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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 (롬 10: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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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 여기 두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좋은 소식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쪽이 우선하느냐고 하면 좋은 소식이 우선합니다. 선교에 있어서 네 가지 요소를 강조합니다.
  첫째는 사람을 보내야 됩니다.
  둘째는 기도를 후원해야 됩니다.
  셋째는 재정을 후원해야 됩니다.
  넷째는 복음이 가야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의 복음은 앞의 세 가지보다도 더 우선합니다. 아무리 선교사가 교육을 많이 받고 외국어에 능통하고 선교후원이 든든하다 해도 선교사가 가지고 있는 복음에 대한 신학사상이 잘못되면 그 선교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무지를 극복하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연약한 것은 용서를 해도 무지한 것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우리는 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하여 무지하면 하나님이 그 무지함을 변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4장6절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영적인 무지를 책망했습니다.
  누가복음 23장34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처음 드린 기도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는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무지했다는 것입니다.

  유학 가서 만난 부부가 거기서 박사학위까지 받고 결혼도 해서 이제 두 사람이 본국의 어느 대학연구소에 초빙을 받아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유학까지 한 부부박사로서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무엇하나 부러울 게 없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이 가정에 드러나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는데 까지 이르고 심지어 남편의 구타로 아내가 입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소문이 납니다. 그러니까 학교에서도 문병을 오고 친구들과 친척들이 문병을 옵니다. 어찌해서 이렇게 다쳤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 민망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한인교회 다닐 때부터 교회로부터 촉망과 존경을 받는 크리스찬 부부였습니다. 최고학력에 안정된 직업에다가 교회에서 집사직분까지 받은 이 가정에 무엇이 문제였냐면 그들은 영적인 면에서 무지가 있었습니다.

  무지라는 것은 무식과 개념이 조금 다르다고 봅니다. 무식이라는 것은 못 배워서 무식한 것입니다. 수치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못 배우면 무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무지는 다 갖추고 있으면서도 참된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다 갖고 있으면서도 올바른 것을 행할 줄 모르는 것이 무지입니다. 특히 인간이 복음에 대하여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무지하면 인간적으로 다 갖추어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인간에게는 네 가지 후회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그 때 참았을 것을
  두번째, 좀 더 부지런히 살 것을
  세번째, 좀 더 베풀고 살 것을
  네번째, 이런 때가 올 줄을 알고 살았더라면

  이 네 가지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무지입니다. 참을 줄 알고, 좀 더 부지런하고, 좀 더 베풀면서, 내가 사는 삶의 가치를 좀 더 인식할 줄 알고, 주님 앞에 설 그날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사는 삶의 가치를 놓쳐 버리는 그것이 무지라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

  좋은 소식이 무엇인지 같이 나누어 봅시다. 저는 한 때 병원 옆에 살았는데 정말 좋은 소식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암인 줄 알았는데 그게 오진으로 밝혀졌을 때 좋아서 어쩔 줄 모릅니다. 암인 줄 알고 부인이 눈물로 밤을 새면서 기도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오진이라 하니까 너무도 기뻐합니다. 또 아이 얻은 소식도 기쁜 일입니다. 여러 가지 기쁜 일이 많지만 우리의 모든 삶의 기쁨 속에 복음적 기쁨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좋은 소문을 전화로, 이 메일로 사방에 알리되 거기에 복음이 묻어 있어야 됩니다. 복음의 요소가 아름다운 소식 속에 묻어 있어야 됩니다. 오늘 성경은 논리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일을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14-15)라고 했습니다.

  수사학적으로 표현을 했는데 이 말을 거꾸로 하면 보내야 전할 수 있고 전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믿을 수 있고 믿어야 부를 수 있고 불러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전부 다 하나로 묶어진 복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한번 생각해야 될 것은 보내기 위한 전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의 첫번째 출발점이 보내지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입니다. 보내지는 시작입니다. 가야 전할 수 있고 전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믿을 수 있습니다. 그 첫걸음이 가는 것인데 그것보다도 더 우선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보내지기 전에 훈련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훈련되지 못한 자가 가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단기선교는 훈련이다

  그래서 단기선교의 강조점은 전도에 있지 않습니다. 전도를 겸하는 것은 있지만 단기선교의 개념은 젊은이들이 자기 훈련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어떤 비전을 찾아보고 느껴보고 하나님 나라의 꿈을 느껴보기 위해서 부딪히면서 자기를 다듬는 훈련의 기회입니다. 단기선교는 전도하면서 내가 훈련되는 현장경험을 훈련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기선교가 선교의 종착점이 아닙니다. 훗날에 하나님이 큰 보냄을 위한 준비와 훈련으로 단기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이런 작은 보냄 앞에 가서 부딪히고 훈련을 받아야만 훗날에 하나님의 큰 보냄 앞에 응답을 할 수가 있는 줄 믿습니다.
  훈련을 받는다고 할 때 거기에는 장애물이 따라 옵니다. 고통을 감수해야 됩니다. 희생을 감수해야 됩니다. 대가를 치르면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너무 완벽한 후원, 너무 완벽한 여건도 훈련에는 역효과를 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TV에서 유학을 다룬 특집을 방영했습니다. 유학 온 학생들 가운데 실패한 사람들의 유형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유학여건이 잘 갖추어져 있는 사람들 중에 실패하는 사람이 더 높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넉넉한 용돈까지 주는 형편에서는 유학 온 학생들이 그 현장을 돌파하지 못한답니다. 정신무장이 안 된답니다. 단기선교 가는 아이들은 빠듯한 예산에 넉넉함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넉넉함이 없는 그 안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선교환경이 열악한 그 속에 어떤 훈련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의 주체는 좋은 소식입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단기선교의 주체는 좋은 소식, 즉 복음입니다. 본질문제입니다.

  건강한 DNA를 형성하자

  DNA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디오시리보핵산의 약자인데 인간의 생명체 안에 DNA가 생성됩니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이것이 파악이 됩니다. 우리의 생명체 안에 한번 형성되는 DNA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 어떤 개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요즘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또 어느 교회라며 소개하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신문에도, 잡지에도 교회소식이 많은데 요즘 소개되고 있는 교회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성경에 있는 교회 이야기보다 다른 교회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있는 교회들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가 아니라 이 세상 유형의 교회가 지금 자랑거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DNA가 변질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변할 수 없는 영적인 DNA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자랑거리 많은 교회소식을 들어보면 영적인 DNA가 아니라 오늘날 세속이 주는 DNA가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섬기는 우리가 교회공부를 많이 해야 된다고 봅니다.

  교회는 누가 세웠느냐, 교회 초창기에 어떤 신앙인들이 섬겼느냐는 전통이 교회에 DNA를 형성합니다. 선배들이 잘못 살면 더러운 DNA가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그만큼 교회는 중요한 교회의 전통에 DNA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길 때 나로 말미암아 이 교회에 어떤 좋은 DNA를 형성하게 할 것이냐를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이 교회를 세웠다고 평생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그런 교회의 전통 속에 어떤 DNA가 흐를까요? 저는 이런 기회에 평소에 가지고 있는 두 가지 교회사역의 비전을 설명하려 합니다.

  교회의 비전

  우리 교회를 도심 속에 있는 거룩한 교회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심 속에 있는 교회입니다. 서울에 있는 교회입니다. 종로구에 있는 교회입니다. 사대문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적어도 우리 교회 위치는 형식상으로 도시 중에 도시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를 하나님이 의도하는 거룩한 교회로 만들어야 되는 것이 제 목회의 비전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성장주의를 추구하는 목회를 하면 적합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이 지역을 떠나서 외곽의 발전하는 동네로 가야 오히려 성장을 더 잘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될 교회의 비전은 이 도심 속에서 거룩한 교회상을 보여주어야 됩니다. 그런 면에서 외형을 중요시하고 성장일변도로 가는 교회보다는 이 혼탁한 도시 문화 속에서 어떻게 교회본질을 지킬 것이냐, 어떻게 아름다운 DNA를 창출할 것이냐가 우리의 사명입니다.

  또 하나는 청년들이 꿈을 키우는 교회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청년들이 무언가 영적인 비전을 발견하고 그것을 붙잡을 수 있는 교회로 투자를 해야 됩니다. 어른들은 물론이지만 이제는 젊은이들이 교회라는 공동체에 와서 꿈을 보게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심 안에 있는 교회로서 존재이유가 없습니다. 젊은이들을 외면하는 도시 교회는 한 세대 후에는 몰락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손님들이 종종 오시는데 얼마 전에도 몇 분이 방문을 하셨습니다. 점심을 먹으면서 조용히 이야기 할 음식점을 찾는데 아무리 봐도 우리 동네에서는 갈만한 데가 없었습니다. 외곽으로 나가자고 하니까 시간도 없고 해서 찾아봐도 마땅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그 분들이 뭐라고 하느냐면 '와 보니까 순 촌동네 구먼' 합디다. 제가 그때야 '내가 사는 동네가 종로의 촌 동네구나'라고 느꼈습니다.

  여러분, 솔직하게 한번 이야기 해 봅시다. 우리 동네에 서울을 상징할만한 빌딩이 하나 없습니다. 예식장도 하나 없습니다. 쇼핑몰도 하나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찾는 카페도 없습니다. 관공서나 사무실 빌딩도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를 환경적으로, 시대적으로, 역사적으로 바로 인식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에 DNA를 만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 옆 동네인 광화문을 보십시오. 그 잘난 사람들이 우리 동네에 볼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또 다른 동네는 한국을 대표하는 대학촌입니다. 그러나 대학촌의 젊은이들이 독립문에 볼일이 있어서 오는 젊은이들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안산에 자주 올라가는데 갈 때마다 이런 공상을 합니다. '이 산이 없어졌더라면 신촌과 우리 동네가 평지로 열렸다면 독립문은 위대한 동네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공상을 해봅니다. 서로 옆인데 신촌의 젊은이들이나 광화문의 VIP들이 우리 동네에 볼 일보러 오지 않습니다. 물론 광화문에 있는 교회라고 해서 교인들이 광화문에 다 살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우리가 소외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촌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광화문하고 가까우면서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저는 소망을 이미 발견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DNA를 만드는데 그런 외형적인 환경 때문에 영향은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문제는 교회가 좋은 소식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되고 좋은 소식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좋은 소식을 잃어버리면 교회의 DNA가 망가지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이 망가지면 안됩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아이들이 서울의 우리 교단의 어느 교회로 가는 게 좋을까? 라고 할 때 독립문의 영천교회로 가라는 이 정도 좋은 소식을 퍼뜨려야 합니다.

  맺는 말

  젊은이들이 우리 교회에 최고의 재산입니다. 이들은 10년 후에 교회에 중요한 일을 해야 될 중심일군들로 다 성장합니다. 사회에서도 주축을 이루는 세대가 됩니다. 이들이 뻗어가야 교회가 희망이 있습니다. 또 후대 젊은이들이 교회로 들어와야 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성전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저는 예배당을 짓는 이유가 일반적인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이 동네에서 무언가 대표될만한, 그리고 무언가 주목받을만한 교회의 DNA를 형성하자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와서 비전을 걸 수 있고 복음의 맛을 무장할 수 있는 교회를 위한 연관성을 가지고 성전을 건축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섬기는 우리들은 교회공부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교회가 어떤 교회냐, 이것을 성경을 읽으면서 몸으로 터득하기 바랍니다. 세상의 교회소식에만 몰두하지 마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교회 속에서 우리가 세워갈 교회를 정립하기 바랍니다. 이런 교회 안에서 복되게 자라 가는 교회 젊은이들이 다 되길 바랍니다.
(이 용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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