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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다 이적을 통해 깨닫는 교회의 모습 (막 4:35-41; 막 6: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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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이적을 통해 얻는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증거하겠습니다.
이 두 본문을 바다이적본문이라고 말들합니다.
왜 바다이적이라 했겠습니가? 바다이적이라는 이름을 보며 이것을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의아해 하신 분들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바다이적이라는 단어만을 들여다 보면 이것이 바다를 어떻게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바닷에서 무슨일을 벌였다는 것인지 알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바다이적의 관심사는 바다 자체가 아니라 교회였다는 점을 우리가 좀 생각해 볼 바라고 봅니다.

1) 두개의 ‘바다’이적이 있습니다.

본문 마가복음 4장 35-41절과 6장 52절을 일컬어 쌍둥이 이적이라 부릅니다. 뭔가 닮은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지요, 더불어 우리는 이를 두고 구체적으로 ‘두개의 바다 이적’(sea miracles) 이라 부르기도 하고요, 혹은 ‘배 이적’(ship miracles)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두 이야기는 분명 다른 이야기지만, 서로 많이 흡사한 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쌍둥이 이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두 이야기 속에는 바다가 등장하고요.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또한 배도 등장합니다.(이도 당연하지요) 그리고 그 배에는 제자들이 탓습니다. 이것에 관심하십시오. 그리고 이 배에서 제자들은 어려움을 풍랑을 만나고 주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이 이들을 만나주시고, 도와주신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이 닮았습니다. 그래서 쌍둥이라고 하며, 닮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마가복음은 ‘바다’, 혹은 ‘배’를 잘써먹는 복음서입니다. 이 복음서는 배, 바다에 관심이 많습니다. 물론 제자들중 수제자 축에 드는 베드로, 요한, 안드레, 야고보가 어부니 당연히 자주 언급되어지겠지만, 마가복음은 특별히 이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습니다.
(숫자상으로도 확연합니다. 우선 마태복음에는 13번, 누가복음에는 8번, 요한복음에도 8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마가복음에서는 여타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짧은 반면에 17번이라는 가장 많은 빈도수를 보여줍니다.)

배와 관련된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1:19에서는 베드로와 안드레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다가” 예수의 부름을 받습니다. 4:1에서는 예수님은 “배”에 올라앉아 무리를 가르치시곤 하셨습니다. 또한 4:36에서는 제자들이 무리를 남겨두고 예수를 “배”에 모시고 갔습니다. 4:37 “물결이 부딪쳐 배에 들어와…” 5: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이…” 5: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매” 5:21 “예수께서 다시 배를 타시고 건너편으로 돌아오시자 큰 무리가” 6:32 “이미 배를 타고 한적한 곳에” 6:45 “배를 타고 건너편 벳세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등등 마가복음에서는 배에 대한 언급이 잦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마가복음에서 배에 대한 언급은 앞부분으로 편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한데, 마가복음에서 앞부분은 예수님의 이적과 관련되어있으며, 주로 갈릴리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이적,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관련됩니다. 반면에 후반부는 주로 내륙지방, 특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한 예수님의 활동을 담고 있으며, 그 내용은 예수님의 수난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후반부에는 당연히 바다나, 배에 대한 언급이 없음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2) 배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리 마가복음 기자는 배에 대해 관심하겠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배가 의미하는 바가 크기 때문입니다.

① 우선 마가복음에서 배는 흔히 예수님과 제자들이 무리로부터 분리 혹은 혹은 구분되는 장소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4:36에 보면, “그들은 무리를 남겨두고 예수께서 배에 앉으신 그대로 모시고 갔다”고 되어 있으며, 비록 “다른 배들도 함게 있었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예수와 제자들이 무리로부터 떠나서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배를 타신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8:14와 3:9의 경우 ”배“가 언급되는 목적도 분명히 예수가 무리들로부터 떨어지기 위한 것이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무리들로부터 분리되어 “배”가 언급되어 있는 점 때문에 초대교회에서는 흔히 “배”를 교회를 위한 상징으로서 생각하였습니다.

② 또한 6: 45-46에서도 예수님이 무리들은 헤쳐보내고 제자들을 배에 태워 떠나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언제나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며, 그들의 이름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경우라고 문맥상으로 그점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무리들이나 적대자들이 배위에 올라탄 사람들로 언급된 경우는 한번도 없습니다.

③ 그밖에 마가복음에서 “배”는 교훈과 관련되어 언급되고 있습니다. 4:1에서는 예수님이 무리들을 향해 설교하시기 위한 강단으로 “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8:14에서는 ”배“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사로운 교훈을 주기 위한 장소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④ 또한 배가 나타내는 놀라운 비밀 하나는 배는 신앙적인 재충전의 장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이용하여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었습니다. 즉 다시말해 이곳에서 예수님이 이적을 베푸시고, 다음 곳으로 옮기시며 배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뒤집어 말씀드리면 늘 예수님은 교회된 배에서 충분한 쉼과 충전을 취한신 이후 뭍에 내려 세상에 내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을, 놀라운 이적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즉 배는 가르침, 세상으로부터의 구별됨, 말씀의 선포, 빵을 떼고 나누는 교제의 장의 의미로 교회의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교회가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가 교회다와지려면, 구별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쉼과 충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사귐과 나눔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긍극적으로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전함에 있음을 잊지말아야 할 것입니다.

3) 교회를 지키시는 주님
배가 교회를 의미하기에, 예수님이 폭풍 가운데서 배와 고통받는 제자들을 구원하셨다함은, 당시 교회가 겪고 있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가 겪고 있던 로마로 부터의 박해, 세상이 주는 수많은 어려움들로부터 받는 고난, 이러한 안타까운 모습의 교회를 예수님이 구원해주시리라는 희망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에 ”(그날 저물 때에)란 문구도 어두움을 가리키는, 즉 교회가 어둠의 세력 가운데 처했을 때를 가리키는 용어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쳐 배에 들어왔다.”는 말도 교회에 임했던 엄청난 박해와 고난의 물결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울부짖음은 당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의 죽음을 당하며 부르짖었던 울부짖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6:45-52의 바다이적에서도 “날이 저물었을 때”(6:47), 곧 어둠의 세력이 지배할 때에 일어난 이적입니다. 그리고 바람이 거슬러 불고 있었다는 말은 교회에 박해의 바람이 즉 순풍이 아니라 역풍이 불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배젓기에 몹시 앴고 있었다”(48)는 말은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를 바로 인도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음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당시 예수는 부활 승천하셔서 교회에 현존해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함께 있지 않음은 47절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한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셨읍니다.”란 말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떠나 계셨던 “예수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51) 예수는 바람을 진정시킬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심으로서 그들을 진정시키셨던 것입니다.

4:35-41에서는 예수님이 계속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제자들이 죽음의 위험에 처할 때, 그리고 구원을 호소할 때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즉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6:45-52에서는 예수가 제자들과 떨저여 계시지만 즉 예수는 이미 승천하셔서 제자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제자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비록 그들이 구원을 호소하거나 간구하지 않더라도 주께서는 이미 제자들의 곤경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난 그들을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김 병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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