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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시뒤에 숨겨진 보화 (고후 1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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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 바울은 모든 사도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도입니다. 본문에도 나타나 있지만, 그는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큰 계시를 보았습니다. 신령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한 고백을 들어보면 이렇게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육체에 가시가 있어서 사단의 사자처럼 그를 괴롭혔습니다. 이 가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끊임없이 큰 고통을 주는 무엇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시는 말뚝이라는 의미와 더욱 가깝습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기도의 횟수도 세 차례였습니다. 기도의 내용도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육체의 가시를 없애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 대한 응답도 같습니다. 예수님께 대해서 이 잔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고 난의 잔을 마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님에게 큰 능력을 주셔서 그 고난을 견딜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대답도 거의 같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족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주께 봉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그 몸에 가시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위치가 어떻습니까? 지금 어떤 가시가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누구나 가시는 다 있어도 큰 가시는 아직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큰 가시가 오기 전에 겸손하게 무릎 꿇고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큰 환란이 닥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테두리 안에 있자는 것입니다.

  저도 둘째 성현이 때문에 기도원에서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99년도에 성형이가 태어난 지 한달만에 젖을 빨지도 못하고, 24시간 울기만 하는데 온 가족이 다 지쳐버렸습니다. 팔에 안고 흔들면서 안고 있어야 한 두시간 겨우 잠을 자는 것입니다.
  이 병원, 저 병원. 서울에 있는 병원을 다녔지만 자세한 병명도 모르고 고칠 수조차 없었습니다.  사실 아이가 괴로워할 때 저는 속으로만 ‘저 병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했지 실천을 못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는 마음으로 그냥 넘어갔지요. 하지만 아이가 더욱 힘들어하고 뒤로 넘어가게 되자 저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기도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성현이가 아프기까지 저의 입장은 사면초가였습니다. 결혼 초에 버스를 2번 갈아타고 1시간을 넘게 가야 하는 곳의 개척교회에서 사역하면서 20만원을 사례비로 받았는데, 헌금하고 차비하기도 모자랐습니다. 근데 또 열심히 한다고 파트였지만 매일 출근하며 전담보다 더 열심히 일하며 도왔습니다. 성민이 분유값도 없던 그때에 교회 이전을 위해 모든 결혼예물을 헌금하고, 밤에는 택시운전을 하면서 건축 작정헌금을 하면서 힘들게 살았는데 교회가 이전을 마치자 억울한 일로 그 교회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온 몸과 마음을 바쳤기에 마음의 상처 또한 매우 컸지요. 거기에 부모님이 교통사고를 당해 그것 처리하느라 힘들었고, 새롭게 옴긴 교회에서도 성루에서 500만원 짜리 지하 단칸방에서 있으면서 힘들게 사역하던 중 성현이까지 아프니... 진짜 인생의 코너에 몰린 상황이었습니다.
  “이젠 정말 기도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 아팠던 상처와 지친 심령을 끌어안고 저는 20일, 어머님은 15일 금식기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저는 사실 두려운 마음이 앞섰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금식이 되더라구요. 기도도 절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금식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어쪘든 금식이 끝나고 나니 성현이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좋아지고, 어려웠던 문제들이 하나하나 해결되어가며, 사역을 위해서도 기도했는데 그 응답으로 부산으로 사역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꼭 가시다운 가시를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가시의 고난이 있어야 천국갈 때까지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이 가시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은 대로, 바울은 육신의 가시를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 가시의 문제를 주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한번 기도드린 것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드렸다고 하는 것을 보니 간절히 기도한 것 같습니다.“내 살을 찌르고, 나를 아프게 하는 가시가 내게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 이 가시를 좀 없애주세요”라고 주님께 자기 가시에 대한 문제를 솔직히 고백하고 이것을 없애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해결의 길입니다. 우리도 이런 가시의 문제를 당할 때 혼자 해결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이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와서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일을 당할 때 기도하지 않고 혼자 근심하고 염려하며 고민합니다. 하지만 이 가시의 문제는 혼자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내게 어떠한 가시가 있어서 큰 고통이 오고, 괴로움이 올 때에 제일 먼저 할 일은 이 문제를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모두 쏟아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라고 주님 앞에 온전히 다 고해야 합니다. 그것이 해결의 비결입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시편 50편에 보아도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라”고 하셨습니다. 환난 당할 때 하나님을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응답하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우리가 해결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전심으로 구하지 않은 죄요, 또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우리의 방식대로 해석  할려고 하는데서 응답이 지연되기도 하고 왠지 기도의 보람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할 때, 주님은 두 가지 길로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하나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기도드린 대로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바울이 육신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간절하게 세 번씩이나 기도했는데, 그 가시를 없애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그 잔을 떠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잔을 마실 수 있는 힘을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능력을 더하셔서 십자가의 고통도 능히 견딜 수 있는 새로운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도 역시 그렇습니다. 바울의 몸을 찌르는 가시는 없애주지 않으셨지만,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시며, 그 가시를 능히 견딜 만한 족한 은혜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가시가 존재하므로 바울은 교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또한 가시가 있으므로 더욱 더 기도에 정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가시가 있습니다. 왜적인 가시든 내적인 가시든 가시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가난의 가시가 있다고 해서, 살맛나지 않는 세상이라고 포기하지 마세요. 가난한 사람이 몇 배 더 많습니다. 내가 어렵다고, 나만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시면 안됩니다. 모양은 다르지만 다같은 어려움 속에 어떻게 믿음과 기도로 극복하느냐의 문제지...
  자녀가 공부 못한다고 낙심하지 마세요. 1등 못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걸 아셔야죠, 특히 믿음의 가정은 자녀들의 영적 관리가 공부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저의 모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심방 전도사님의 딸인데 대학을 가려고 공부를 열심히 하던 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시험을 못쳐서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학생이 결정한 길이 자살이었습니다. 전도사의 딸이라서 자살했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쉬, 쉬 하면서 조용히 장례를 치루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오히려 꼴등은 맘 편합니다. 세상에 1등하는 사람 몇 명 안됩니다. 내가 반에서 꼴등을 해도 전국 등수로 보면 나보다 못하는 아이들이 더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따지고 보면 모두가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습성은 편안하고 건강하고 집안 잘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것도 필수가 아닌 선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업이 망하거나 자녀가 잘못되어 지거나, 질병으로 고통당하거나 이런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안가던 기도원을 찾게 되고 기도의 불을 붙이게 되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바울이 변화되어 크게 쓰실 일만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시를 주어 무릎 꿇는데 게으르지 못하게 하셨고, 가시보다 더 큰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찬송가에도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어려운 일 당한 때도 족한 은혜 주 시네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일 당한 때에도 족한 은혜 주시고, 내가 심히 고단할지라도 내 앞의 반석에서 새로운 생명수를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고통도 견딜 수 있고, 슬픔도 참을 수 있고, 고독도 견딜 수 있고, 실패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족한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뜻은 가시가 있을지라도 이것을 잘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가시로 말미암아 주님의 능력이 그 생활에서 온전히 이루어져서 하나님이 그를 귀하게 쓰는 그릇이 되게 하고, 자기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축복이 되게 하는 은혜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집니다.  “약한데서” 라는 말은 인간을 두고 한 말입니다. 나는 완전하다고 자부하는 자, 나는 부족함이 없이 행복하다고 하는 자, 그는 하나님을 의지할 일도 없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다 나는 부족하고 나는 연약하며, 나는 작다고 느껴져야 주님의 능력을 받을 빈 그릇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 가지 가시와 같은 고통, 질병, 슬픔, 고독, 환난 같은 것들로 말미암아 인간이 약하여지고, 그 약함을 깨닫게 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은 온전히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이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할 때는 그 능력이 인간 가운데서 온전히 나타나지 못합니다.

  토기장이의 능력과 기술은 흙이 부드럽고 연할 때 온전히 나타날 수 있습니다. 흙이 굳을 때에는 토기장이의 기술이 나타나지 못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의 가시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이 심령에 상처를 입을 때, 상한 갈대처럼 약 해질 때, 주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 까닭은 고통의 가시로 말미암아 인간이 약하여질 때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고, 그 심령은 하나님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에야 아버지 집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심령도 아마 이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심령이 약해질 때는 자연히 그 마음이 겸손해집니다. 이사야 57장 15절에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 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 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겸손할 때에는 그 마음에 하나님 의 영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체험했습니다. rm러므로 계속해서 “나는 오히려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의 능력이 이런 때에 내게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나는 “약한 것들,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당하는 것들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내가 약할 때 곧 강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아도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 프란시스를 기억하시지요. 그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본래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부족한 것을 모르고 자라났습니다. 그러니 다른 부잣집 아들처럼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큰 병에 걸렸는데, 그는 이 중병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약한 가운데서 주의 능력이 나타나 방탕하던 청년이 성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는 분이 계십니까? 혹은 불구의 몸으로 항상 비관하는 분이 계십니까?  낙심하지 마세요.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그리스도에게 내 자신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약한 가운데서 주의 능력이 온전하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가시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강해지며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약한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이 말씀은 얼른 들을 때 모순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진리입니다. 이런 진리를 흔히 역설적 진리(Paradox) 라고 합니다.
  인간이 약해질 때 겸손해집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중병에 들어 약해지면 겸손해집니다. 세력 있던 사람이 그 세력이 없어지면 겸손해집니다. 돈 많던 사람이 사업의 실패로 돈이 없어지면 겸손해집니다. 인간은 약해질 때 그 생각이 깊어집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 안에서의 소망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약할 그때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며, 새 소망과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약해질 때 기도가 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약할 때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것은 절망적입니다. 약할 때 신앙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가련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결국 인간은 허무와 절망에 빠집니다.  우리 사회에는 사업에 실패하여 자살하는 사람, 연애에 실패하여 자살하는 사람, 생활고로 자살하는 사람, 심지어 입시에서 실패하여 자살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약할 때 강해지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인생길을 바로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오는 사람은 약할 때 강해지는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불행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할 때 강해지는 신앙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약할 때 낙심하지 말고, 자포자기하지 말고, 겸손히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새 능력을 받아서 사도 바울처럼 약한 것을 오히려 기뻐하며 자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물질에 고통을 당하고, 육신의 고통을 당한 사람은 남들이 그렇게 고통당할 때 긍휼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바울과 같은 가시가 있습니까? 사울왕이 다윗왕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오듯이 쫓기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토록 큰 가시가 현재 우리에게 없다고 해서 이 말씀이 남의 말씀이 아닙니다. 가시는 사랑하는 자에게 언제든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나를 찾아와 나를 찌를지 모르는 그 가시가 오기 전에 내게 영적인 충만함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 어떤 가시가 와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의 체험적 신앙이 내 안에, 나아가서 우리 안에 충만해야 합니다. 가시의 아픔을 경험하지 않고는 큰 사람으로 쓰임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흐름이고,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고, 다윗이 그러했으며, 성경의 훌륭한 인물들은 다 아픈 가시를 스쳐지나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을 광명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시 뒤에 숨겨진 보화를 많이 캐내어 큰 상급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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