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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의 동역자들 (행1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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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부루스>의 바울 곁의 사람들이란 책의 서론에 보면
[ 자석 주변에 쇠붙이가 달라붙듯이 바울 주위엔 언제나 동역자들이 모여들었다.
동역자를 만드는 일에 있어서 바울의 탁월성은 너무나 자주 언급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바울 곁의 사람들 역시
바울과 관련되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을 사람들이
신약성경에 70명 전도가 나온다 ]
이렇게 바울의 전도에 있어서 특징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동역자들을 잘 만났다는 것입니다.
첫 출발에 있어서 바나바를 만났고
2차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실라와 함께 했고
이고니온에서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렀을 때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만나 큰 힘을 얻게 되었으며
복음 사역에 동역자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처럼 좋은 동역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누구를 만나게 됩니까?
그리고 바울과 이들과의 만남이 우리의 복음 사역에 주는 영적 의미가 무엇인가?

여기서 먼저 고린도에 대해 살펴보면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서 번창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아덴을 우상의 도시라고 한다면 고린도는 음란의 도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덴은 정치와 철학과 예술의 중심지라고 한다면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의 도시였기 때문에
돈이 많다 보니 방탕과 쾌락과 음란을 상징하는 도시였습니다.
당시 고린도가 얼마나 타락한 도시인가는
고린도 시내 아크로폴리스(Acropolis)언덕위의
아프로디테(Aphrodite)여신의 신전 여사제는 종교적인 창녀로서
밤만 되면 거리로 나가는 여사제들이
약 1000여 명이 종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왜 여사제들이 거리로 나갔느냐 하면
당시 최고 인기가 있었던 경기가 올림피아드 이고
또 하나는 이스미안경기인데 이 이스미안경기가 열렸던 곳이 바로 고린도입니다.
각처에서 운동 경기로 고린도에 몰려오니 여사제들이 거리로 나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린도에 바울이 도착했습니다. <2>
바울이 고린도에 들어갔을 때 몇몇의 동역자를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먼저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는 아굴라가 먼저 나오지만
다른 성경에는 브리스길라 아굴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브리스길라가 굉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여성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소아시아 북부 <본도> 출신 아굴라는
명문 출신 브리스길라와 로마에서 만나 결혼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하기 1, 2년 전 AD52년경에
로마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이유는 유대인 Crestes(Christus의 오기(誤記)가 아닐까?)의 선동으로
로마에 소란이 일어났으므로 차제에 유대인을 다 추방해 버립니다. 귀족 출신 브리스길라도 남편 유대인 아굴라를 따라
고린도에 와서 천막을 지으면서 살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을 만나 평생 동역을 하게됩니다. 바울은 롬16:4절에
[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 할만큼
바울을 위해 헌신적인 동역자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자신들이 직접 전도하고 주의 일 하는 것보다
바울이 일하도록 돕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대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복음사역을 위해서라면 자신들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와 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와 같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평생 바울이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은 혼자 전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그들과 함께 협력하여 일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룩해 나가게 하십니다.

그럼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난
바울이 어떻게 전도를 하는가를 살펴보면
오늘 우리의 전도와 선교 사역에 많은 교훈을 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하여 볼 것은
바울과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는 천막 만드는 직업이 같다는 것입니다.
이 부부는 복음을 전하는 전임 사역자는 아닙니다.
생업에 종사하면서 헌신된 평신도 사역자로 아주 중요한 모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하니
당시 천막은 가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천한 일로 여깁니다만
<요아힘 예레미야스>의 유명한 책 [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 ]에 보면 <3>
당시 천막 기술은 세계 최첨단 기술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나노기술이나 바이오테크놀로지 기술 정도입니다.아무나 그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바울처럼 가문이 좋아야 했습니다. 귀족들만 배울 수 있는 기술입니다.따라서 바울은 그 기술을 이용해서
선교 비용을 충분히 충당했을 것으로 보입니다.바울은 요즘으로 치면 최첨단 기술을 가진 기술자로서 일하며 선교한 것입니다.우리는 이러한 사도 바울의 전도개념을 텐트메이커 <미서너리>라고 합니다.
전문인 사역자라는 말이지요.
우리 교회도 바울과 같이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같이
전문인 사역자들이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특히 당시에는 오늘날 교회 같이 제도적인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성도들이 헌금을 해서 목회자의 사례비를 드리고
선교사의 생활비를 지원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비량 전도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도 이런 자비량 선교하는 전문인 사역자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혹 오해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럼 지금 목사들도 자비량 목회하면 교회의 제정 부담을 들지 않을까?
그렇게 주장하는 교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혹 캘거리 당뇨병 치료제 이란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조선일보 98년 9월 22일 자에
캐나다 캘거리대 의대 당뇨연구센터와 EBMR 제약회사는 천연약초로부터 새로운 당뇨병 치료제의 개발에 성공했다고 공동 발표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캐나다 캘거리의대 당뇨연구센터는
한 할머니가 당뇨로 다리를 절단해야 할 심한 당뇨를 앓았는데
동남아로 다니며 당뇨에 좋다는 전통민간요법으로 완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19년 동안의 연구와 700여 차례의 실험 끝에
P-700이라는 당뇨치료신물질을 개발하였다는 것입니다.이 신물질을 개발한 분이 서울대학교 초청으로 한국에 오셨는데
그런데 이 분이 의학박사요 목사였습니다.
의사로서 병원에서 월급을 받고 주일에는 교회에서 설교를 한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전문인 목회자가 한국에도 많이 일어날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교인이 300명 미만일 때는 가능하지만 교인이 500명 이상만 되어도
목회자가 두 가지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저한테는 가서 돈 벌어 오라고 하면 안 됩니다.
바울은 주중에는 천막을 만들고 <4>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전문성이 있기를 바랍니다.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복음으로 돌봐주고 양육할 수 있는 복음의 전문성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하는데
8절에 저희가 훼방하여 대적하거늘 합니다.

이러한 대적의 방해 가운데도 복음을 밝히 증거할 수 있어든 것은
두 가지 배경을 들 수 있습니다.
1) 5절에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고린도로 왔다는 것입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이 양육한 제자들로
바울과 함께 제 2차 전도여행에 동행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실라는 빌립보에서 감옥에 함께 갇혔던 사람입니다.
밤새 바울과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다가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보았고
자결하려는 간수장을 전도하여
온 가족이 예수를 믿는 역사를 이룬 동역자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아들처럼 여기는 제자로
바울의 사역을 끝까지 도왔던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베뢰아와 데살로니가에서 곤욕을 치르고 도망쳐 나왔을 때, 그곳에 남아서 교회를 지키며 성도들을 가르치다가
고린도에서 바울과 합류한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 먼 곳에서 달려와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주는 동역자,
바울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즐거울 때, 일이 잘 될 때에는 동행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핍박받고, 어려움을 당할 때,
함께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동역자인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항상 이러한 동역자들이 있었던 것이
대적의 훼방 속에서도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근본적인 배경은
2) 5절에 [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 합니다.
[ 하나님 말씀에 붙잡혔다 ] 는 말, - 표준 새번역을 보면
[ 오직 말씀전하는 일에만 힘썼다 ] 로 번역되어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에 붙잡히면 <5>
그 붙잡힌 일에만 관심이 있고 힘을 쏟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무엇에 붙잡혀 있습니까?
돈에, 성공에, 아니면 자신의 삶에, 아니면 쾌락에 붙잡혀 있습니까?
그러면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붙잡힌 그것만 보이고 그것에만 마음을 쏟기 마련입니다.
바울이 말씀에 붙잡히니
오직 말씀 전하는 데만 힘쓰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 예수는 곧 그리스도 ]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메시아요,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시고 응답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 계신데
그분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소망이 없어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
아무 꿈도 없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소망을 가지게 되었고 희망으로 꿈꾸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와 불행과 저주와 실패와 질병을 짊어지시고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살아나셨습니다.
그 십자가 예수를 바라보고 십자가의 구속을 믿으면
죄를 사함 받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셔서 영생을 확증시켜 주시고
모든 인생들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구원이 있고,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
예수 안에 천국이 있는 것입니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안든 간에 예수님 한 분밖에는
천하에 구원을 얻을 만한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에 붙잡히는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사람들의 고백을 들어 보세요
고전9:16절 [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 ]
말씀에 붙잡힌 사람 선지자 예레미야도 렘20:9절에
[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

성도 여러분~! 예수 전하지 않아서 가슴이 답답해져 본적이 있습니까?<6>
영혼이 불쌍해서 눈물 흘리며 전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내 가족, 내 친구가 죽어가는 데도
가슴이 답답하지가 않다면, 눈물이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말씀에 붙들려 가슴에 불이 붙어 말씀 전하는데 힘쓰는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말씀에 붙들려 복음을 전하면
듣고 받아드리면 참 좋지않겠습니까?
그런데 가까운 사람부터 콧웃음 하면서 심지어 훼방까지 합니다.
6절에 보니 [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꼭 먼저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곳이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간절히 복음을 전하지만 짝사랑일 따름입니다.
안 믿으면 그 뿐이지 꼭 훼방까지 합니다.
바울이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이방인들은 복음의 빛만 비춰도 감격하고 눈물을 흘리는데
정작 복음을 받아드려야 할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 믿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경우를 종종 봅니다.
자기 가족 친지들은 전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은 잘 전도합니다.
이런 사람들 전도하다가도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내가 만난 예수를 간증하면 열심히 듣고 믿는데
정작 자기 가족은 안 믿어 주니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그러나 너무 속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도 그랬으니깐 요.
바울이 오죽 했으면 옷을 떨어 버리고
[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 가리라 ]
우리 말로 말하자면 에라 모르겠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나는 할 일 다했다 는 말이 되겠지요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그기서 옮겨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갑니다.
디도 유스도는 고린도에 살고 있던 사람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집에 찾아갔던 것입니다.
바울은 유스도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마침 그 집이 회당과 가까이 있어서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회당장 그리스보와 왕래하면서
그 가족을 전도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유스도는 <7>
회당장과 친분을 갖고 있었을 정도로 덕망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평상시의 모습이
회당장의 가족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는 역사를 이루었고
8절에 [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 고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 아닙니까?
참으로 아름다운 동역자는 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삶의 향기가 있는 사람들, 디도 유스도,
회당장 그리스보가 예수님을 영접하니
복음 받은 우리도 삶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나며,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주는 복음의 동역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붙들린 사람에게는 남다른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4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했을 때 편안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면서 편안한 곳이 없었지요
항상 위급한 상황이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눈을 떠야 할 것은
앞이 막히고 사방이 깜깜해지면 영안이 열려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갑자기 어두움 속에 들어가면
주변에 뭐가 뭔지 분간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이 비춰지면 사물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의 조명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조명이 비춰지면 실체를 분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뇌하고 있을 때 환상 가운데 주님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몇 가지 메시지를 주십니다.
1) 두려워 말고 잠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9절에 [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데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
전도에 있어서 최대의 적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사람이 두려움에 한 번 사로잡히면 어쩔줄을 모릅니다.
왜? 두렵습니까? 물론 드러나는 이유도 있겠지만
드러나지 않는 이유가 더 많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두려움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땅에 사는 살쾡이가 나무에 있는 다람쥐를 사냥하는 비법이 있답니다. <8>
다람쥐를 발견한 살쾡이는 순간적으로 매서운 눈초리로
다람쥐의 눈을 응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람쥐는 스스로 두려움의 파장을 내면
안절부절 못 하다가 운동신경이 마비되어
그만 나무 아래로 뚝 떨어져 살쾡이의 먹이가 된다고 합니다.
두려움이 다가오거든 거기에 신경쓰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딤후1:7절에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
그러니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거든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지금 주님은 훼방 당했다고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히 할 말 하라,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2) 10절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고 합니다.
말로만 두려워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 ]
하나님이 바울에게만 한 말 아닙니다.
수1:6-9절에 가나안 정복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세 번이나
[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라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
너와 함께 있느니라-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심지어 바벨론 포로 중에
찬455장 4절
[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불변 하시니 그 나라 가기 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 그러니 불분명한 것 가지고 너무 시들지 말고
확실한 약속의 말씀 붙들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3) 참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10절 하반절 [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

왜 하나님께서 바울을 고린도에 1년 6개월 동안 머물게 했습니까?
데살로니가에서는 3주간 전도하고 베뢰아 아덴에서는 잠깐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에서는 1년 6개월 머물면서 전도하게 합니다.
11절 [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
하나님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네 백성이 고린도에 많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도시, 얼마나 타락하고 음란하고 방탕한 도시입니까? 마는 <9>
그 속에 내 백성이 많기 때문에 유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안에 내 백성이 많으니라 는 하나님의 음성을
오늘 우리에게도 들리어 지기를 바랍니다.
[ 우상의 도시 쾌락의 도시 대구에 내 백성이 많으니라 ]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사는 대구는 고린도 풍조가 만연한 도시입니다.
우상과 향락으로 타락된 도시가 대구입니다.
여기에다가 주 5일제 근무는 대구교회를 더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린도 풍조를 바라보지 말고
고린도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바울에게 환상을 통해 들려준 메시지
[ 이 대구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 이 음성을 듣고
전도하는 내일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리워도 나는 내 믿음지키리니
고린도 풍조가 나날이 더 심해가지마는
세상풍조 바라보지 말고 주의 환상을 바라보고
내 믿음 지켜나갈 수 있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제사장 사명을 감당하는 내일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행히도 주 5일제가 된지 얼마 되지도 안했는데
주5일제가 시행되면서 들떠 있던 사람들이 어느새
[ 돈이 없고 갈 곳도 없고 같이 갈 사람도 없다 ] 고 푸념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점에서
대구의 고린도의 풍조를 보고 낙담할 때가 아니라
이때가 환상을 보고 주의 음성을 들을 때임을 알고
대구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내일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김 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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