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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어루만짐을 받으라!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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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말

어루만진다는 말은 가까이 하여 애정을 가지고 쓰다듬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아이들이 강아지를 어루만지듯이,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쓰다듬고, 어르고, 어루만지면서 사랑스러워 못견뎌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어루만짐을 받으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엘리야라는 선지자는 특별히 하나님의 어루만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나누어 보면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랑을 그만큼 받을만하여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Yah is El or Yahweh is God.”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7장1절에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사람(the Tishbite)”이라고 소개합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편 아르논강과 얍복강 사이의 고원지대로서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에 할당된 곳이었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을 피하여 도망한 곳이기도 합니다.

엘리야의 일생의 사이클을 여섯 개의 사건(에피소드)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❶아합과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 갈취에 대한 예언 ❷가뭄에 대한 예언과 도피생활 ❸갈멜산의 대결 ❺호렙산으로 도망 ❹아하시아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 ❻기름 붓는 마지막 사명(하사엘, 예후, 엘리사)이었습니다.

1. 말씀대로 살다보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성공이란 우습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너무 성공하려고 머리를 굴리면 오히려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작은 것으로 만족하면 작은 것이 어느 날 큰 것이 되고, 적은 것으로 만족하면 적은 것이 어느 날 많은 것으로 달라집니다. 좋은 면으로 달라지는 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열왕기상 17장을 보면은 엘리야의 처량한 신세가 소개됩니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응하다가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러한 엘리야의 생활은 항상 고달팠습니다.

신앙인들은 편안하게 살려고 하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고달픈 생활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생활 중에 작은 기적을 체험하고 급기야는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❶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이스라엘에 수년 동안 우로지택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기도 어렵지만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역시 난감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아합에게 전했습니다.

❷하나님께서는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왕상17: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도 믿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그릿 시냇물은 가물지 않아도 물이 풍부치 않으며 까마귀들을 통하여 먹인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흉년에 고양이에게 생선 배달을 시키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❸하나님께서는“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왕상17: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사실은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시돈은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생명을 찾는 이세벨의 친정 곳으로 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도 가난한 과부의 집으로 가라는 말씀은 정말 영문 모를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말씀은 엘리야의 생명을 찾는 아합과 이세벨의 의표(意表)를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곳은 의도적으로 피하셨습니다.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탄과 악령의 의표를 찌르는 말씀이기 때문에 상식이하의 말씀일 수 있습니다. 세상과 악인들의 의표를 찌르는 말씀이기에 상상을 초월하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시는 말씀은 골리앗의 의표를 찌르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래서 육척 장신이 삼척 단신 어리아이에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말씀은 언제나 사울의 의표를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다윗을 잡지 못했습니다. 끝까지 잡지 못했습니다.

말씀대로 살다보면 고달프고 고생스럽기는 하지만 끝내는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치에 맞지 않고, 상식에서 벗어난다 하여도 무조건 믿고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을 물리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작은 기적이 쌓이면 큰 성공이 됩니다.

엘리야의 생의 사이클은 실패 같았지만 성공하는 케이스였습니다. 환난, 말씀, 순종, 성공적인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사기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이클도 마찬가지입니다. 범죄, 환난, 기도, 말씀, 구원(성공)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사이클도 마찬가지입니다. 범죄, 환난, 기도, 말씀, 기적적인 구원(성공)입니다. “나는 사탄의 의표를 찌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리라.”.... “그래서 나는 반드시 성공하리라”...

2. 말씀대로 사는대도 좌절 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불을 끌어내려 제단의 제물을 태웠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나타냈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임을 증명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백성들의 도움으로 기손 시내로 끌고 가서 하나도 남김없이 처형했습니다.

아합의 마차 앞에서 충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28km를 달려 아합을 궁으로 편안하게 가도록 안내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사기충천했습니다. 아합의 칭찬을 받고, 이세벨의 회개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외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내가 내일 이 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왕상19:2)고 전했습니다. 이세벨의 바알과 아세라를 두고 맹세하는 독살 맞은 전갈은 엘리야를 사시나무처럼 떨게 만들었습니다.  오금이 저려오게 만들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지구상에 자기를 위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 홀로(Only Oneself)였습니다.

엘리야는 독불장군(獨不將軍)이 아니었습니다. 독불장군은 일종의 고집쟁이를 말합니다. 골리앗이나 삼손과 같은 자들을 말합니다. 독불장군은 외롭지 않습니다. 자기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나 홀로”의 약한 자 이었습니다. 갈멜산의 수많은 인파들은 잠시 수면위로 떴다가 또다시 수면 아래로 주저앉았습니다. 엘리야 홀로였습니다. 엘리야 옆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머저리같은 사환 하나만 있을 뿐입니다. 둘이서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로 도망했습니다. 사환을 그곳에 두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정신없이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상 도망갈 기력도 없었습니다. 도망의 의미도 없었습니다.  그는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19:4)라고 기도했습니다. 엘리야는 상당한 좌절에 빠졌습니다. 세상을 넉넉하게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 버렸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귀찮았습니다. 거치적거리는 가족들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죽음이 유일한 탈출구였습니다. 이세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살다보면 입맛이 쓰고, 생의 의욕이 사라지고, 죽음이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해주리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인간의 한계점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믿음으로 벗어나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고 말했습니다.

갖가지 우상과 도덕의 타락으로 나라가 좀먹어 가는 때에 하나님 편에 서서 목숨을 내어놓고 우상과 싸울 수 있는 정의의 사람, 바울과 같은 신앙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기를 구할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구함이 마땅합니다.

3.  말씀대로 살면 끝내는 승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작과 끝은 복음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끝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마지막 시간을 말합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5절)고 말했습니다. 엘리야의 끝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엘리야의 끝은 그의 사명을 다 감당해야 했습니다.  엘리야의 자비로우신 주님은 그를 채찍질하거나 그의 두려움을 질책하는 사자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그의 사랑하는 아버지는 피곤하고 지친 당신의 자녀를 위로하고 그의 지친 육신을 돌보셨습니다.
“일어나서 먹으라” 갈멜에서의 무서운 긴장, 아합을 인도하여 달려야 했던 그 피곤한 질주, 광야로의 긴 여행 등은 틀림없이 그를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치고 고단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공급된 치료제는 “숯불에 구은 떡과 한 병의 물”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신체구조의 허약함을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요 21:9-12).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기까지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잠을 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는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으므로 만약에 천사가 일어나서 먹으라고 그를 깨우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음에 이르는 잠을 자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 부드러운 손길로 실의에 잠긴 숱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어루만져 주시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일어나서 먹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처음 취한 음식은 그의 육신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두 번째로 취한 음식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한 증인이 될 수 있는 영혼의 힘을 얻게 해주었습니다.

그 40일간의 여행은 그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힘에 의해 행해진 것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이 은혜는 그를 하나님의 산에 이르게 하는 데 충분했습니다 (이는 약 320㎞의 여행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좋지 못한 일에는 빨리 물러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생활은 끝까지 버티고 견디는 인내심을 길러야 합니다.

끝맺는 말

하나님의 복된 말씀 안에 거하는 그분의 모든 자녀의 손닿는 영역 내에 있는 “그 식물의 힘”을 아직껏 알지 못하고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예레미야는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로다”(렘 15:16)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끝내는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천군 천사들의 불말과 불병거로 아합과 이세벨이 없는 그 하늘나라로 취함을 받았습니다. 조만간에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놀라운 축복이 있으리라 확실히 믿습니다. (신 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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