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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오차 범위 (눅 22:3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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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이 자리에서 예배하시는 모든 성도들의 영혼과 가정 위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상황을 보지 못하고 뭉뚱거려 상황을 판단하는 것을 말하는 거겠죠.

요즘엔 차에 많이 부착하기 시작하는 네비게이션이라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지도가 나오는 것도 있고, 과속 카메라 위치를 말해주는 간단한 네비게이션도 나오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내 차가 가는 현재 위치를 어떻게 확인하는 걸까? 궁금했는데 그 답이 GPS 라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은 좀 과학적인 얘기가 설교 초반부에 나오죠?
GPS 라는 것은 Global Positioning System의 약자입니다. 위성항법시스템이라고 불리우기도 하죠. 지구 상공에 있는 24개의 인공위성 중 최소 3개, 최대 4개의 위성 신호를 받아 현재의 위치를 정확히 산출하는 시스템입니다. 이 장치 덕분에 항공기나 바다를 항해하는 대형선박도 자동항법으로 목적지까지 자동으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단속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 위치를 입력해 놓으면 작은 기계가 그 위치에 가까이 오면 경고 메시지를 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 GPS의 오차범위입니다. 군사 목적으로 사용할 때에는 오차범위가 50cm 이내랍니다. 그래서 요즘엔 미사일 폭격을 할 때에 이 시스템을 이용해 입력된 위치에 자동으로 50cm 이내의 목표물에 명중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라크 전에서 정밀 폭격이라는 말로 쓰여졌죠. 그런데 민간인들에게는 전파를 살짝 교란시켜서 내보내기 때문에 민간인들이 쓸 때에는 약 15m 정도의 오차범위가 있답니다.

벌써 골치 아파하는 분들이 있을까 걱정이 되는데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기계 설명을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오차범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만일 이 기계가 오차 범위를 벗어나서 안내를 해 주게 되면 목적지를 향해 가는 그 길이 엉망이 되고 맙니다. 전혀 내가 원하지 않은 길로 들어가기도 하고, 때론 목적지를 지나쳐 버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 되는 말씀이 이끌어 주는 항로를 따라 얼마나 정확하게 달려가고 계십니까? 혹이나 오차범위를 벗어나서 멋대로 아무 길이나 가고 있는 방향잃은 인생은 아니십니까?

우리가 완전한 신이 아닌 이상 모든 사람들은 다 인생의 오차를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단 한명도 없습니다.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심지어 예수님도 인생의 오차를 갖고 계셨습니다.
오늘 이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 인생에서 발생한 내 의지와 하나님의 목적과의 간격에서 생긴 오차의 고뇌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44] 예수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지금 고뇌에 차 계십니다.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고뇌에 찬 기도소리는 온 동산 골짜기를 타고 낮은 신음과 음울한 목소리를 타고 울려 퍼집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설교했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간절히 해야 한다.’ 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이렇게 절박한 현실이었다.’라든지... 여러분도 이 장면을 설교한 많은 설교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이 예수님의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하였습니다. 아주 아주 기분이 좋아집니다. 왜냐고요? 예수님에게도 인생의 오차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무나 완벽하게만 보이셨던 예수님, 한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으셨던 그분의 삶에도 오차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제 인생의 오차를 느끼면서 고뇌하는 제 영혼에도 희망이 보입니다. 큰 핑계거리도 생깁니다. ‘에이, 예수님도 그러셨는데... 모...’ 하고 열등감, 죄책감 한번 툴툴 털어버릴 용기도 슬쩍 생깁니다.

사실 어쩌면 우리의 인생은 오차 투성이인 삶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정해 놓은 경로도 잘 지킬 수가 없으니 이거 참 괴로운 일입니다.
내 스스로가 약속해 놓고도 약속을 지키지 못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약속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성경 말씀을 읽을 때면 오히려 숨이 더 턱턱 막혀 올 때도 있습니다.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이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는 그 말씀의 시퍼런 기세 앞에 설 때면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들으면서 또 한번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안 낼 수가 없습니다.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 주어라.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겐 속옷까지 내어 주어라. 여인을 보고 응큼한 생각만 가져도 간음한 것이다. 형제를 미워하기만 한 것으로도 살인죄를 저지른 것과 진배없다.”
이런 말씀을 읽다보면 어느새 내 영혼은 비에 젖은 비둘기 같이 초라한 모습으로 움츠러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성경을 들여다보게 되면 서슬 퍼런 칼날에만 무서워 하다가도 그 칼날을 쥐고 계신 분의 눈빛을 살펴보면 조금 마음이 누그러뜨려집니다. 그 칼을 쥐고 계신 분의 눈동자를 들여다 보게 되면 그분의 눈빛 속에 한없이 우리를 동정하시고,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처지를 아시고, 우리 인생의 흔들림을 동정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시는 분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용기 낼만한 성경 위인들의 오류들을 열거해 볼까요?

먼저 아브라함을 도마에 올려 놓겠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고 기근이 들자 먹고 살기 위해 이집트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남자로서의 자존심도 꺽은 채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목숨을 부지하려는 얕은 수를 부렸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 아내를 아내라고도 얘기 못하는 그런 분... 혹시 계십니까?

야곱은 복에 눈이 멀어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인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재물에 욕심이 있어서 형제간의 의리를 끊을 뿐 아니라, 부모마저도 등져 버린 분... 혹시 계십니까?

모세는 어떨까요? 그는 순간의 혈기를 참지 못하고 그만 이집트 병사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모래밭에 묻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홧김에 사람을 죽이고 암매장하신 분.. 계십니까?

왕중의 왕, 성군 다윗은 또 어떨까요? 하나님의 놀라운 총애를 받고 왕위까지 오른 다윗은 어느날 어스름한 저녁 산보 중에 아름다운 여인을 목격하고 그 여인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자신의 군대장관과 짜고 그 여인의 남편인 자신의 장수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이는 간접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당당하게 그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다른 사람의 아내와 간통하시고 남을 사주하여 그 여자의 남편을 살해하신 분... 계십니까?

아무 고민없을 것만 같았던 바울도 처절하게 절규하면서 외치기를,

(롬 7:22-24) 『[22] 나는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다 나를 사로잡는 것을 봅니다. [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행하는 자신의 모습이 완전히 일치 되지 않아 고뇌하는 바울의 절규는 바로 우리 인생의 오차가 주는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존경하는 그들 모두에게 인생의 오차는 있었습니다.
자, 여기서 설교가 마쳐진다면,
‘그래, 다 마찬가지지 모. 낸들 별 수 있나? 그냥 좋은게 좋은 걸로 사는거지 모.’
하면서 느긋한 마음으로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좋습니다. 저도 여러분이 지고 있는 많은 짐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현대인들이 지고 가기엔 너무 힘든 묵직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 모두에게 지워져 있습니다. 그 십자가가 가볍고 지기 쉬운 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오차 범위를 줄이기를 간절히 말씀하고 싶습니다.

(시 37:23-24) 『[23] 우리가 걷는 길이 주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께서 지켜 주시고, [24]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

어쩌다 비틀거릴 수 있습니다. 이것마저도 부정한다면 살아날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비틀거림이 넘어짐이 되면 안됩니다.

비틀거림을 용서하신다고 해서 계속해서 비틀거리면서 인생길을 걸으시겠습니까?

(롬 6:1-2) ...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받아주시고, 은혜로 용납해 주신다고 해서 계속해서 그 일을 반복하시렵니까?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으시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잠 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벧후 2: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인생의 오차 범위를 좁히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제가 숨을 거둘 때에 이 시편을 읊으면서 숨을 거둘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시 26: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저의 인생을 볼 때에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걸음을 보게 됩니다. 때로는 작게, 또 때로는 오차 허용 범위를 훨씬 초과해 버리는 제 자신을 볼 때마다 의기소침해 지기도 하고, 용기를 잃을 때도 있습니다. 때론 도피해 버리고 싶을 때도 있고, 손들고 항복해 버리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에 읊조렸던 시조가 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암기했었던 시조입니다. 외워서 읊고 싶었는데 잘 안되더군요.
이은상 씨가 지은 <고지가 바로 저긴데>입니다.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 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피 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인생이 오차 범위를 안고서라도 가야만 하는 고지가 있습니다.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더라도 가야만 하는 목표점이 저에겐 있습니다. 때로는 사단에게 내 인생이 오차 범위 때문에 죄책감의 맹공격을 받더라고 부끄러운 저를 부둥켜 안고 가야만 하는 목표가 저에겐 있습니다.

우리가 이달의 찬양으로 불렀던 이런 찬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사단에게 이렇게 명령하십시오.

“사단아 물러가라!
나는 지금도 주님께로 가까이 가는 중이다.
내 인생의 오차가 벌어지더라도 그걸로 나의 숨통을 끊을 생각은 아예 말아라!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내 인생의 오차 범위를 줄이기 위해서
땀방울이 피가 되도록 기도할련다!
내 발의 등, 내 길의 빛이 되는 말씀을 따라 걸으려는 나를 방해하지 말아라!
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버지의 뜻이 내 뜻이 될 때가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가 오차가 있더라도 빈정거리지 말아라.
주님은 이런 나를 위해, 이 오차를 메꿔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것을
내가 믿고 있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난 이길 수 있다.”

사랑하는 오천가족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여정 위에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항상 있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정 연 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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