그야말로 하나님이 분부하신 거룩함의 참뜻이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입니다.(인터넷정보클럽-거룩한 일에만 전념한 주의 종)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고 인간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는 비극과 불행만이 있을 뿐입니다. 인류 사회에서 빚어지는 모든 비극의 원인은 모두 인간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방종한 삶에 기인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창 11:1-9). 이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죄의 종으로서 살기 때문에 초래되는 비극입니다.

  나집사와 제집사가 겨울 낚시를 갔습니다. 새벽에 나란히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여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어 많은 고기를 잡게 되도록' 기도하고 출발하였습니다. 어느 바닷가 빙판 위에 자리를 잡고 낚시 줄을 드리울 구멍을 뚫으려는 순간 지나가던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여기는 고기가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시오!!" 제집사가 말했습니다. "그래, 이건 하나님의 음성이야. 우리가 아침에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로 도움을 요청했지 않나. 우리 자리를 옮기세" 그러자 나집사가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큰소리로 물었습니다. "이보시오! 당신은 하나님이오?" "아니오, 난 하나님이 아니오" 제집사는 자리를 옮겼고 나집사는 그냥 그 자리에 구멍을 뚫었습니다.자리를 옮긴 제집사는 많은 고기를 잡았고, 그냥 그 자리에 남은 나집사는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 지나가던 사람이 하나님은 아니었지만 빙판이라고 생각했던 그 자리는 스케이트장이었고 그는 스케이트장 주인이었습니다. 스케이트장에 고기가 있을 리 없지요.

  강문호 목사(갈보리선교교회)님이 파나이섬에서 선교하고 있는 동생 강요한 선교사와 함께 50여명의 선교사를 대접할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선교사님들을 대형 버스에 모시고 승용차로 뒤따르고 있었는데 앞 버스에서 나오는 매연이 무척 심해 나는 강요한 선교사 운전기사인 현지인에게 버스를 추월, 앞장서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인 강선교사가 뒤따라오라고 하였다면서 결코 앞장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의 형이라고 말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주인이 말한 대로 뒤에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차가 멈추었을 때 동생에게 이런 사정을 말하자 동생은 웃으면서 이 기사는 자기 말 외에는 누구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이면 화단에 물을 주라고 하였더니 비가 오는 날에도 물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만 고지식하게 들었던 아브라함이 생각났다고 합니다. 명령대로 아들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복 주신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눅 15장에는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는 자유로워 보였지만 결국 불행과 비극만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인간도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는 참 평안과 행복이 없고 불행과 비극만이 초래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뜻을 꺾어버리고 하나님께 복종할 때는 가장 위대한 삶을 살 수 있고 진정한 자유를 소유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종노릇 하고 이웃의 종노릇 하고 하나님의 종노릇 하는 모두가 되어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모두가 됩시다. (강 성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